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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것만큼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달래던 추억이 서린 레스토랑,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비를 쫄딱 맞으며 종종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던 거리, 에어컨이 고장난 방 안에서 밤새도록 폭염과 씨름했던 민박집. 여행을 마치고 우리에게 남는건, 꼭 사진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만은 아닌것 같다. 그렇게 가슴속 어딘가 차곡차곡 쌓여있던 기억들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다시 음미하고 추억해볼 수 있는건, 두 번째 여행에서만이 누려볼 수 있는 마치 특권과도 같은것은 아닐까.

 처음 소매물도를 찾았던건 2008년 여름. 대학생이 되고 첫 배낭여행지로 유럽을 다녀온 나는, 그당시 어딘가 모를 묘한 괴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명색이 건축과 학생이 되어가지고는 아직 우리나라도 제대로 모르고 무작정 해외부터 다녀왔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같은 과 동기들과 함께 무작정 남도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많은 기억과 추억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곳은 단연 소매물도였다. 그당시 소매물도를 떠나면서 언젠간 꼭 다시 찾아오겠노라 다짐했었는데, 그 기회라는게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찾아와 버렸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많은게 변해있는 내 모습. 소매물도는 과연 어떻게 변해있었을까.


두번째 소매물도, 나만의 색을 찾아 떠나는 여행


 어쩜 하늘마저 그렇게 똑같았을까. 2년 전에는 통영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소매물도, 이번엔 거제 저구항에서 출발하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목적도, 함께하는 사람들도 그때와는 전혀 달랐지만, 푸른 빛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하늘은 2년전의 그 걱정스런 마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는 다행히도 소매물도에 거의 도착할 무렵부터 구름이 조금씩 걷혔지만, 이번엔 아무도 날씨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사진찍으러 이 먼 남해까지 왔는데 섬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부터 날씨가 말썽이다.



 손가락으로 건물을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2년만에 찾은 소매물도의 풍경은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사람이 많아졌다. 그때만 해도 한 배에 열댓명 정도 내려서 하루 묵어가고 그랬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200명 정원의 배가 한 시간도 채 안되는 간격으로 연거푸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때는 공사중이던 팬션도 벌써 한창 영업중이고, 부두 근처에는 처음 보는 가짜 등대모양 식당까지 생겨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건 2년 전에 묵었던 허름한 단칸방 민박집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 두분이 손수 지어주시던 쌀밥이 참 맛있었던 그런 곳이었는데, 돌담에 빨래가 여전히 널려 있는걸 보니 오늘도 누군가 거기서 또 묵어가는 모양이다.




 꼭 변한게 소매물도의 풍경만은 아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때만 해도 나에게 사진이란 그저 오래된 수동 필름카메라로 몇 장 찍어두고, 인화한 결과물 앞에서 혼자 웃고 즐기던 그런 소소한 취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진을 판매하기도 하고, 나름 리뷰도 쓰고 컨텐츠도 만드는 어엿한 DSLR 유저가 되어 있었다. 지난번 소매물도에서는 그저 눈으로 즐기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게 목적이었지만 이번엔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에 다시 찾은 셈이다. 




 필름 카메라에서 DSLR로 카메라는 바뀌었지만, 펜탁스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지만, 펜탁스라는 회사는 본래 디지털 사진에서 색감을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연구하는 회사다. 덕분에 바디에 익숙해지면, 포토샵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히 바디 내에서 원하는 색감을 찾기가 더욱 쉽다. 게다가 나처럼 RAW는 나몰라라, 주구장창 JPG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펜탁스의 다양하고 풍성한 색감이 더욱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이번 소매물도 여행은, 내가 원하는 색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빛,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느낌, 시선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진에 담아낼 수 있을지 즐겁게 고민해 보는 시간들. 나는 프로 작가도 아닐뿐더러, 스스로 사진이 취미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워하는 그야말로 진짜 '취미' 사진가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라는 말처럼, 너무 진지하게 답을 찾기 보다는 매 순간마다 설정을 바꿔보고, 찍어보면서 소매물도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다!




망태봉에서 블리치 바이패스를 만나다


 망태봉은 소매물도 등대섬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그리 크지 않은 섬이지만 이상하게도 지난 여행에서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곳이기도 했다. 등대섬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백여 미터만 산을 더 오르면 망태봉 정상에 도착한다.

 첫날 소매물도의 하늘은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해서 흐릿했다. 으레 정상에 오르면 360도 파노라마도 찍어보고 멀리 바다도 담아야 하는게 당연한데 그러기엔 너무 침울한 날씨였다. 게다가 망태봉 정상에는 괴담 속에서나 나올법한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무슨 관측소라고는 하는데,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귀신의 집이다. 뷰파인더로 눈을 가져다 대고는 '블리치 바이패스'로 바디 색감을 설정했다.

 
 '블리치 바이패스'는 K-r의 출시와 함께 새롭게 선보인 펜탁스만의 색감 모드다. 한글로 번역하면 '은잔재, 은 남기기'정도 되는 이 색감은 본래 필름을 약품처리하는 과정에서 필름면에 은염을 남겨 독특한 색채를 얻어내는 기법이라고 한다. 어려운 이름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영화나 광고등의 영상을 통해서 이 색감을 익숙하게 접하고 있다. 영화중에는 대표적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화산고]같은 작품이 바로 이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으로 영상을 처리하고 있다.





 망태봉 정상에 있는 폐건물에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공포영화 세트장이 따로 없었다. 맨 눈으로 봐도 꽤 으시시한데 블리치 바이패스로 찍어놓으니 그 느낌이 한층 더 하다. '블리치 바이패스'의 상세 설정에서는 전체적인 색조를 정할 수 있는데, 푸른색이나 청록색 계열로 설정하면 위와같은 분위기의 사진을 후보정 하지 않고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소매물도에 와서 이런 사진을 찍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래도 마음에 드는 색감을 찾은 덕분에 그럴싸한 사진을 몇 장 건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 하늘은 영 맑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대로 저녁 노을은 포기해야 하는걸까?


미야비모드로 담아본 소매물도의 노을




 걱정도 잠시, 망태봉을 내려와 팬션에 다다르니 저 바다멀리 조금씩 노을이 물들어가는게 보인다. 오후 내내 흐리던 하늘이 이제서야 서서히 발그레해지는걸 보니 축 쳐져있던 마음이 다시 흥분되기 시작한다. 이번엔 어떤 색감으로 담을까 고민하던 끝에 '미야비' 모드를 택했다. 한글로는 '강렬색감'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우아함' 정도로 보는게 맞겠다. 가장 펜탁스 다운 색감이라고 생각하여 평상시에도 주력으로 쓰고 있으며, 특징이라면 붉은색과 파란색 계열이 더 강조되어 진득하게 나온다는 점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붉은 노을이 진다면 그야말로 '미야비'모드가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후보정이 따로 필요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그대로였다. 작은 부두 너머로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보며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미야비' 모드의 멋진 색감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과장 없이 사진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


 이 한장의 사진만으로도 두 번쨰 소매물도 여행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남해의 작고 아름다운 섬, 소매물도. 비록 지금은 상업화되고 개발되어 섬 본연의 아름다움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소매물도의 푸른 바다빛은 리버설 필름으로


 멋진 노을을 배경으로 고기와 술,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소매물도에서의 아름다운 밤이 지나고... 이튿날, 꾸물댈 틈도 없이 이른 시간부터 배를 타고 등대섬에 가기로 했다. 남해의 바다빛은 그윽하고 깊은 푸른 빛이다. 마침 하늘도 맑아진터라 오늘은 '리버설 필름'모드로 사진을 담아보기로 했다.


 '리버설 필름' 모드는 펜탁스 645D의 출시와 함께 처음 선보인 색감으로, 어떻게 보면 펜탁스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색감일지도 모르겠다. 슬라이드 필름을 환등기에 비추어 보는듯한 진득하면서도 맑은 색감이 '리버설 필름'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여러가지 파라메터를 만져서 나만의 독특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색감들과는 달리, '리버설 필름'의 파라메터는 오직 '샤프니스' 한가지 뿐이다. 유저들에게 당당하게 '이 색감은 있는 그대로 즐기시오'하고 말하는 듯한 펜탁스만의 고집이 한껏 느껴진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건지도 모르겠다.




 
 설계자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간에, '리버설 필름' 모드에서는 푸른색과 녹색계열이 더욱 생기있어지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풍경사진에서는 더욱 진득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만들 수 있어서 잘 어울린다. 다만 슬라이드 필름 특유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컨트라스트가 강해지는 덕분에 암부 계조가 상당히 죽어버린다. 그래도 사진 한장 한장에서 '나는 펜탁스요'하고 외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등대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만 알았지, 그 뒤에 숨겨진 이렇게 아름다운 기암 괴석은 미처 몰랐었다. 행여 날이 좋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었더라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소매물도의 숨겨진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갯바위에서 낚시하시는 분들이 어찌나 부러워 보이던지...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꼭 한번 저 자리에서 낚시를 해보고 싶었다.



토이카메라와 바람의 언덕


 그렇게 소매물도를 다시 빠져나와 외도를 한바퀴 둘러보고는, 마지막 여행지인 거제도 '바람의 언덕' 앞에 도착했다. 겨우 1박 2일짜리 여행이었지만 무려 배를 다섯번이나 탄 셈이다. 배에 있는 시간동안은 대부분 찍은 사진들을 리뷰하면서 이리저리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는데,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내 카메라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다름아닌 바디내 필터를 자주 쓰게 되었다는 점!



 펜탁스 디지털 바디에서는 다양한 색감 뿐 아니라, 바디 내에서 사진에 여러가지 효과를 입힐 수 있는 '바디내 필터'를 제공하고 있다. 늘 사진은 컴퓨터에서 보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그랬는지, 한번도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여러가지 필터 중에서도 '바람의 언덕'에 잘 어울리는건 '토이카메라모드'였다. 단순히 비네팅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토이 카메라 특유의 어딘가 밸런스가 무너진듯한 색감을 재현할 수 있는 팔레트를 선택할 수 있었다. 사실 '바람의 언덕'이라는 곳이 그 이름만큼 멋진 곳은 아니라서 생각보다 밋밋한 풍경이었는데 토이카메라 모드를 써보니 어딘가 모르게 색다른 느낌이 든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미니어쳐' 모드로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모습도 담아보았다. 새삼 내 카메라에 대해서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짧은 1박 2일간의 사진여행은 여정을 마쳤다.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느낀건 사진을 목적으로 하여 어딘가에 찾아간다는건 정말 보통 열정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과, 그게 생각보다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나만의 색감을 찾아, 또 나만의 느낌을 찾아 어딘가로 떠나는 사진여행은 그래서 늘 설렘을 동반하는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소매물도 여행은 많은 생각과 추억들을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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