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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는 오로지 철길이 놓여진 곳만을 따라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철길 위에서 만큼은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은 채 마음껏 달리고 또 달린다. 아직도 기차여행하면 낭만과 설레임이 먼저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일까. 

 낮선 나라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마음 역시 기차와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놓여지지 않은 철길을 하나 하나 놓으면서 달려야 한다는것. 하지만 그렇게 작은 철길이 모이고 모여서 길고 긴 여정과 잊혀지지 않을 추억들을 만들어 내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사막을 힘차게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춰섰다, 어디 쯤이었을까


 기차에 오른지 어느새 12시간이 지났다. 가끔씩 긴 기적을 울리며 기차는 여전히 잘 달리고 있다.
 하루에 한장씩은 꼭 그림을 그리겠다고 바로 어제 다짐했는데, 채 하루가 안되서 그 결심이 깨지게 생겼다. 기차 안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나니 스케치북을 꺼낼 기운조차 남아있지가 않다. 게다가 쉬지않고 덜컹거리는 기차 위에서는 그림은 커녕 물한모금 쉬이 마시기가 힘들다.

  처음 기차를 탈때만 해도 제썰메르까지 '16시간'이라고 써있는 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방에 꾹 눌러 담았었는데, 벌써 몸이 베베 꼬이기 시작한다. 인도의 기차는 가끔씩 사막 한복판에서 멈춰서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기차안의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밖으로 뛰어내린다. 물을 마시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고... 16시간의 긴 기차여행은 꼭 이방인인 나한테만 힘든건 아니었나보다. 

 기차가 잠시 멈춰섰다. 잠금장치 조차 없는 허술한 출입문. 그 계단에 걸터앉아 재빨리 스케치북을 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작은 집이 몇 채 보인다. 누가 사는지, 마을 이름이 뭔지 물어 볼 새도 없이 기차는 다시 길게 기적소리를 울리며 떠날 채비를 한다. 아슬아슬하게 그림을 마무리 짓고는 그대로 조금 더 앉아 따가운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본다.


델리를 떠나온지 12시간 째, 전혀 다른 풍경이 또 펼쳐진다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사진기도 무용지물이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은 카메라를 절대 기다려주지 않았다. 와 하고 한번 소리치고 재빨리 카메라를 눈앞에 가져다 대면 이미 그 멋진 풍경은 열차 맨 뒷칸을 아슬아슬하게 비켜서 달아나 버린다. 그러길 수십차례, 다들 카메라를 내려놓은채 눈보다는 마음으로 먼저 밖을 바라보려 애를 쓴다.

 인도의 수도 델리를 출발해서 제썰메르까지 가는 기차는 예정대로면 16시간을 달려야 한다. 하지만 인도에서 기차를 탄다는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한 두시간 연착되는건 애교...아예 갑자기 기차 일정이 취소되거나, 힘들게 짐을 들고 올라탄 객실에는 내 예약석이 사라져있기도 한다!

 워낙 큰 나라이다보니 사실 16시간보다 길게, 심하면 32시간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도 있다. 그런 기차에 비하면야 이정도는 가볍다(?)라 생각하고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무모했는지 미처 몰랐다. 처음 두시간 까지는 그렇게 마냥 즐거웠다.

기차안에 대체 몇명이나 타고있는 걸까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아래로 숨어버리고, 슬슬 자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런데 분명 내가 돈을 주고 예약한 침대자리에는 인도 남자들이, 그것도 떼거지로, 마치 서커스를 하는 듯 아슬아슬하게 앉아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내가 예약한 자리니 좀 비켜달라고 말했더니 힌디어로 대답한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 듣겠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봐서는 알았다는 뜻인 것 같다. 아니, 알았다고 했으면 비켜줘야 할텐데 이아저씨들 꿈쩍도 안하고 계속 그렇게 앉아만 있다.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자기들끼리 무슨 재미있는 구경꺼리라도 생긴듯 히히덕대며 수다를 떤다.

이 아저씨는 한 술 더 뜨신다


 설마 이렇게 열여섯 시간동안 꼼짝도 못하고 앉아 가야하는건 아닐까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래도 여행 초반이라 잠은 좀 푹 자둬야 할텐데...

 그때 그렇게 혼자 겁먹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던걸 지금 생각해보면 하하하 하고 웃음이 다 나온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덧 침상에 올라가 있었던 남자들은 모두 내리고 열차는 이내 조용해졌다.

 내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은 델리로 출퇴근 하는 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 다들 입석표를 끊고 기차에 탄 사람들이었지만 초저녁에는 침대칸 승객들이 안잘꺼라는 생각을 하고 그 자리를 잠시 빌려(?) 앉았던 셈이다. 나야 평생 처음으로 보는 풍경이었지만 그 사람들은 매일 그렇게 출퇴근 하는게 일상일테니 내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꿈쩍도 안했던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도 기차 SL 클래스는 이렇게 생겼다


 인도에는 엄격한 신분체계인 카스트 제도가 있듯, 기차 역시 여러가지 클래스로 나누어진다. 
 에어컨이 빵빵하고 침대시트와 배게 커버, 물과 음식까지 제공하는 1A 클래스가 있는가 하면, 일종의 짐칸에 해당하는 의자도 없는 객차에 짐짝들과 함께 대충 앉아서 가는 슬리퍼 클래스 까지.

슬리퍼 클래스의 사람들, 안쪽으로도 저렇게 사람들이 가득하다


 내가 탔던 SL 클래스는 값이 싸서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낮은 클래스의 열차다. 뭐 나름 개인 침대도 있고 얼핏 사진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막상 타고보면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인도의 여름날씨에 에어컨은 커녕, 천장에 달린 선풍기들은 소리만 시끄러운 장식품에 가깝다. 가끔씩 침대밑에 벗어놓은 내 신발위를 기어다니는 쥐들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나마 열차가 달리고 있을때면 창문에 찰싹 붙어서 간간히 들어오는 바람으로 그럭저럭 땀을 식힐 수 있었는데 열차가 도시를 벗어나 사막에 들어서자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사막의 고운 모래바람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차 안을 순식간에 채워버렸다. 아차 싶어서 창문을 모두 닫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내 침대는 황토색 모래가 수북하다. 이걸 어쩐다...

안내 방송도 없는 인도의 기차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잘만 내린다

 

 
 의외로 한국 여행객들은 SL 클래스 열차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날씨가 덥다보니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에어컨이 있는 열차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쩌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땀을 조금 더 흘리는 대신 인도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 하며 함께 모래바람을 맞는 경험은 SL 클래스만의 매력이라면 매력일까.

우리와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간다던 아저씨, 나중에 그곳에서 또 만났었다


 워낙 긴 시간 열차를 타고 있다보니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제썰메르로 간다는 말에 힌디어 가이드북을 영어로 해석해 주면서 함께 여행계획을 짜주던 아저씨, 창밖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눈을 반쯤 감아가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주던 한 여인,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쥐어주며 귀여운 미소를 보여주던 꼬마아이, 인도 전통악기를 두드리며 내내 활기찼던 아르헨티나에서 온 레게머리 청년... 한명한명 이름을 기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

 인도 사람들은 워낙 능글맞아서 쉽게 마음을 열었다가는 사기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기 쉽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나 역시 머리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보니, 처음에는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들이 더 나쁘게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열 여섯시간 동안 함께 모래바람을 맞고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같은 곳을 향해 달리던 기차 안에서 만난 인도 친구들.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주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인도라는 낮선 곳에서 마음을 여는 법을 나도 모르게 배우고 있었던 걸까...

 만약 더 높은 클래스 기차의 표가 남아있었다면, 내가 돈이 조금더 여유있었다면 아마 이 클래스의 열차를 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내내 푹 자다가 기차에서 내렸을거고, 그 이후 일정을 밟으면서 비록 몸은 조금 더 편했을지 몰라도 마음은 계속 불편했을게 분명하다... 의심만 가득했을테니..

 고마운 인도 친구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고 인도를 좀 더 가까이 느끼게 해준 그들이 있어서 나의 여행은 늘 행복했던 것 같다. 아마 다시 인도를 찾아도 나는 또 SL 클래스를 탈거다. 너무 덥지만 않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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