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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차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새벽 네시가 넘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음식과 물이 맞지 않아 계속 힘들어하는 누나와 그 옆에서 마지막까지 정중히 부탁을 하는 가네쉬.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더 남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길 바라는 가네쉬의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그러기엔 누나의 몸상태가 자꾸만 악화되는게 눈에 보였다.

 네시가 조금 넘어서 결국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늦은시간까지 우리와 함께있어준 가네쉬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막무가내다. 결국 가네쉬는 숙소 마당에 있는 해먹에 누웠다. 인도의 여름밤은 밖에서 자도 좋을만큼 덥지만 혹시나 모기가 있을까 걱정되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해충방지 스프레이를 가네쉬에게 건네줬다.

오르차에서 타는 마지막 릭샤


 오르차에서 카주라호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간밤에 가네쉬는 영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찌뿌둥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떠나보내는 마지막까지 애써 웃음지어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저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그렇게 기차역으로 떠나는 릭샤에 올랐다. 아쉬운 마음이들어 마지막까지 가네쉬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어찌나 릭샤가 빠르게 달리던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추억은 길었지만 이별은 한순간이더라.



순식간에 오르차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오르차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도로를 쌩쌩 달린다. 아그라에서 오르차로 처음 들어오던날, 공포에 떨며 한밤중에 달렸던 바로 그 길인데 밝을때 보니 영락없는 인도의 시골길이다. 한 도시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향할때면 으레 기분이 들떠서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지만 그때만큼은 누나도 나도 말이 없었다. 가네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다 마치지 못한 아이들과의 약속이 안타까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로컬 트레인이 다니는 오르차의 간이역 풍경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잔시역에서 내려 릭샤를 타고 오르차에 들어오지만, 사실 오르차에서 작은 기차역이 하나 있다. 다만 워낙 규모가 작아 발권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에 여행자들보다는 주로 현지인들이 로컬 트레인을 타기 위해 사용하는 곳이다. 우리는 릭샤왈라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기차표와는 전혀 다르게생긴 현지인들을 위한 기차표 두장이 우리 손에 들렸다. 이제 이 기차를 타면 정말 오르차와는 안녕이다. 플랫폼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기차역에서 만난 인도의 여인들


 이른아침이지만 오르차역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행하면서 늘 느낀거지만 인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참 부지런하다. 특히나 아침 일찍부터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주머니들이 인상 깊었다. 다만 시골 마을의 작은 역이다보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고 말이 도통 통하질 않는다. 미리 챙겨온 망고 하나를 깎아먹으면서 그렇게 마냥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표에 찍혀있는 시간은 이미 지난지 오래지만 기차는 올 생각을 안한다.

별안간 가네쉬가 짠 하고 우리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가네쉬!?

 오르차 마을에서도 릭샤를 타고 와야할만큼 꽤 멀리떨어진 곳인데 가네쉬가 온 것이다. 처음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알고보니 우리가 지난밤 가네쉬에게 줬던 해충방지 스프레이를 돌려주기 위해 이 먼곳까지 릭샤를 타고 뒤쫒아왔다고 했다. 사실 그 스프레이는 얼마 남지도 않아 가네쉬에게 다 쓰라고 준거였는데... 우리가 남기고간 물건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쫒아왔단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스프레이를 받아 흔들어보니 이미 내용물은 남아있질 않았다. 에구구... 여기까지 오는 릭샤 값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이럴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제대로 말해줄걸 하는 생각에서 미안함이 더 커진다.

가네쉬와 우리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불쑥 나타난 가네쉬. 깜짝 놀라 어쩔줄을 몰라하는 우리와 가네쉬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느새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 몰렸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기차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나중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가네쉬도 아마 스프레이통이 비어있다는걸 알지 않았을까. 다만 그걸 핑계로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웅해주기위해 기차역으로 달려온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배웅해주겠다고 가네쉬가 먼저 말했다면 부담스러워했을걸 생각해서 말이다. 가네쉬는 마지막까지도 우리에게 가지말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촉촉히 고여있었다. 하지만 결국 카주라호로 출발하는 열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가네쉬의 마지막 모습... 지금은 어떻게 또 변했을까?


 커다란 굉음과 함께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탄 창문에 착 달라붙은 가네쉬는 마지막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기차는 점점 빨라지고 가네쉬는 죽을힘을 다해 우리를 따라 달려보지만 결국 열차는 플랫폼을 벗어나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 앞에서 사라진 가네쉬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오르차와의 마지막 추억, 가네쉬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기찻길 풍경들


 열차는 어느새 속도가 붙어 파란 하늘 아래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가네쉬와의 아쉬움은 여기서 훌훌 털어버리기로 하고 다시 남은 여행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다만 오르차에서 너무 현지인처럼 머물러서 그런지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떠나는 느낌이 또 새롭다. 델리 공항에 내려 인도에 첫 발을 디뎓을때의 느낌과 비슷했다고 해야할까.



정신을 차려보니 여긴 영락없는 인도 한복판이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잠시 앉아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영락없는 인도의 기차 안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도의 로컬 트레인은 여행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SL 클래스의 기차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일을 나가거나 장사를 하기위해 옆 도시로 통근하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고 기차에서 외국인이라고는 누나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인도 사람들도 우리가 신기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하지만 아무도 영어를 할줄 모른다. 손짓 발짓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도 여행가이드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들이 살고있는 나라가 책에는 어떻게 소개되어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가이드북을 건네주니 한참동안이나 그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럴때면 힌디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차 안에서 살 수 있는 주전부리들


 로컬 트레인에서 만날 수 있는 또다른 풍경. 기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주전부리를 파는 아주머니들이다. 특히나 위 사진속의 야채샐러드 같은 음식은 다른 기차에서도 자주볼 수 있는 음식이다(이름은 정확히 모르겠다). 호기심에서 몇번이나 사먹어볼까 생각을 했었지만 아무래도 위생상태가 걱정되서 선뜻 도전할 수 없었다.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위생이라는것 자체에 무덤덤해지기 쉽지만 그래도 먹는걸 잘못 먹었다간 여행이고 뭐고 숙소에서 끙끙 앓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땅콩만 한웅큼 사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야채 샐러드를 계속해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마침 옆자리에 앉아 그걸 먹던 인도인이 나에게 먹어보라고 권한다. 이게 왠떡이냐 싶어 얼른 입에 털어넣고 맛을 보는데... 으아... 이건 도저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다. 시큼털털하면서도 어찌나 짜던지. 뱉어버리고 싶었지만 예의상 꾹 참고 꿀꺽 삼커버렸다.




광활한 자연을 가로지르는 인도의 로컬 트레인


 기차는 계속해서 몇 개의 작은 역을 지났다. 역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조그만 건물하나가 다인 그런 곳들이다. 아직 카주라호까지는 멀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 풍경을 보고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인도에서는 기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까 산 땅콩도 다 떨어져간다. 한국에서 먹던 땅콩과는 조금 다른 맛이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다만 조금 놀랐던게 인도 사람들은 땅콩을 까먹으며 그 껍질을 기차 바닥에 그냥 버린다는 사실! 인도에서는 내 몸을 빼고는 전부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우리나라와 그 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기차 바닥에 여기저기 널부러진 땅콩 껍질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우리는 조용히 비닐봉지에 껍질을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문화의 차이라는게 생각보다 참 신기하다.





드디어 카주라호에 도착, 여행도 점점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마침내 기차는 카주라호 역에 도착했다. 오르차에서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덕분에 점심때가 채 못되어 도착할 수 있었다. 릭샤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이 오르차와는 사뭇 다르다. 공항도 보이고 나름 고급 호텔도 즐비한게 확실히 관광도시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릭샤를 내려 미리 점찍어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일단 카주라호에 왔으니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좀 먹어야겠다. 오르차에서 내내 몸이 안좋던 누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여기가 한국인지 인도인지... 카주라호는 이런 신기한 곳이다


 카주라호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막상 식당에 올라가보니 정말 '신라면'이 있다! 게다가 티비에서는 무려 'YTN'을 24시간 틀어주고 있었다. 세상에...

누나를 다시 웃게 만들었던 카주라호의 김치볶음밥!


 신라면과 김치볶음밥을 시켜서 뚝딱 해치워버렸다. 인도에서는 배추를 구하기 어려워 대신 총각김치를 만들어서 쓰고 있었다. 생각보다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혀끝에서 느껴지는 한국의 매운맛이 참 반가웠다. 왠지모르게 카주라호에서도 오래도록 머물게 될것같은 느낌이 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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