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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우타르 프레타쉬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오르차.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작은 기차역이 마을 어귀에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은 근처 잔시에서 릭샤를 타고 들어와야 할 만큼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심심치 않게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곳.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적인 배낭여행 코스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는 마을이다.

 처음 오르차에 가기로 마음먹은건 델리나 우데뿌르, 아그라 같은 대도시에 질려서였다. 사람들은 득실거리고 릭샤 한번 타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흥정을 해야하는 탓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던것 같다. 반면 제썰메르나 푸쉬카르같은 작은 도시들의 여유로움은 같은 길을 몇 번씩 다시 걸어도 좋을만큼 내게 잘 맞았다. 어쩌면 아그라에서의 씁쓸한 기억을 뒤로하고 오르차에 들어가기위해 잔시행 기차에 오른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르차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는 여유, 휴식, 산책, 조용함... 이런 단어들이 가득했다. 이틀에서 삼일 정도만 머물다가 곧바로 카주라호로 빠질 계획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오르차에서 일주일 넘게 머무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소박함이 듬뿍 묻어나는 오르차의 메인 스트리트.


 오르차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인 잔시는 관광지라기 보다는 관광객들이 잠시 지나쳐가는 평범한 도시다. 아그라를 당일치기로 둘러보고 빠져나오는 바람에 잔시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각. 미리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잔시역에서 오르차까지는 릭샤로 20~30분을 인적드문 국도를 따라 들어가야 한단다. 겉으로는 아무리 평화로워 보여도 밤이되면 무슨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게 인도의 섭리이기에 잔시역에서 내게 달려드는 릭샤왈라들이 반갑기 보다는 무섭게 느껴졌다. 흥정할 여유도, 말을 더 이어갈 힘도 남아있지 않은 내 앞에 'Korean! Orchha!' 하고 친한척을 하는 릭샤왈라를 택해 릭샤에 올랐다. 

 잔시역을 출발한 릭샤는 이내 가로등 하나없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도로변에는 가게는 커녕 사람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데 윙윙거리는 릭샤의 엔진소리만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혹시 무슨일이라고 일어나지 않을까 누나랑 나는 계속해서 서로의 얼굴을 처다보며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불안에 떨며 20분쯤 달렸을까... 불이 꺼진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골목길에 릭샤가 멈춰섰다. 여기가 바로 오르차란다. 정말? 구름아래 희미하게 비추는 달빛을 빼고는 촛불하나 없는 한밤중의 골목길은 그야말로 공포 그자체였다. 서둘러 짐을 내리고는 미리 정해두었던 '템플 뷰 게스트하우스'에 방을 잡았다. 여기가 정말 오르차인지, 혹시나 무슨일이 생기는건 아닐지 걱정도 잠시,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인도스러움이 가득한 레스토랑의 액자.


 아침이 밝았다. 델리에서 100루피에 사온 전자시계의 힘없는 알람소리로는 눈을 뜨기에 역부족이다. 하지만 창밖에서 들려오는 거리에 소음에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마스떼' 하는 유쾌한 아침인사와 함께 달달한 짜이 한잔을 마시고 나와본 오르차의 풍경은 어젯밤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나라 시골의 읍 정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은 길과 거리, 그리고 형형 색색의 인도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 영락없는 인도의 거리 풍경이다. 그러고보니 델리 빠하르간지에 처음 도착했을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인도의 낮과 밤은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다르다.

안밖의 구분이 잘 없는 인도의 가게들은 편안해서 좋다.


 오르차는 상당히 작은 마을이지만 몇해 전부터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단다. 제대로된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급하게 아그라를 빠져나온 탓에 아침부터 배가 너무 고팠다. 일단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직 오르차가 어떻게 생긴 곳인지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일단은 주린 배를 채우는게 우선이다.


이게 김치라면이다! 김치는 어디가고 푸성귀만 잔뜩...


 간단하게 커리나 쵸우면으로 끼니를 떼울 생각으로 메뉴판을 살펴보는데... 김치라면이 있다?! 우데뿌르에서 먹었던 수제비와 칼국수의 맛이 떠올라 냉큼 시켰다. 헌데 이사람들 김치를 담궈서 라면을 만드나? 누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기다리는데 어째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밥알 하나 나올 생각을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내가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봤다. 
 주방에서는 나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여자 아이하나가 열심히 계량컵을 보며 뭔가를 하고 있는데... 어째 느낌이 불안불안하다. 얼마나 더 걸릴지 물어보니 1분만 기다리라고 나를 다시 자리로 안내한다. 인도에서는 늘 이런식이다. 1분만 기다리라고 하면 최소 10분은 더 기다려야 뭔가가 되는 식이니...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간다.
 
 드디어 기다리던 김치라면이 나왔다. 그런데 나온 요리는 어째 우리가 생각하는 김치라면과 많이 달라보인다. 음 뭐랄까... 야채죽에 불어터진 우동 면발을 적셔놓은 느낌이랄까. 매운 맛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김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정체모를 푸른 채소들이 동동 떠있다. 국물을 한입 떠먹어보니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무리 봐도 김치라면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질 않는다. 결국 반쯤 먹다가 가방에 있던 신라면 스프를 살짝 넣어서 먹었다. 라면스프는 정말이지 마법의 가루다. 정체 모를 인도식 국수요리가 스프 몇그람에 순식간에 라면으로 변신했다.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하던 아이는 자신의 요리에 대한 평이 궁금했는지 먹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다가 우리가 꺼낸 라면 스프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스프가 들어간 국물을 한입 먹어보고는 다음에는 꼭 이렇게 만들어서 김치라면을 대접하겠단다. 처음에는 기대했던 요리와 달라 당황도 했지만 열심히 배워서 한국 여행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소녀의 마음이 기특해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어찌나 눈망울이 크고 초롱초롱하던지... 라면을 다 먹을때 쯤 국물에서 벌레 한마리가 나온건 그냥 눈감아 주기로 했다.

오르차의 대표적인 관광지, 쉬시마할


 오르차를 대표하는 관광지는 쉬시마할, 람 라자 만디르와 같은 옛 궁전들이다. 마을의 거리들은 작고 볼품없지만 조그만 개천 하나만 건너면 이렇게 웅장한 유적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광활한 대 자연속에서 순간순간 마주치는 이런 유적지들의 강한 인상이야말로 오르차의 매력이자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기도 하다. 입장료를 내면 내부에도 들어가볼 수 있지만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지루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보다는 주위를 걸으며 장소의 느낌 그 자체를 느끼고 싶었다.





풍경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유적들 사이로 유유자적 산책을 즐겨본다.


 다리를 건너 쉬시마할 정문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걸으면 유적지들을 끼고 여유롭게 걸어볼 수 있다. 다만 워낙 사람도 적고 조그만 도시다보니 시가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가이드북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관광객들 중에서는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안좋은 일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숲속을 따라 걷는 기분은 너무 좋다.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멀리 보이는 성채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릭샤들의 경적소리와 시끄러운 말소리로 정신없는 대도시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인도의 진정한 매력이다. 오르차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강을 따라 걸었다.





쉬시마할을 지나 숲속으로 가는 길.


  한 시간정도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쉬시마할 근처의 유적지를 거의 다 둘러봤다. 흔히 말하는 관광으로서의 오르차는 이것으로 끝인셈이다. 하지만 인도여행의 본질은 유적지를 탐방하고 박물관에 들어가보는 그런 것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다. 사람사는 풍경, 이야기, 느낌, 생각, 여유. 한국에서는 사는데 바빠 잠시 잊었던 이런것들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여행이고 풍경이 된다. 인도는 그런 곳이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먹구름에 미처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거의 숲의 끝자락에 다달았을 무렵, 저 멀리서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먹구름이 몰려온다. 어찌나 순식간에 하늘이 바뀌던지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소나기가 시원스럽게 내리기 시작한다.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비가와도 우산을 쓰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비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우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서둘러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쉬시마할로 돌아가는데 벌써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렸다. 어디 잠깐 들러서 비를 피해야 할것 같았다.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레스토랑을 찾았다.


 쉬시마할의 일부는 현재 호텔로 쓰이고있다. 유적지를 개조해 호텔로 쓰고있으니 오르차에서 가장 고급 숙소인건 당연한 일. 일반적인 게스트하우스가 100~300루피(3000원~10000원) 정도면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데 반해 마운트 아부에서 묵었던 호텔이 2000루피(6만원)였던걸 생각하면 이곳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게 뻔하다. 흔히 유적지는 그대로 보존하고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놓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호텔로 사용하는 쉬시마할은 참 신기한 케이스다. 때문에 하룻밤쯤 머무르며 좀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아쉬운대로 레스토랑만 들어가볼 수 있었다. 마침 비가 멈추지 않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 터라 간단한 맥주와 요리를 시켜놓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인도를 대표하는 맥주, 킹피셔 한잔!


 킹피셔 한병과 닭요리를 주문했다. 흔히 인도의 닭요리하면 탄두리 치킨을 떠올리지만 오늘은 특별히 다른 요리에 도전했다. 살짝 매콤 간장소스 같은데 닭을 볶은 요리인데 우리나라에서 먹는 깐풍기와 그 맛이 비슷했다. 처음부터 오르차에는 잘먹고 잘 쉬면서 여유를 찾을 생각으로 왔기에 이런 시간들이 나쁘지 않다. 시원한 맥주를 한잔 씩 하면서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본다.

인도여행은 한마디로 파리와의 전쟁이다.


 사진속에 보이는 까만 점들은 먼지나 음식 부스러기가 아니다. 놀라지마시라... 파리다 파리! 인도를 여행하면서도 이놈의 나라가 참 신기한게 아무리 고급 호텔이나 관광지를 들어가도 파리가 없는걸 본적이 없다. 쉬시마할 레스토랑 역시 나름 웨이터가 유니폼을 입고 서빙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곳이지만 어찌나 먹는동안 파리들이 달려들던지 파리를 쫒느라 왼 손이 쉴 틈이 없다. 우리가 하도 식사에 집중을 못하자 보다못한 웨이터가 다가온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주길 내심 기대했지만 결국 웨이터가 해준일은 우리 대신 옆에서 손으로 파리를 쫒아주는 일. 고급스런 유니폼을 입고 파리를 쫒는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다시 웃음이 터진다.


게스트하우스로 다시 돌아가는 길. 오늘 하루는 걷고 또 걷는게 전부다.


 맥주를 다 비워갈 무렵, 비가 다시 그쳤다. 또 소나기가 내리기전에 서둘러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오르차에는 종교와 관련된 축제가 있는 기간이라 사람이 꽤 많은 편이다. 의식을 진행하는 종소리,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여기저기 뒤섞이며 점점 왁자지껄해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들이 지저귀는 숲속을 걷고 있었는데 다리 하나 건넜다고 벌써 딴세상이다. 점점 더 오르차가 마음에 든다.



오르차에서 내내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저 의자에 앉아있는게 참 좋았다.


 이른 시간이지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밀린 빨래도 하고 짐정리도 좀 했다. 아그라에서 너무 촉박하게 돌아다녀서인지 간만에 생긴 여유로운 시간이 어색하기까지 하다. '템플 뷰 게스트하우스'는 한국사람들에게 친절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나 아침마다 더벅머리를 하고 '짜이?'하며 차를 건네는 주인장이 매력적이다. 아직 오르차에 온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짜이를 어찌나 많이 주던지 그동안 여행하며 먹은 것보다 더 많이 먹은것 같다. 내가 짜이를 하도 잘마시니깐 주인장이 눈만 맞아도 '짜이?'하며 잔을 건넨다.

갑작스레 개설된 힌디어 초급 강좌! 그렇게 오르차의 밤은 저물어간다.


 빨래도 다 끝났고 짐정리도 다시 깔끔하게 마쳤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 게스트하우스 중정에 앉아있는데 주인장 어머님께서 나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신다. 인도의 나이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머님 역시 영어를 한마디도 하시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힌디어를 하는것도 아니니 순식간에 바디랭귀지와 함께 팔다리가 바빠지는 대화의 장이 열렸다. 그래도 명색이 인도를 여행하는 여행자인데 힌디어 한두마디는 해야할것 같아 이참에 배워보기로 했다. 한 시간 넘도록 그렇게 손짓발짓 해가며 힌디어를 배운 결과... 결국 '나마스떼'가 전부였다. 힌디어는 정말 너무 어려운 언어다. 서로 말은 안통해도 함께 웃고 떠드는 이 시간. 오르차에서 맞는 두번째 밤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인도의 삶 속으로 흠뻑 젖어든 느낌... 그때까지만 해도 오르차에서 이렇게 하루만 더 머무르고 카주라호로 떠나게 될 줄 알았다. 다음날 아침, 방문앞으로 찾아온 가네쉬를 만나기 전까지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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