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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여행자가 아닌 인도 오르차 아이들의 영어선생님으로서 수업을 하는 첫 날이다. 그간 대학생활을 하며 과외 아르바이트는 꾸준히 해왔었지만 이렇게 '선생님'이 되어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일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됐다. 반면 여행을 마치고 곧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할 누나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착착 모든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르차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수업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전날 밤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다. 나중에 아이들과 수업을 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너무 딱딱하게 생각하고 수업을 준비했던것 같기도 하다. 우리 둘다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람들은 아니지만서도 어느새 한국식 수업에 너무나 익숙해져있었던게 아닐까. 파란 하늘아래 흙바닥 교실에서 진행되는 오르차에서의 영어수업은 그야말로 '열린 수업'이었다.




오르차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르다.


 아침 일찍 가네쉬가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수업을 시작하기로 약속한 8시 반까지 맞춰 가기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어제 간즈 빌리지 언덕에서 가네쉬와 이야기를 나누며 본 풍경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건만, 오늘 하늘은 더 아름답다. 인도에서 이렇게 멋진 풍경을 마주하고 그 아래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정말 축복받은 여행이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고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수업이라 다들 기대가 크다고 했다.


이들에게는 수업이 곧 놀이고, 즐거움이다.


 수업은 오전 내내 계속됐다. 아이들의 나이가 다 다르고 영어실력도 천차만별이라 말 그대로 같이 이야기하고 뒹구는 수업이 계속되었다. 간단한 알파벳과 단어들, 숫자세기, 월이름과 요일 외우기 같은것들을 가르쳤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착착 알아서 하는게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이다. 한 단어를 알려주면 어느새 공책에 받아쓰고는 몇번씩이나 계속해서 다시 써본다. 쉬는시간이 되면 교실 앞 마당에 둘러앉아 한명씩 차례대로 알파벳을 외우고 숫자를 센다. 펜 한자루 사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이지만 저마다 공책과 펜을 들고 다닌다. 가까이서 보니 대부분이 한국 공책과 한국 펜들이다. 간즈 빌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선배 여행자들이 아이들에게 남기고간 소중한 선물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인도 가정식 백반(?)


 그렇게 왁자지껄한 수업이 끝나고, 가네쉬의 집으로 와서 다같이 밥을 먹었다. 사실 더 많은걸 가르치고 싶었지만 누나랑 둘이서 스무명 가까운 아이들을 일일히 체크해주는게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는 숙제로 내줬는데, 아이들은 교실을 떠나기도 전에 벌써부터 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에서 아이들 과외를 가르쳤을때를 떠올려보면 이곳 아이들은 정말 100점짜리 학생들이다. 한국 아이들은 고작 몇 페이지 숙제만 내줘도 그걸 다 못해서 매일같이 혼나고 짜증을 부리지만,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은 저마다 숙제를 더 내달라고 아우성이다. 커다란 눈망울 만큼이나 마음씨가 참 예쁘다.

천방지축 장난꾸러기 막내, 아닐

 
 가네쉬의 작은동생 '아닐'이다. 이때만 해도 장난꾸러기 꼬마였는데 얼마전 다른 블로그에서 찾아보니 그새 많이 어른스러워졌더라. 오늘의 점심메뉴는 말 그대로 '인도식 가정식 백반'이다. 아닐이 손에 들고있는건 인도의 주식인 '짜파티'. 기름기 없이 구워낸 밀가루 떡처럼 생긴 음식이다. 그걸 손으로 죽죽 찢어서 사진에 보이는 노란 스프같은 '달'에 찍어먹는다. 콩이나 각종 야채를 끓인 국물을 식혀 만드는 '달'은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난다. 여행자들이 다니는 식당에서 먹는 음식들과는 많이 달랐다. 손님으로 초대받아 인도의 가정집에서 먹는 짜파티가 더 달콤했다고 할까나.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을까 그동안...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을 더 가네쉬네 집에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정오 시간을 피해 돌아다니는게 좋기 때문이다. 함께 TV도 보고(흑백이지만) 그림도 그리고 힘자랑(?)도 하며 있는데, 밖에서 여자아이가 열심히 숙제를 하고 있는게 보인다. 사실 숙제래봐야 새로 배운 영어단어들을 열번씩 써오는 다분히 한국적인(?) 것이었지만 어찌나 진지한 눈빛으로 열심히 하고있던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쉿 하고 신호를 보냈다. 장난끼 가득하고 천방지축인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간즈빌리지의 여자 아이들은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다. 한국이나 인도나 여자아이들이 먼저 철드는건 똑같은걸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 아이들인데...그동안 선생님이 없어 공부를 못했을걸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모든건 자연으로 부터 얻는다!


 오후 수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교실이 아니라 집앞의 작은 텃밭으로 향했다. 오늘의 오후수업에선 야외에서 함께 낚시와 수영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끼로 쓸 지렁이는 직접 땅에서 잡았다. 10분이 채 안되어 비닐봉지 한 가득 지렁이가 담겼다. 나무를 깎아 만든 낚시대와 지렁이를 들고 오르차 시내에서 더 먼 강가로 향했다.






지도 밖으로의 행군...은 이런 느낌일까?


 가이드북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넓은 들판. 평범한 여행자가 되어서는 절대 와볼 수 없는 이 길을 걸으며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마치 동화속 한 장면에 들어온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나무와 풀들... 한발짝 한발짝 걷는 순간이 모두다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은 강가에서 수영하며 놀기위해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먹고 마시고 뛰노는 아이들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과 꿈들이 가득할까. 도시의 지독한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아이들에게 이 풍경을 꼭 한번 보여주고만 싶었다.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삼십여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지평선 근처에서 불쑥 솟은 뭔가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인적드문 강가에 떡하니 사원 하나가 서 있었다. 감동이었다. 대 자연속에서 드문드문 마주치는 오래된 유적의 향기야말로 오르차의 진정한 매력이자 인도를 여행하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아이들이 낚시 도구를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한참을 서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말이 이럴때 쓰는거구나 하고 탁 무릎을 쳤다. 새파란 하늘과 흰 뭉게구름, 그 아래 자연이 빚은 각양각색의 돌들과 푸른 나무들, 멀리 보이는 사원의 스카이라인과 물에 비친 이 모든 풍경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눈이 '시렸다', 이토록 좋은 풍경을 그동안 못보고 살아서였을까. 눈이 너무 아파 몇번을 꿈뻑여야 할 정도였다. 눈이 시려서 흐르는건지 가슴속에 뭔가가 올라온건지 눈물도 한방울 또르르 흘러내린다.





아저씨들이 낚시를 좋아하는건 만국 공통의 진리^^


 손으로 대충 깎아 만든 낚시대와 지렁이가 전부지만 고기도 꽤 잘잡힌다. 물론 잡은 고기들은 다시 강으로 돌려보낸다. 아이들과 누가 더 많이 잡나 시합도 하고 물장난도 치면서 여유를 즐겼다. 사실 낚시도 물고기고 머리에 잘 안들어온다. 이런 풍경을 만나고,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낚은 물고기!


 전에 남도여행을 하며 갈고닦은(?) 낚시실력을 뽐내보려 했지만 결국 큰 고기는 잡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잡아준 물고기가 마냥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내친김에 속옷만 입고 같이 수영을 즐기기로 했다.


 해가 더 뜨거워지자 아이들은 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영복을 준비해오기는 커녕 인도에서 물에 들어갈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계속해서 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아이들 덕분에 팬티만 입고 풍덩 뛰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이 깊은 산골에서 누가 볼 사람이 있겠는가. 잠시나마 수영복을 생각했던 스스로가 우습다. 옷을 훌렁 벗고 맨몸으로 느끼는 오르차의 자연은 톡 쏘는 사이다처럼 짜릿했다. 그동안의 여독이 한순간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이랄까.



항상 유쾌해서 좋은 가네쉬.


 한국에서는 피부가 까무잡잡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나지만, 속옷 한장만 걸치고 물에 들어가있으니 유난히 내 피부가 희게 보인다. 어려서부터 산으로 들로 뛰다니며 자란 간즈빌리지의 아이들은 군살 하나없이 매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내가 계속 칭찬을 해주니 아에 가네쉬가 보디빌딩 쇼를 시작했다. 물에 들어오지 않고 멀리서 사진을 찍는 누나에게 포즈를 취하는 가네쉬. 가난 속에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았던건 이런 그의 유쾌하고 밝은 성격때문이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밀린 빨래가 많다.


 그렇게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루사이에 어찌나 좋은 풍경을 많이 보고 또 많은걸 했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 몸은 지치고 피곤하지만 오늘 눈으로 본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진다. 또 내일 교실에서 나를 기다릴 아이들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밀린 빨래를 주욱 걸어놓고 침대에 누우니, 여행자가 아니라 어쩐지 오르차 주민이 된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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