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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에 온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그 긴 시간동안 '여행'이라곤 고작 세 번, 그것도 하루 당일치기로 다녀온게 전부다. 뭔가 이상하다! 교환학생을 오기 전 들었던 얘기들이랑 많이 다르다. 스페인으로 인턴을 하러 왔던 과 선배도 매주 여행다니느라 바빴다고 했고,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아는 형도 거의 매 주마다 유럽 전역을 쏘다녔다고 자랑처럼 얘기하곤 했었다. 그런데 왜 난 아직 그렇게 여행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 고민의 정답을 찾게해준 여행이 바로 '똘레도(Toledo)'였다. 2007년 유럽 배낭여행이후 처음으로 다시 하는 유럽 여행이자, 교환학생으로 마드리드에 와서 처음으로 떠난 짧은 여행. 여러모로 의미깊었던 똘레도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깨닫고,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똘레도로 가는 버스표는 이렇게 생겼다
똘레도는 옛 스페인의 수도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다 돌아볼 정도로 작은 마을인데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고작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마드리드에 머무르며 당일치기로 둘러볼 수 있는 예쁜마을로 잘 알려진 똘레도, 9월의 끝자락에서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똘레도행을 택했다.
똘레도로 가는 버스는 엘립띠까 광장(Plaza Elíptica)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집에서 지하철 6호선으로 한번에 갈 수 있는 위치라 느즈막히 10시쯤 일어나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는 똘레도행 티켓만 끊어주는 전용 창구가 따로 있다. 가격은 편도 4.93유로. 가까운 거리임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그리 싼 가격은 아니다.
똘레도로 가는 버스는 늘 관광객들의 차지다
그러고보니 이날은 내가 마드리드 밖으로 처음 나가보는 날이기도 했다. 과연 유명한 관광지 답게 똘레도 행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관광객들에게는 마드리드 보다 오히려 똘레도가 유명하다고 했다. 마드리드는 유럽의 도시치고는 너무 '수도'의 느낌이 강해 볼게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드리드에 '거주'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말은 좀 틀린것 같다. 어쨋거나 오늘은 마드리드 시민이 아닌 관광객이 된 기분으로 하루종일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왜 일본어만 있는거야... 근데 똘레도에 일본인 관광객이 많긴 하더라
한 시간 반정도 걸릴줄 알았는데 거의 50여 분 만에 똘레도에 도착해 버렸다. 버스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부시시하게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밖으로 나가니 저 멀리 불룩하게 솟아있는 똘레도 성곽이 보인다.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할때는 이렇게 성곽 안에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들이 참 인상깊었는데 그때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 표지판이 이뻐서 그냥 한 장
버스 터미널에서는 한 15분 정도 걸어야 '진짜' 똘레도(구시가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날따라 날씨가 유난히 더웠던 것도 있지만 이때부터 '여행'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마드리드에서 매일 같이 학교다니고, 빨래하고, 밥해먹고 살면서 상대적으로 깊숙히 '마드리드'라는 도시를 느끼고, 유랑했던것과 달리, 손에는 두꺼운 론니 플래닛 한권 들고 어벙벙한 표정으로 길 한복판을 헤메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우스웠다.
사실 이런게 있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오르막을 올랐다
성곽도시 답게 들어가는 입구부터는 한참동안 오르막이 계속된다. 소코 트랜이라고 불리는 미니 열차를 탈 수도 있지만, 아직 20대 초반인 내가 저걸 타고 올라가기엔 좀 그래서 튼실한 두 다리로 열심히 걸어 올라갔다.
파노라마를 찍고 싶어지는 도시, 똘레도
똘레도. 명성 만큼이라 참 예쁜 도시다. 독일의 로텐부르크 처럼 빨간 지붕도 아니고, 한국의 경주 처럼 이색적인 풍경이 있는 마을도 아니다. 하지만 오래된 옛 수도의 성곽을 중심으로 옹기종이 모여있는 마을들은 관광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노무 맥도날드는 전세계 어딜 가도 따라다닌다
똘레도처럼 유럽의 작은 도시들은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모든 여행이 시작된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광장을 빼고는 현지인들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을 정도. 사실 개인적으로 관광객이 너무 많은 도시는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나도 한낱 관광객에 불과하긴 하지만...
사람없고 조용해서 작품 감상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박물관
아무리 관광객이고 싶지 않아도 똘레도에서 난 한 명의 관광객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론니 플래닛을 펼치고 '추천 관광 코스'를 따라서 돌아보기로 했다. 일단 중요한 몇군데를 둘러본 다음에 편안한 마음으로 골목길을 걸어다닐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중앙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산타 크루즈 박물관. 박물관 자체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인 '엘 그레꼬'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에 유럽 여행 하면서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그리 흥미롭게 본건 아니었지만(미술쪽으로 지식이나 취향이 거의 없기에) 관광의 첫 코스다보니 열심히 둘러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의외로 '엘 그레꼬'의 그림들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날따라 햇살이 참 강했다
박물관을 나와서 서쪽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똘레도는 비록 크기는 작아도 성채 안은 워낙 구시가지다 보니 길이 상당히 복잡하다. 설상가상으로 오르막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식이라... 뜨거운 스페인의 햇살 아래 순식간에 체력이 고갈되어 버렸다.
알까사르. 옥상에 올라가 봤으면 좋았을텐데...
론니 플래닛의 '추천 도보 코스'에 의하면 산타 크루즈 박물관 다음은 알까사르(alcazar)다. 옛 요새, 혹은 성채 정도로 생각하면되는데 스페인의 왠만한 옛 도시에는 이 알까사르가 있다. 지금은 전쟁 박물관 비슷하게 쓰이고 있는데 너무 현대화 된 박물관이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난 확실히 도시보다는 자연에서 더 큰 감동을 얻는 편인가보다
알까사르 건물 보다 나의 흥미를 더 끌었던건 알까사르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 마드리드 주변은 희한하게 버려진 땅이 꽤 많다. 여기서 버려진 땅이라는건 특별히 경작을 하거나 건물이 세워지지 않은 채 그냥 있는 그대로 남겨진 땅을 말한다. 똘레도 도시 자체는 상당히 오밀조밀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멀리 지평선이 펼쳐지는 한가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구불구불한 똘레도 골목길을 걸을 때 보다 기분이 훨씬 더 좋아 한참을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교과서적인 유럽의 성당, 까떼드랄. 입장료는 무려 7유로!
알까사르를 나오면 이제 까떼드랄(catedral)이다. 까떼드랄은 각 도시에 있는 대성당을 의미한다. 까떼드랄 앞에 서니 문득 2007년 유럽여행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 초반에만 해도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며 '성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진저리를 첬던 내모습이 떠올랐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나름 '서양건축사'시간에 유럽 성당의 평면이나 역사를 세세하게 공부했던 내가 이럴정도면... 다른 관광객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내부보다는 외부가 훨씬 더 웅장하고 멋지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까떼드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똘레도 도시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큰 성당이다. 특별히 외형적으로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거나 한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들어가보는 유럽의 성당이라 옛 기억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구석구석 열심히 보고 다녔다. 까떼드랄 안에서도 '엘 그레꼬'의 그림을 여러점 만날 수 있다.
유난히 마음에 안들었던 점심식사
사실 똘레도 여행이 꼭 그렇게 별로인것만은 아니었다. 원래 골목길도 좋아하고, 이렇게 오래된 성곽마을의 매력도 즐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분을 다운시킨건 점심식사였다. 그냥 오늘 하루 '관광객 놀이'를 즐겨보기 위해서 순진하게 론니 플래닛이 추천하는 식당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사실 똘레도가 하도 작아서 식당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늘 먹는 것처럼 오늘의 메뉴(menu del dia)를 시켰는데 론니 플래닛이 추천하는 것 치고는 너무 형편 없었다. 사진은 나름 그럴싸해 보이지만 마드리드에서 매일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직접 해먹는 내 눈에는... 형편 없었다. 가격도 그닥 싼 편도 아니다. 마드리드에 살면서 꽤 많은 레스토랑을 가봤지만 이 가격에 이정도 음식이면 내 기준에는 탈락이다. 후식으로 '커피 드릴까요?'라고 물어보길래 한 잔 마셨는데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따로 청구되어 있었다. 관광지 식당들의 횡포는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매한가지인가보다. 이날 식당을 나오며 다시는 론니 플래닛이 추천하는 식당은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똘레도 구시가지 한복판에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기분!
형편없는 식당에서 언짢은 식사를 하고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두 달 가까이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으로 마드리드에서 살았는데 갑작스레 '관광객' 대접을 받아 영 기분이 그저그랬다. 이런 내 기분을 다시 바꿔준건 한 성당이었다. 이름은 잘 기억 안나지만 탑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흔쾌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원래 늘 여행하면서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곳에 올라가 보는 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까떼드랄은 첨탑에 올라갈 수 없어서 실망하던 차였는데 작은 성당이지만 여긴 첨탑이 꽤 높았다. 점심을 조금 일찍 먹고와서 그런지 한동안 첨탑에 올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높은 곳에서 똘레도를 한눈에 바라보며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똘레도에서 가장 기분좋은 포인트였다.
형광펜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골목길을 색칠해봤다. 복잡해!
첨탑에서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남은 여행코스를 재정비했다. 식당 가지고 론니 플래닛에 한번 낚이고 나니 더이상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길을 따라 내맘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똘레도가 길이 복잡하기는 해도 하도 작다보니 내맘대로 걸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을것 같았다.
다른건 몰라도 똘레도의 골목길 하나는 정말 예쁘더라
그렇게 똘레도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헤집고 다녔다. 처음엔 지도를 보고 다니다가 나중엔 가방에 그냥 넣어버렸다. 목적지도 없는데 지도는 봐서 무엇하랴. 역시나 똘레도의 매력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들이다. 까떼드랄도 좋고 알까사르도 좋지만 제일 좋은건 그냥 골목길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파란 하늘을 보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일이다.
이때부터는 '관광객'이라기보단 '도보 여행자'였다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꽤 많은 '관광지'들을 지나쳤다. 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엘 그레꼬 미술관'이 조금 끌리긴 했지만 그냥 더 걷고 싶어서 지나쳐 버렸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오는 길...
다시 버스 터미널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똘레도 여행은 나에게 '걷기' 그 자체였다. 글쎄. 잘 모르겠다. 전에 유럽여행할때만 해도 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입장료를 내가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 집이 한국이 아닌 마드리드인 이상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상황이 다르니 느낌도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모든 관광 포인트들을 '반드시' 둘러봐야 할 의무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꽤 많은 포인트들을 그냥 지나쳐버린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덕분에 '여행'에 임하는 관점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여기에 오려면 돈이 많이들고 힘들기에' 의무감 같은걸 가지고 둘러보는 일은 이제 없을 것 같다. 대신 '정말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즐기는' 방법을 깨달은것 같았다. 조금은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이라는 곳에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느낌이라 한편으로는 똘레도에게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룻동안의 짧은 똘레도 여행은 끝이 났다. 흔히 사람들이 똘레도를 보고 하는 감상처럼 '예뻐요!'. '좋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게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느낌,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도시, 그게 바로 똘레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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