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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나쁜 홍차 찌꺼기를 달여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시는 짜이. 인도 사람들은 아침에 짜이 한잔을 마시지 않으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도 사람들에게 짜이는 습관이자 생활이다.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에게 짜이 끓여주기를 참 좋아하는 템플 뷰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아저씨 덕분에 오르차에 머무는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짜이를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마지막 한 잔을 마시는 날. 오르차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이자 간즈 빌리지 아이들과도 마지막 수업이다.
짜이 한 잔에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모든 맛이 들어있다. 오르차에서의 시간들 역시 한 잔의 짜이처럼 기쁨, 슬픔, 흥 여유... 여행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인 기분이랄까.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업을 하러 간즈 빌리지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오르차의 풍경, 간즈 빌리지로 가는 길.
사실 난 간즈 빌리지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남은 여정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인도 여행이야 다음에 또 오면 되는거고, 이왕 수업을 시작한 김에 힘 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가 갑작스럽게 몸이 나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르차를 떠나야만 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위생 상태도 안좋고, 변변한 한국 음식도 없는 이 곳. 결국 누나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물갈이가 겹치며 최악의 컨디션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르차 다음으로 우리가 갈 곳은 카주라호.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 라면이나 볶음밥같은 한국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결국 누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내일 아침 일찍 카주라호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휴! 어찌나 표정이 앙증맞은지.
잠깐 그런 생각도 했다. 여기서 누나와 헤어지고 나만 혼자 남아서 아이들을 더 가르치는건 어떨까. 계획대로라면 남은 도시는 카주라호와 바라나시 두곳 뿐. 포기하고 이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델리로 향하는 생각마저 해봤다. 하지만 누나 역시 아이들을 더 가르치고싶은 마음이 있다는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어쩔 수 없이 아픈 몸을 이기지 못해 떠나야 한다는걸 알기에 혼자 보낼수는 없었다. 어젯밤 가네쉬와 게스트하우스 중정에 앉아 밤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이 나와 누나를 너무 좋아하고, 또 오랜만에 수업을 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기에 가네쉬의 아쉬움은 더 커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라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떠나야만 했다.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도 모른채, 신나게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떠나기가 더욱 미안해진다. 우리가 가고 나면 또 언제쯤 선생님을 만나 수업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하늘도 유난히 더 푸르다. 마치 내가 오르차를 떠난다는걸 아는 것처럼...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에게 공부란 일상이자 즐거움이다.
그동안 간즈 빌리지에서의 영어수업은 한 명씩 개인적으로 숙제를 내주고 그걸 검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노트에 내가 직접 글씨를 써주고, 단어를 외우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주는 일도 많았다. 역시 아이들이라 그런걸까, 내가 그려주는 그림을 참 좋아한다. 한 아이한테 그려주면 어느새 내 옆으로 벌떼처럼 달려들어 자기 공책에도 똑같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아우성이다. 물론 그렇게 그림을 그려주고 단어를 설명하면 스스로 노래처럼 만들어서 단어를 외우려 노력하는 모습도 기특하다.
오늘은 특별히 마지막 수업인지라, 각자의 노트에다가 아이들의 얼굴을 캐리커쳐로 그려주기로 했다. 원래 인물은 잘 못그리지만 열심히 실눈을 떠가며 한 명씩 정성을 들여 그려줬다. 결과는 대성공! 내가 생각한것 처럼 이 아이들에게 좋은 작별 선물이 되었을까나...^^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교실에서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복습하는 시간. 일렬 종대로 줄을 맞춰선 아이들은 한 명씩 단상에 올라와 오늘 배운 내용을 차례대로 발표한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귀가 다 멍멍할 정도. 그래도 선생님으로서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느껴지는 소중한 시간이다. 모든 발표를 마치고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제 이 교실과도 안녕이지만 아이들은 왜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채 그저 멋진 포즈를 취하느라 정신이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자 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물을 떠오고 남자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숙제를 결코 잊지 않는다. 수업이 끝난지 채 한시간도 안되어 받아쓰기로 빼곡히 채운 노트를 내 눈앞에 들이민다. 얼른 더 다른 숙제를 내달라는 뜻이다.
열심히 숙제하는 아닐의 노트를 들여다봤다.
여기서 잠시 공개하는 막내 '아닐'의 노트! 내가 수업하며 그려준 코끼리 그림이 맘에 들었는지 몇 번을 따라그려본 흔적이 눈에 띈다. A부터 Z까지 단어를 한번씩 적은 숙제옆에 스마일 표시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마지막 숙제 검사를 마쳤다. 이제 아이들과의 작별인사는 끝났고...정들었던 가네쉬와도 작별해야할 차례다. 가네쉬는 몇일전 함께 수영했던 강가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마지막으로 오르차의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가네쉬와 다시 찾은 오르차의 강가.
언제봐도 아름다운 오르차의 풍경. 나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네쉬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떨림이 공존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내가 떠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하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이 순간에도 옆에 앉아있는 누나의 컨디션은 점점 안좋아지는것 같았다. 가네쉬도 그걸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아쉬울 뿐.
오늘은 오르차를 떠나지만 언젠간 꼭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겠노라 약속을 했다. 그런데 가네쉬가 하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찌른다. 그동안 간즈 빌리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수많은 한국 선생님들이 똑같은 약속을 하고 떠났지만 단 한명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뱉었던건 아니었을까. 진심으로 한 약속이었지만 가네쉬는 지키지 못해도 괜찮다, 상처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긴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걸 보면... 가네쉬가 옳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대신 내 마음속으로 스스로 한가지 약속을 했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언젠가 진짜 건축가가 되면 오르차로 꼭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주겠노라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또 다시 영어때문에 고통받을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꼭 학교를 지어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의 이 모든 이야기가 한 권의 노트 안에 담겨있다.
가네쉬의 모든 이야기는 저 작은 노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이곳을 찾아 아이들을 가르친 한국 선생님들의 간단한 이야기와 메모가 남겨진 노트다. 우리 역시 노트에 열심히 가네쉬의 이야기와 이곳에서 있었던 소중한 추억들을 옮겨 적었다. 언젠가 또 오르차를 찾아와 이 노트를 보고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줄 선생님들을 위해서. 혹시라도 오르차를 여행하다가 가네쉬와 저 노트를 보게 된다면 짧은 시간이라도 꼭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내가 가네쉬에게 선물한 그의 캐리커쳐.
그리고 아이들에게 선물로 캐리커쳐를 그려줬던 것처럼 가네쉬에게도 선물을 남겼다. 가네쉬에게 따로 한 장을 선물하고 주황색 노트에도 한 장을 다시 그렸다(물론 다시 그린 그림은 좀 안닮게 나왔지만). 얼마전 다른 블로그들을 찾아보다 우연히 내가그린 이 그림을 발견했다. 아마도 가네쉬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노트에 있는 내 그림을 촬영해서 돌아온 모양이다. 이 그림을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을 가네쉬를 생각하니 왠지 뿌듯한 마음과 함께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그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을까.
언젠가 꼭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가네쉬의 말을 듣고 열심히 계산한 내 손바닥이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가 얼마정도 하냐는 물음에 왕복 50만원의 비행기값을 루피로 환전해서 보여줬다. 무려 18000루피. 오르차에서 내가 묵은 템플 뷰 게스트하우스의 하루 숙박비가 100루피니, 18000루피면 무려 6개월을 머무를 수 있는 숙박비에 해당한다. 가네쉬가 숫자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자기는 평생을 일해도 만져보기 힘들 큰 돈이라고 했다.
이렇게 밖에 나와 오르차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저녁 무렵, 아이들이 별안간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이제서야 우리가 내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애써 웃고있는 아이들이지만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루종일 슬픈 표정을 하고 있던 가네쉬와는 달리, 아이들은 우리가 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웃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차에서 만난 파란 하늘처럼, 이 아이들의 미래도 밝았으면!
그렇게 오르차에서의 마지막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 한 도시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곳에서의 추억을 되짚어보고 다음 도시에대한 호기심으로 들뜨기 마련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럴수가 없었다. 카주라호로 떠나는 기차는 내일 아침 8시. 매일같이 간즈 빌리지를 찾아가 수업을 시작하던 바로 그 시간이다. 아마도 내일 교실문은 잠긴채로 남아있겠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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