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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교통수단이다. 발끝에 힘을 주어 페달을 한 바퀴 돌리면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앞으로 굴러가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슬슬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면 바퀴도 덩달아 느리게 굴러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끼리 흔히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엔진에 비유하곤 한다. 즉, 아무리 비싼 자전거를 탄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건 결국 페달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마치 자전거와 사람은 단순히 주인과 탈것의 관계가 아닌 함께 호흡을 맞추며 힘을 합하여 달리는 한 몸과 같은 존재라는 말처럼 들린다. 함께 호흡하고 교감할 수 있기에 먼 출퇴근길을 혼자 달려도 심심하지가 않다.
나는 이제 막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한 그야말로 초보 라이더다. 어쩐지 다리에 쥐가 나도록 페달을 돌려도 좀처럼 속도가 붙는 것 같지도 않고, 한 시간 남짓 걸려서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면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릴 때도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철없는 아이처럼 마냥 즐겁기만 하다. 물론, 겨우 몇 번 타고 다녔다 해서 금세 눈에 띄게 건강해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건 몸의 변화가 아닌 마음의 변화다. 더 이상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출퇴근길이 아니라,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하나의 즐거움으로 느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 큰 축복이다.
집에서 학교 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아무리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도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 이 지옥 같은 길로 다닌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엔 자전거로 다녀볼 생각은 엄두도 못 냈었다. 얼마나 힘이 들고 지칠지, 차도에서는 또 얼마나 위험할지, 오르막이 생각보다 심한 건 아닐지 하는 걱정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이번 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준비 하면서부터였다. 제주도에 가면 적어도 하루에 50km 씩은 자전거를 타야 한다는데, 매일 의자에 앉아있기만 하는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걱정스런 마음에 주말마다 조금씩 자전거를 타다가, 우연히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자전거 도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자전거의 아름다운 동거는 시작되었다.
8시 00분 화곡동 집에서 출발
예전 같으면 벌써 허겁지겁 세수를 하고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정신없이 뛰어 나왔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뉴스도 좀 보고 신문도 읽으면서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마친 후 출근 채비를 마친다. 대중교통으로는 한 시간 반 넘게 걸리던 출근길이 자전거로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질 않는다. 덕분에 모처럼 달콤한 아침잠도 더 즐기고,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머리에는 빨간 헬멧을 꾹 눌러쓰고, 가방에 갈아입을 티셔츠 하나 달랑 챙겨 집을 나섰다. 자전거는 맨몸으로 속도를 내는 운동인 만큼,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항상 헬멧과 장갑을 착용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8시 10분 염강 나들목으로 한강 진입
염강 나들목은 집에서 한강 자전거 도로로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다행히 집에서 나들목 까지 인도를 따라 자전거 도로가 놓여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유명무실한 시늉에 불과하다. 도로 위의 불청객들을 피해 자전거 도로와 인도를 오가며 달리니 엉덩이가 다 욱신거린다. 이럴 때면 자전거 도로를 떡하니 가로막고 선 자동차들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들목을 빠져나와 한강 자전거 도로에 들어서면, 눈앞에는 안개가 자욱한 한강의 아침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8시 15분 안양천 합수부 도착, 안양천 진입
여느 때 같았으면 한참 동안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이제 막 탑승했을 시간. 하지만 쌩쌩 잘도 달려서 어느새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양화교 아래를 지났다. 이른 아침에도 한강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참 많다. 가끔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휘날리며 자전거로 출근길에 나선 반가운 사람들도 스쳐 지나간다.
8시 19분 신정교, 도림천 합수지점 도착, 도림천 진입
안양천을 따라 계속해서 목동교, 오목교를 지나 신정교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자전거 도로 위로 지하철 2호선이 함께 달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다. 무슨 콩나물시루 마냥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다녔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지금처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쌩쌩 달리는 기분이 얼마나 상쾌하고 통쾌하던지. 가끔 심심하면 신도림 역에서 나오는 지하철을 기다렸다가 누가 더 빠른지 경주하는 장난을 쳐보기도 한다.
8시 34분 구로 디지털 단지역 통과
어느덧 함께 도로 위를 달리던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평지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달렸지만 관악산이 가까워지면서 슬슬 오르막이 시작된다. 핸들을 꽉 움켜쥐고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아본다.
8시 43분 신림역 통과
신대방역을 지나면서부터는 도로 위를 아무리 둘러 봐도 자전거를 탄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신림역에서 관악산까지 도림천 상류에는 최근 들어서야 자전거 도로가 생겼다. 덕분에 안양천이나 도림천에 비해 도로 상태가 깨끗하고 좋은 편이다. 또, 자전거 도로 주변으로는 생태 하천 복원 공사가 한창이어서 하루가 다르게 풀과 나무들도 많아지는 중이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진한 풀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8시 50분 도림천 아래에서 길을 잃다
페달을 돌릴 때 마다 관악산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도림천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자전거 도로의 폭도 좁아지고, 높이도 낮아진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이대로 달리면 관악산 입구에서 도로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끝까지 달려왔는데 그 끝이 막혀 있는 게 아닌가. 졸지에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알고 보니 도림천 아래에서 도로로 빠져 나오는 계단은 미림여고 사거리(동방 1교)가 마지막이었다. 하천 복원 공사가 끝나면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놓아주면 좋을 것 같다. 혹시라도 나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다.
8시 55분 서울대 도착
집에서부터 계속 자전거 도로가 이어지는 최적의 코스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2km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차도를 따라 달려야만 한다. 출근 시간이라 버스와 자가용이 뒤엉켜 도로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도 차들의 흐름에 맞춰 가며 신호를 따라 달리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집을 출발한지 55분 만에, 드디어 서울대 정문을 통과했다. 오늘도 무사히 자전거 출근을 성공이다. 시원하게 세수도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인사 하며 힘차게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해본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지치고 힘든 평범한 아침이겠지만, 신나게 바람을 가르며 기분 좋게 달려온 나에게는 기운 넘치고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다. ‘좋은 아침 입니다!'
어느덧 하루 일과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퇴근이 기다려지긴 하지만 얼른 집에 가고 싶어서 보다는 빨리 또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에서 인 것 같다. 심지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버리는 금요일 저녁에도,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퇴근길을 달릴 생각만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다.
퇴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가장 짜릿한 순간은 다름 아닌 한강 위로 저물어가는 멋 드러진 석양을 마주했을 때. 예쁜 오렌지 빛으로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태양을 마주하면서 오늘 하루 안 좋았던 기억은 모두 잊고 좋은 생각만 가득 가슴에 담아 하루를 마무리 해 본다.
어느새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출퇴근 시간에는 그나마 시원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 되면 더 힘들어 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땀은 좀 흘리더라도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매일 같이 온몸으로 느끼는 짜릿함은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자칫 지루하게 반복될 뻔 했던 나의 일상은 어느새 자전거와 더불어 즐거움과 웃음이 가득한 삶으로 변해 있었다. ‘자전거야 고맙다, 덕분에 오늘도 내가 웃는다!’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지, '우리문화' 7월호에 실린 글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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