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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를 다녀왔다면
이제 이 지구상에서 못갈곳은 없다'.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중 하나다. 물론 이 지구상에 인도보다 더한 오지야 셀수도 없이 많겠지만 확실한 건 인도는 절대 만만한 여행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럽고, 불편하고, 찝찝하고, 힘들고...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단어가 자주 머리속에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다시 또 가고싶다고 말하는걸 보면 참 이상하다. 그 그리움을 참지못하고 결국 다시 비행기에 오르기도하고, 인터넷을 뒤져서 맛있는 인도요리 전문점 찾아 진한 마살라 향기로 그리움을 달래기도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더럽게' 재미있는 나라, 그게 바로 인도다.


 10억 인도인 중 한사람이 되어 빠하르간지 귀퉁이에 앉아 처음 펜을 잡았다. 내가 갔었던 8월의 인도는 기온이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길가에 나가 5분만 앉아있어도 등을 완전히 적셔버리는 살인적인 더위를 직접 느껴보니 한여름에 인도를 가겠다던 나를 말리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던 빠하르간지는 그냥 소똥과 오물이 뒤섞여 범벅인 포장도 안된 골목길이었다. 맙소사. 적잖이 실망하고있는 찰나에 이번에는 얽기섥기 전봇대와 얼싸안고 브루스를 추고있는 전깃줄들이 보인다. 새로운 세계다, 문화충격이다...등등 말로만 듣던 인도를 막상 직접 보고있자니 황당할뿐이었다.
 그냥 내가 묵고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보고 싶어서 밖에 나와 펜을 들고 낑낑대고있는데, 젊은 인도총각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한마디 한다.

"그 지저분한건 뭐하러 그려요, 근데... 똑같네? 하하하 실력 좋으시군요!" 

 


 인도의 골목길은 나에게 잠시 숨돌릴틈조차 주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인도와 차도의 구분은 흔적조차 없었고, 자동으로 녹음된 소리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쉬지않고 클락션을 울려대는 운전자들과 길을 가득메운 릭샤와 택시들을 손으로 밀쳐가며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이었다. 그와중에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제 얼굴보다 더 큰 카메라를 하나씩 들쳐메고 길을 걸어다니는 여행자들의 애처로운 표정이 뒤섞여서 '넌 지금 인도에 있는거야, 정신차려'라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먼저 카메라를 챙겼다. 일주일 전부터 필름도 30통이나 주문해 놓고는 여행을 가는건지 출사를 가는건지 모르게 마냥 들떠있었다. 하지만 인도에 도착한지 이틀만에 내 카메라는 망가져버렸다. 처음에는 짜증부터 났다. '신이시여 제게 무슨 원한이 있으셔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지만 짜증낸다고 해결되지는 않는 일이니 대책을 찾아야만 했다. 인도의 용산 전자상가라고 불리우는 찬드니촉을 몇바퀴씩 돌아봐도, 카메라 수리점을 들러봐도 카메라를 고칠수 있다는 사람은 없었고... 몇 일 뒤에는 설상가상으로 비상용으로 가져온 구형 똑닥이 디카도 바닥에 떨어뜨려서 액정이 박살나버렸다. 허허허...이정도면 허탈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여행을 하지 말라는 신의 뜻인걸까. 필름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모두 잃은 내 가방속, 이제는 짐이되어버린 필름 30통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사진을 찍지말자. 그래, 나는 처음부터 사진기를 안가져온셈 치지 뭐.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어깨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으니 무슨 갑옷을 벗어던진 마냥 몸이 가벼워졌다.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하겠노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못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여행을 할 준비가 된걸까 다시 생각해보면서...


 사진을 찍어야 할 '의무'가 없어지니 오며가며 눈이 더 바빠진다. 그래 그건 좋은데 소심한 내 심장 한구석이 '그래도 뭔가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라고 되물어 온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게 아마 그쯤이었던것 같다. 

 잘그리든 못그리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골목 어귀에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보면 내가 너무 빨리 걷다가 놓쳤던, 사진 한장 달랑 찍고선 지나가 버렸던 풍경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을 찍는 3초 남짓한 시간동안 사진속에는 순간기록될 뿐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30분은 내게 기록 이상의 시간기억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주변으로 순식간에 모여드는 호기심많은 인도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은 덤이다. 그때 했던 이야기들,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은 기쁨이 되고 추억이 되어 남았다. 어쩌면 카메라를 잃어버린게 오히려 나에게 더 많은걸 얻게 해준셈이다. '새옹지마'는 명심보감 책속에만 있는 말인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보다.


 인도에서 돌아온지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그래서 그림은 어떻게 됐냐구?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인적인 더위와 정신없는 인도의 골목길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그리진 못했다. 뭐, 내자신에게 하는 구차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너무 아쉬운건 어쩔 수 없는걸까.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크로키북을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콤쌉싸름한 인도의 향은 그 몇 천장의 사진보다도 낮선곳에서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한채 내 책장 한구석에 가지런히 꽃혀있다.

 참, 이 글에 있는 사진들은 여행지에서 만난 동행들이 찍어준 사진들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동행들이 보내준 사진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양이 상당했지만 블로그에서는 그림을 통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오래된 창고에서 먼지가 수북히 쌓인 그림책을 후후 불어가며 한장 한장 넘기듯, 조곤조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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