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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더위에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만 간다.
물 한병 사먹을까 주위를 둘러봐도 변변한 가게조차 없는 시골길을 벌써 반나절이 넘게 달렸다.
의자시트 등받이 스펀지가 다 삮아서는 뒷자리 아저씨의 딱딱한 무릎이 내 등에 그대로 닿는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우데뿌르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릭샤 한대를 무작정 잡고 미리 알아두었던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말했다. 깨끗한 침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몸을 조금 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주인아저씨가 방을 안내해주며 창문을 활짝 열어주시는데 창밖으로 반짝거리는 야경이 너무 예뻤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오케이를 외치고 침대해 벌러덩 드러누웠다. 잠시 누워서 생각해보니 방값을 조금 비싸게 낸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래도 좋다. 넋놓고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골목의 개들이 짖는 소리에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볼까 하고 가이드북을 펼치니 잔잔한 호수에 비쳐 아른거리는 우데뿌르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보인다. 얼마나 큰 호수일까하고 창밖을 바라본 순간 화들짝 놀라버렸다. 호수가 온데간데 없는게 아닌가.
호수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드넓은 풀밭에 소가 무리를 지어 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어젯밤 분명 창밖으로 호수 비슷한걸 봐둔 것 같았는데 내가 본건 풀밭이었던 셈이다. 조금은 어이없지만 희한한 광경에 신기해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뭐 나름 초록빛 풀밭이 펼쳐진 풍경도 그리 나쁘진 않다.
그래도 그토록 보고싶었던 호수가 없다니 왠지 아쉽다. 물이 있었으면 더 예뻤을 텐데...하고 말이다.
가뭄으로 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호수는 제쳐두고 게스트하우스 꼭대기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바나나 라씨 한잔을 시켜놓고 앉아있자니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가볍게 얼굴을 스친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바로 이럴 때가 아닐까.
꼭 유명한 관광지를 가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그냥 앉아서 바람을 즐기고 햇살을 즐기는 여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한국에 있을때는 왠지 느끼지 못했던 진짜 여유를 혼자 다 가진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잠시 또 행복해진다.
물이 말라버린 호수의 모습은 흔히 우리가 아는 우데뿌르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호수의 물이 말라버린 자리는 어느덧 초록빛 풀이 자라 아이들의 운동장으로, 소들을 먹이는 초원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좋은걸까. 남들이 보지 못한 신기한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니...
배를 타지 않아도 내 두발로 걸어다니면서 우데뿌르 이곳저곳을 호수 한가운데 서서 바라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어버렸다.
멀리 레이크팰리스가 보인다.
호수에 물이 차있을때면 마치 물위에 떠있는 궁전처럼 보인다는 호화 숙소란다.
원래는 배를 타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은 물이 없으니 걸어서도 갈 수가 있다.
호수를 걸어서 건너는 경험을 언제 해보겠냐 싶어서 잔디밭을 따라서 무작정 레이크 팰리스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리봐도 나는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호수 밑바닥을 한발 한발 디딜 때 마다 내가 무슨 홍해를 가르는 선지자라도 된 마냥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레이크 팰리스까지 채 반을 못가서 뒤에서 누가 나를 자꾸만 부른다.
돌아보니 인도 아이들끼리 팀을 맞춰서 크리켓을 하고 있다. 크리켓은 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라는데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방향을 돌려서 아이들쪽으로 향했다.
공을 던져주며 한번 던져보라길래 이래뵈도 내가 한국에선 아마추어 선수인데... 하면서 자신있게 던졌다. 그런데 이녀석들이 다같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아무래도 내가 틀린 모양이다.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걸 들어보니 야구랑 크리켓은 비슷해보이면서도 꽤 다른 운동이다. 이거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땀을 흘려가며 크리켓을 같이 하고있는데 어느새 가족들까지 다 나와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풀밭에 앉아서 사진도 찍어주고 이야기도 하다보니 시간이 금새 지나가버린다. 내 카메라를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중에는 찍어준다고 해도 자기가 찍겠다며 카메라를 빼았아간다. 귀엽기도 하지.
그렇게 오늘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림한장 그리고 수다떤게 전부인 하루지만 참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분좋게 잠들 수 있을것만 같았다.
바쁜 삶에 지쳐 여유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는 인도를 여행해보기를 권한다.
언제나 웃으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인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힘들고 지쳤던 마음이 어느새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걸 느낄 수 있다.
인도의 시계는 한국보다 훨씬 느리게 간다.
우데뿌르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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