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민에 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제주에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4박5일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제주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찍은 소중한 사진들과 함께 본격적인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 리뷰를 시작해보려 한다. 사실 지난번에 올렸던 프리뷰(http://ramzy.tistory.com/199)에서 생각보다 꽤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바람에 정작 본편에서는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어쨌거나, 렌즈는 사진을 찍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말을 많이 늘어놓아도 그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더욱 생생할 수 있지 않을까. 소소한 사진들을 함께 감상하면서 제주에서 자이스와 함께했던 나의 기억들을 살포시 즈려 밟으며 걸어보시길...
조금은 무겁고, 또 조금은 불편한 렌즈
애시당초 제주에는 DSLR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짐이 조금만 무거워져도 그 피로가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지게 된다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평소 타던 로드차를 대신해서 작은 바퀴의 미니벨로를 선택했었다. 더 느긋하게 달리며 풍경을 음미하고픈 생각에서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짐때문에 고생 깨나 했었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620g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와, 80mm가 넘는 대 구경을 가진 조금 특이한 녀석이다. 자동렌즈도 아닌게 이토록 부담스럽게 생겨먹었으니 당연히 자전거에 싣고 다닐 엄두도 못낼 수 밖에. 뿐만 아니라, 가격은 더욱 부담스럽다. 혹시나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내 몸보다 렌즈가 무사한지 먼저 떠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출발 전날 쓸데없는 고민으로 밤을 지샜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물론, 손에는 자이스가 물린 카메라를 들고서.
제주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렌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소감부터 말하자면, 정말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혹시라도 안챙겨갔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 내가 제주를 찾았던 8월 첫주는 말 그대로 구름 한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하도 빛이 강해서 조리개를 16에 두고도 셔터스피드가 꽤 나왔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는 땀을 좀 흘렸지만 사진을 찍기에 너무나 좋은, 그야말로 행운의 날씨를 만난 셈이다.
지난번 프리뷰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내가 렌즈의 광학적 성능이나 수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지금도 그런 숫자놀음 보다는 뷰파인더를 통해 느껴지는 느낌과 결과물에 담겨있는 사진의 힘을 더 믿는 한 사람이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렌즈였다. 광활한 풍경 속에서 원하는 장면을 크롭해내는 21mm의 적절한 화각, 중앙부터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화면에서 고르게 느껴지는 선명한 공간감, 강한 태양 아래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 제주에서 담아온 사진에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임에 분명했다.
사진가가 실수를 해도, 렌즈는 실수하지 않는다
여행 이틀째, 마라도에서 배를 타고 나와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를 꺼내 보았다. 전면 LCD에는 조리개값이 'F ---'이렇게 표시되어있었다. 무슨말인고 하니,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조리개 우선 모드가 지원되는 렌즈임에도 불구하고 조리개링을 A에 놓치 않고 그냥 찍었던 거다.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아직 이틀째긴 하지만, 그 많은 사진들을 조리개 2.8에 놓고 찍었다는 뜻이니... 수동렌즈를 오랜만에 써봐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전거를 타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을까. 하지만 이미 사진은 다 찍었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LCD를 켜서 사진들을 다시 살펴보니 정말 조리개가 전부 2.8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진이 소프트하거나 선예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분명 최대개방으로 찍었음에도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의 디테일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다소 멍청한 실수를 하긴 했지만, 덕분에 ZEISS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진 기분이 든다. 사진가가 실수를 해도, 렌즈는 실수하지 않았다.
펜탁스와 자이스의 이종교배
내가 펜탁스를 고집하고, 펜탁스만 사용하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풍경'에 대한 철학 때문이다. 최근 발매된 펜탁스의 중형 카메라 645D는 과감히 로우패스 필터를 제거하고 출시되었다. 그때 담당자의 말이 참으로 인상 깊었는데, '펜탁스 카메라는 스튜디오에서 모델을 찍거나 하기 위해 설계된게 아니다. 필드에서 풍경과 자연을 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로우패스 필터를 제거하고 해상력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펜탁스 유저로써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또한, 지난번 프리뷰를 쓸때만 해도 커스텀 이미지의 '리버설 필름 모드'는 645D에만 있었는데 이번 1.03 펌웨어를 통해서 K-7에도 적용이 되었다. 오랜 바람이 실현된 것이다. 이 또한 펜탁스의 풍경에 대한 집착, 집념과 철학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자이스 렌즈 리뷰를 쓰다가 갑자기 펜탁스 철학 얘기는 왜 꺼낸걸까. 사실 이렇게 풍경과 자연을 강조하는 펜탁스지만 실제 필드에서 쓸만한 렌즈군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수동 렌즈군은 몰라도 자동렌즈에서는 선택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던것 같다. 15리밋과 24스타가 그래도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는 광각렌즈군이지만 딱 잡아서 이거다 할만한 대표급 풍경 렌즈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Carl ZEISS Distagon T* 2.8/21mm의 ZK 마운트 발매는 펜탁스 유저로써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사용해보고나니 어쩌면 펜탁스가 바라는, 펜탁스가 꿈꾸는 풍경에 대한 동경이 여기에 스며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슬쩍 해보게 된다.
경계에 대한 탐구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용눈이오름에 올랐을때의 일이다. 풀들이 다 넘어갈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못들 정도였는데 한 발짝씩 정상에 가까워 질 때 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서울서 태어나 도시생활밖에 못한 촌놈이라 그런지 나는 이런 대자연이 너무나 좋다. 그래서인지 모델을 세워놓고 찍는 인물 사진 보다는 대자연 한 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 더욱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의 사진, 풍경 사진은 결국 경계에 대한 탐구다. 모델의 그날 컨디션, 사진사와 모델의 호흡, 조명 세팅, 의상, 소품, 배경, 스튜디오... 이 모든걸 생각하고 제어해서 만들어내야하는 스튜디오 인물 사진에서 사진사는 지휘자이며, 모든 작업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의 자연을 담는건 조금 상황이 다르다. 사진사는 자신의 존재감을 철저히 숨기고 그저 거대한 스케일의 자연 앞에서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른다.
풍경 사진은 결국 경계를 담는 일이다. 하늘과 구름, 구름과 바다, 바다와 땅, 땅과 나무... 대부분의 사진 위 아래를 크롭한 것도 경계에 더욱 집중하고 싶어서 였다. 뭐라고 딱 잘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와 함께 하는 경계에 대한 탐구는 한장 한장이 너무나 흥미 진진했다. 수동렌즈가 불편해서 걱정이라면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포커스링을 스르르 돌려서 또렷하게 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그 순간, 그 짜릿함은 불편함을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태양과 마주보다
섭지코지에 들렀던 여행 넷째날은 유난히 더 화창했던걸로 기억된다. 조리개를 아무리 조여도 셔터스피드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자전거를 타고 섭지코지를 한바퀴 도는데, 머리위로 햇살이 강하게 내려쬐는게 느껴졌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눌렀다. 태양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찍는건 눈에도 안좋고 카메라에도 안좋다. 특히나 센서에 이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자제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이렇게 태양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을 볼때면 늘 화면 가득 퍼지는 빛 때문에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ZEISS의 렌즈가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뛰어난 광학적 설계도 물론 한몫 했겠지만, T* 코팅의 뛰어난 성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코팅이라고 불리는 T* 코팅은 플레어와 색수차 억제를 극대로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된 사진을 얻을 수 있게 만든다. 좋은 렌즈를 사용한다고 해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건 아니지만, 뛰어난 렌즈는 그만큼 사진사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점이 다르다.
이 사진은 정방폭포 앞에서 친구를 찍어준 사진이다. 역시나 그날도 날이 너무 맑아, 역광에서는 도저히 인물의 얼굴이 잡히질 않았다. 급한대로 내장 플래쉬를 터뜨려 찍었는데 나름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전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렌즈가 토키나 28-80인지라(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그 야생마!) 사실 플레어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한 편이고 오히려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의 역광 플레어 억제능력은 그런 나에게도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억지로 애를 써서 만드려 하지 않는 한 사진에서 플레어를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자이스로 안도 타다오를 담다
안도 타다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일본의 건축가다. 최근 섭지코지에는 그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라는 건물이 들어섰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직접 찾아가보니 정말 너무 좋은 사이트에 자리잡고 있어서 내가 다 셈이 날 정도였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볼때, 솔직히 외부 디자인은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에 대한 프레이밍이나, 조경 설계를 통한 자연스러운 시선의 유도는 그가 왜 거장인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로 주로 풍경을 찍었지만, 사실 건축 사진에도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는 렌즈다. 물론 뷰 카메라 같은 제대로된 장비를 쓰지 않는 이상 왜곡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담백하게 건축물을 담아내는 렌즈는 없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세번째 사진은 바디 내장 HDR 기능으로 찍었는데 손에 들고 찍는 바람에 상이 흔들려 겹쳐버렸다. 못내 아쉬운 사진이다.
건축물은 그 형태가 변하거나 하는 피사체가 아니지만, 수많은 선과 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렌즈의 화각이나 왜곡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실제 설계과정에서는 이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클라이언트를 설득시키기 위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에도 왜곡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ZEISS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가장 비슷한 사진을 만들어낸다. 과장되지 않은 시선은, 좋은 건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제주에서 자이스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
장황하게 풍경 사진과 자이스, 그리고 나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다. 사실 렌즈 리뷰라는게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이 대부분이라 쓰다보면 할말이 두서없이 길어지게 된다. 물론 객관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수치와 그래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아직 제주 여행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안되었지만,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자전거만 죽어라고 탈줄 알았었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아서 상당히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와 함께 하는 시간 만큼은 셔터를 누르는 그 자체가 짜릿함이고 즐거움이었다. 리뷰 본편을 계획하면서 사실은 필름바디에서의 성능과 해상력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 했었는데 막상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와서 제주 사진들로만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실제 풀프레임에서도 주변부까지 변함없는 해상력과 선예도를 보여줬고, 왜곡은 거의 없었다. 분명 가까운 거리에서 광각으로 찍었음에도, 망원렌즈로 당겨 찍어서 크롭한듯한 묘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사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 오랜만에 필름 바디에 21mm 렌즈를 끼워보니 너무 넓어진 화각에 적응을 못해서였다. 이제 펜탁스에서 풀프레임 바디만 나오면 될터인데, 그런날이 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200만원이 넘는 수동렌즈. 비싸다면 비싸지만 또 결코 비싸지 않은 렌즈. 묘한 매력에 끌려 일단 마운트 해보면, 다시 놓아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진정 풍경 사진을 사랑하고, 자연을 동경하는 사람들이라면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언젠가 꼭 한번 사용해봐야 할 렌즈다. 그리고는 어느새 드넓은 벌판 위에서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뭔가에 홀린듯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진정한 사진찍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렇게...
조금은 무겁고, 또 조금은 불편한 렌즈
애시당초 제주에는 DSLR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짐이 조금만 무거워져도 그 피로가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지게 된다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더군다나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평소 타던 로드차를 대신해서 작은 바퀴의 미니벨로를 선택했었다. 더 느긋하게 달리며 풍경을 음미하고픈 생각에서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짐때문에 고생 깨나 했었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620g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와, 80mm가 넘는 대 구경을 가진 조금 특이한 녀석이다. 자동렌즈도 아닌게 이토록 부담스럽게 생겨먹었으니 당연히 자전거에 싣고 다닐 엄두도 못낼 수 밖에. 뿐만 아니라, 가격은 더욱 부담스럽다. 혹시나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내 몸보다 렌즈가 무사한지 먼저 떠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출발 전날 쓸데없는 고민으로 밤을 지샜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물론, 손에는 자이스가 물린 카메라를 들고서.
제주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렌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소감부터 말하자면, 정말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혹시라도 안챙겨갔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 내가 제주를 찾았던 8월 첫주는 말 그대로 구름 한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하도 빛이 강해서 조리개를 16에 두고도 셔터스피드가 꽤 나왔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는 땀을 좀 흘렸지만 사진을 찍기에 너무나 좋은, 그야말로 행운의 날씨를 만난 셈이다.
지난번 프리뷰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내가 렌즈의 광학적 성능이나 수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지금도 그런 숫자놀음 보다는 뷰파인더를 통해 느껴지는 느낌과 결과물에 담겨있는 사진의 힘을 더 믿는 한 사람이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렌즈였다. 광활한 풍경 속에서 원하는 장면을 크롭해내는 21mm의 적절한 화각, 중앙부터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화면에서 고르게 느껴지는 선명한 공간감, 강한 태양 아래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 제주에서 담아온 사진에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임에 분명했다.
사진가가 실수를 해도, 렌즈는 실수하지 않는다
여행 이틀째, 마라도에서 배를 타고 나와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깐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를 꺼내 보았다. 전면 LCD에는 조리개값이 'F ---'이렇게 표시되어있었다. 무슨말인고 하니,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조리개 우선 모드가 지원되는 렌즈임에도 불구하고 조리개링을 A에 놓치 않고 그냥 찍었던 거다.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아직 이틀째긴 하지만, 그 많은 사진들을 조리개 2.8에 놓고 찍었다는 뜻이니... 수동렌즈를 오랜만에 써봐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전거를 타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을까. 하지만 이미 사진은 다 찍었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LCD를 켜서 사진들을 다시 살펴보니 정말 조리개가 전부 2.8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진이 소프트하거나 선예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분명 최대개방으로 찍었음에도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의 디테일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다소 멍청한 실수를 하긴 했지만, 덕분에 ZEISS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진 기분이 든다. 사진가가 실수를 해도, 렌즈는 실수하지 않았다.
펜탁스와 자이스의 이종교배
내가 펜탁스를 고집하고, 펜탁스만 사용하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풍경'에 대한 철학 때문이다. 최근 발매된 펜탁스의 중형 카메라 645D는 과감히 로우패스 필터를 제거하고 출시되었다. 그때 담당자의 말이 참으로 인상 깊었는데, '펜탁스 카메라는 스튜디오에서 모델을 찍거나 하기 위해 설계된게 아니다. 필드에서 풍경과 자연을 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로우패스 필터를 제거하고 해상력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펜탁스 유저로써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또한, 지난번 프리뷰를 쓸때만 해도 커스텀 이미지의 '리버설 필름 모드'는 645D에만 있었는데 이번 1.03 펌웨어를 통해서 K-7에도 적용이 되었다. 오랜 바람이 실현된 것이다. 이 또한 펜탁스의 풍경에 대한 집착, 집념과 철학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자이스 렌즈 리뷰를 쓰다가 갑자기 펜탁스 철학 얘기는 왜 꺼낸걸까. 사실 이렇게 풍경과 자연을 강조하는 펜탁스지만 실제 필드에서 쓸만한 렌즈군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수동 렌즈군은 몰라도 자동렌즈에서는 선택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던것 같다. 15리밋과 24스타가 그래도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는 광각렌즈군이지만 딱 잡아서 이거다 할만한 대표급 풍경 렌즈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Carl ZEISS Distagon T* 2.8/21mm의 ZK 마운트 발매는 펜탁스 유저로써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한달 남짓한 시간동안 사용해보고나니 어쩌면 펜탁스가 바라는, 펜탁스가 꿈꾸는 풍경에 대한 동경이 여기에 스며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슬쩍 해보게 된다.
경계에 대한 탐구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용눈이오름에 올랐을때의 일이다. 풀들이 다 넘어갈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못들 정도였는데 한 발짝씩 정상에 가까워 질 때 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서울서 태어나 도시생활밖에 못한 촌놈이라 그런지 나는 이런 대자연이 너무나 좋다. 그래서인지 모델을 세워놓고 찍는 인물 사진 보다는 대자연 한 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 더욱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의 사진, 풍경 사진은 결국 경계에 대한 탐구다. 모델의 그날 컨디션, 사진사와 모델의 호흡, 조명 세팅, 의상, 소품, 배경, 스튜디오... 이 모든걸 생각하고 제어해서 만들어내야하는 스튜디오 인물 사진에서 사진사는 지휘자이며, 모든 작업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의 자연을 담는건 조금 상황이 다르다. 사진사는 자신의 존재감을 철저히 숨기고 그저 거대한 스케일의 자연 앞에서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른다.
풍경 사진은 결국 경계를 담는 일이다. 하늘과 구름, 구름과 바다, 바다와 땅, 땅과 나무... 대부분의 사진 위 아래를 크롭한 것도 경계에 더욱 집중하고 싶어서 였다. 뭐라고 딱 잘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와 함께 하는 경계에 대한 탐구는 한장 한장이 너무나 흥미 진진했다. 수동렌즈가 불편해서 걱정이라면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포커스링을 스르르 돌려서 또렷하게 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그 순간, 그 짜릿함은 불편함을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태양과 마주보다
섭지코지에 들렀던 여행 넷째날은 유난히 더 화창했던걸로 기억된다. 조리개를 아무리 조여도 셔터스피드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자전거를 타고 섭지코지를 한바퀴 도는데, 머리위로 햇살이 강하게 내려쬐는게 느껴졌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눌렀다. 태양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찍는건 눈에도 안좋고 카메라에도 안좋다. 특히나 센서에 이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자제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이렇게 태양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을 볼때면 늘 화면 가득 퍼지는 빛 때문에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ZEISS의 렌즈가 세계 최고의 명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뛰어난 광학적 설계도 물론 한몫 했겠지만, T* 코팅의 뛰어난 성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코팅이라고 불리는 T* 코팅은 플레어와 색수차 억제를 극대로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된 사진을 얻을 수 있게 만든다. 좋은 렌즈를 사용한다고 해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건 아니지만, 뛰어난 렌즈는 그만큼 사진사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점이 다르다.
이 사진은 정방폭포 앞에서 친구를 찍어준 사진이다. 역시나 그날도 날이 너무 맑아, 역광에서는 도저히 인물의 얼굴이 잡히질 않았다. 급한대로 내장 플래쉬를 터뜨려 찍었는데 나름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전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렌즈가 토키나 28-80인지라(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그 야생마!) 사실 플레어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한 편이고 오히려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의 역광 플레어 억제능력은 그런 나에게도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억지로 애를 써서 만드려 하지 않는 한 사진에서 플레어를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자이스로 안도 타다오를 담다
안도 타다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일본의 건축가다. 최근 섭지코지에는 그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라는 건물이 들어섰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직접 찾아가보니 정말 너무 좋은 사이트에 자리잡고 있어서 내가 다 셈이 날 정도였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볼때, 솔직히 외부 디자인은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에 대한 프레이밍이나, 조경 설계를 통한 자연스러운 시선의 유도는 그가 왜 거장인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로 주로 풍경을 찍었지만, 사실 건축 사진에도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는 렌즈다. 물론 뷰 카메라 같은 제대로된 장비를 쓰지 않는 이상 왜곡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담백하게 건축물을 담아내는 렌즈는 없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세번째 사진은 바디 내장 HDR 기능으로 찍었는데 손에 들고 찍는 바람에 상이 흔들려 겹쳐버렸다. 못내 아쉬운 사진이다.
건축물은 그 형태가 변하거나 하는 피사체가 아니지만, 수많은 선과 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렌즈의 화각이나 왜곡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실제 설계과정에서는 이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클라이언트를 설득시키기 위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에도 왜곡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ZEISS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가장 비슷한 사진을 만들어낸다. 과장되지 않은 시선은, 좋은 건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제주에서 자이스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
장황하게 풍경 사진과 자이스, 그리고 나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다. 사실 렌즈 리뷰라는게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이 대부분이라 쓰다보면 할말이 두서없이 길어지게 된다. 물론 객관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수치와 그래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아직 제주 여행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안되었지만,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자전거만 죽어라고 탈줄 알았었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아서 상당히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와 함께 하는 시간 만큼은 셔터를 누르는 그 자체가 짜릿함이고 즐거움이었다. 리뷰 본편을 계획하면서 사실은 필름바디에서의 성능과 해상력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 했었는데 막상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와서 제주 사진들로만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실제 풀프레임에서도 주변부까지 변함없는 해상력과 선예도를 보여줬고, 왜곡은 거의 없었다. 분명 가까운 거리에서 광각으로 찍었음에도, 망원렌즈로 당겨 찍어서 크롭한듯한 묘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사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 오랜만에 필름 바디에 21mm 렌즈를 끼워보니 너무 넓어진 화각에 적응을 못해서였다. 이제 펜탁스에서 풀프레임 바디만 나오면 될터인데, 그런날이 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200만원이 넘는 수동렌즈. 비싸다면 비싸지만 또 결코 비싸지 않은 렌즈. 묘한 매력에 끌려 일단 마운트 해보면, 다시 놓아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진정 풍경 사진을 사랑하고, 자연을 동경하는 사람들이라면 Carl ZEISS Distagon T* 2.8/21mm ZK는 언젠가 꼭 한번 사용해봐야 할 렌즈다. 그리고는 어느새 드넓은 벌판 위에서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뭔가에 홀린듯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진정한 사진찍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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