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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골목마다 이슬람 사원이 많던 아루샤의 아침. 싸구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모를 노래와 종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나를 깨운다. 조금씩 밖은 밝아오지만 왠지 몸이 침대에 찰싹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질 않는다. 어제의 여독이 아직 덜 풀린걸까. 세렝게티 사파리를 떠나면 두 밤은 텐트에서 자야만 한다. 샤워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기는 또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벽을 등지고 돌아 누웠다. 머리맡에는 지난 밤에 보던 론니 플래닛이 펼쳐진 채로 놓여져 있다. 그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만나고 싶었던 세렝게티를 만나는 날이구나. 바로 오늘이구나.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샤워를 미리 해두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만나고 싶었어, 얼룩말아...!


 이곳에서는 사파리를 '게임 드라이브'라고 부른다. 야생 동물들과 가까이서 마주하고, 낯선 자연 속을 탐험하는게 사파리의 가장 큰 목적이고 주된 즐거움이다. 하지만 거친 비포장 도로에서 수풀을 헤쳐가며 4륜 구동 지프에 올라 달리는 경험 또한 색다르기에 왠지 '게임 드라이브'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게임이 이제 막 시작되려한다. 두근두근거리는 거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투박해보이는 사파리 지프, 하지만 초원위에서는 쌩쌩 잘도 달린다


 게임 드라이브는 일정에 따라서 조금씩 프로그램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탄자니아와 케냐를 찾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고, 워낙 비싼 관광상품이라 수많은 여행사가 있지만 대부분 정형화된 일정을 따라 진행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박3일짜리 사파리로는 내가 보고싶었던 진정한 야생의 세렝게티를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짧은 사파리 일정의 경우에는 첫날에는 마라냐 호수, 둘째날에는 응고롱고로 분화구, 그리고 셋째날에는 타랑기레 국립공원을 둘러보게 된다. 진짜 세렝게티를 꼭 보고싶다면 최소 일주일 이상 일정을 잡하야 한다는데,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제대로 된 길이 없는곳이 대부분이고 해충이나 맹수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관광객들에게는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행여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쯤 되는 사람이면 모를까, 아쉽기는 하지만 언젠가 다시 찾으면 꼭 오겠노라 다짐하며 사파리 지프에 올랐다.

세렝게티로 가는 길 위에서...


 2박 3일동안 네다섯명이 한 팀을 이루게 된다. 캐나다에서 온 여학생과 일본 남학생, 그리고 우리둘. 사파리 내내 지프을 운전해줄 기사 아저씨와 저녁에 밥을 지어주는 쉐프가 따라붙는다. 영화에서나 본 듯 한 육감적인 외모의 지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지붕 뚜껑을 열면 언제든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볼 수 있는데, 하도 사람들이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그런지 쿠션이 다 내려앉아서 딱딱하기까지 하다.
 세렝게티로 출발하는 관문인 아루샤에서도 캠프사이트까지는 한 두어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푸른 초원위로 한갈래 길을 따라 사파리 트럭들이 달린다. 모든 창문을 다 열어두니 시원한 바람이 기분좋게 불어 들어온다. 캠프사이트로 출발하기 전, 2박 3일동안 먹을 물과 약간의 간식, 그리고 저녁때 먹을 술을 사서 차에 가득 실었다.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갈 수록, 내 마음은 더욱 설레여 간다


 출발할때만 해도 조금 흐렸던 하늘이 점점 파랗게 물들어간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새들과 나무, 끝없는 들판이 전부다. 가끔씩 저 멀리 한가롭게 밭을 갈고있는 마사이족들도 눈에 띈다. 저 사람들도 어딘가 집이 있을텐데 마을같은건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서 온걸까. 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온건 아닐까. 화려한 원색의 옷에 저마다 한손에는 지팡이를 들고있는 마사이족들. 문득 그들의 삶이 또 궁금해진다.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파노라마 캠프사이트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우리가 이틀간 머무를 '파노라마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마라냐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 위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정말 그 이름처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캠프장을 한바퀴 쓱 둘러봤다. 굉장히 열악할 줄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나 깔끔하게 잘 정돈된 캠프사이트의 모습에 먼저 놀랐다. 샤워장과 식당도 따로 마련되어있고, 군데군데 야외에서 간단한 술이나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도 보인다. 우리가 잠을 자게될 텐트는 이미 잔디위에 설치된 상태. 군용 텐트에서나 쓸법한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비가와도 끄덕 없을 것 같다.




텐트를 열고 나오면 이렇게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간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적인 게임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텐트가 늘어선 캠프사이트 뒤로 내려가니 마냐라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란 하늘아래 광활한 호수와 초원의 모습에 내가 세렝게티에 들어와있음을 다시한번 새삼 느낀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모두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사모사와 삶은 달걀, 크래커와 망고주스가 전부인 조촐한 도시락이지만 고개를 들면 손에 잡힐듯 펼쳐지는 펄떡거리는 대 자연과 함께하니 이보다 더 멋진 식사가 또 있을까. 쌍안경으로 보니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저 멀리 초원에 기린이며 코끼리가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지금 쌍안경으로 내가 본 그곳, 마냐라 호수의 초원 한 가운데로 이제 드디어 그 한가운데로 내가 들어간다.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어떡해, 어떡해!




게임 드라이브, 말 그대로 야생을 누비는 한 편의 멋진 게임이다


 캠프사이트로 올라오는 길을 따라 다시 마라냐 호수에 가까이로 향한다. 한참을 숲속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나무사이로 달렸다. 한 삼십분 쯤 지났을까, 별안간 앞이 뻥 뚤리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 펼쳐진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건조한 날씨에 비포장길을 빠르게 달리니 흙먼지가 없을리 만무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트럭 지붕위로 고개를 내밀고 섰다. 위에서 내려다볼때는 손톱만하게만 보이던 초원인데 막상 내려와보니 그 느낌이 또 다르다. 아까 내가 봤던 기린은, 코끼리는 어디쯤에 있었던 걸까. 얼른 동물들이 반갑게 인사해주면 좋겠건만 아직도 한참은 더 들어가야 한단다.


좀처럼 물밖으로 잘 나오려 하질 않는 하마들


 마냐라 호수에 더 가까이 들어가기 전에, 그보다는 조금 작은 웅덩이에 차가 멈춰섰다. 부릉거리는 엔진소리가 사라지니 귀가 멍 해질 정도로 별안간 정적이 감돈다.' 뿌우'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큰 소리와 함께 물 속에 숨어 있던 하마가 고개를 든다. 더운 날씨에 그들도 지쳤는지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며 연신 자맥질을 해댄다.



평범한 풍경 사진속에도 아프리카의 '색'이 뚝뚝 묻어난다


 푸른 초원위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저 멀리 지평선 가까이에 하나 둘씩 반가운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분'이라고 불리우는 원숭이들은 이곳 초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다. 수 십마리씩 떼로 몰려다니며 가끔씩은 우리 트럭앞을 가로막고는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사파리는 이미 관광상품으로 많이 개발되어버려 어쩌면 진짜 야생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처음엔 했었다. 하지만 이곳 게임 드라이브에는 엄연히 룰이 존재한다. 지프들은 절대로 정해진 길 이외의 지역을 다녀서는 안되며, 허가된 구역 외에서는 차에서 내리는 것 또한 금지된다. 가끔은 차에서 내려 더 가까이 보고싶은 마음도 들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한다. 뚜껑이 열리는 사파리 트럭에서도, 지붕위에 걸터 앉거나 올라서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순한 동물들도 많지만 맹수들 역시 많기 때문에 자칫 밖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무슨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다녀갔다는 흔적을 절대 남기지 말 것


 그래서 일까. 수많은 사파리 지프들이 드나드는 와중에도 초원위의 동물들은 한치의 동요도 없었다. 지프들이 지나가는 길 위를 막고 누워서 낮잠을 즐기기도 하고, 가끔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오는 겁없는 녀석들도 있었다. 아무리 약한 동물일지라도 일단 앞을 막아서면 지프는 절대로 동물을 위협하거나 비켜가지 않고 조용히 서서 그들이 알아서 비켜날 때 까지 시동을 끄고 기다린다. 길 외에 초원지역으로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비켜갈 방법도 없다. 잠깐 그렇게 조용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이 금새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살짝 비켜준다. 존중받고 싶다면 남을 먼저 존중하라는 말이 떠오른다. 말못하는 짐승들이지만 그들에게서 소중한 배움을 또 하나 얻어간다.


얼룩말, 얼룩말, 그리고 또 얼룩말


 "세렝게티에 가면 가장 보고싶은 동물이 뭐야?"
 "... 얼룩말?"

 아프리카로 떠나기전, 사파리를 한다는 말에 친구가 갑자기 가장 보고싶은 동물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적이 있었다. 딱히 그런게 있어서 꼭 가는건 아닌데... 그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물이 바로 얼룩말이다.
 어렸을 때 나는 그림 동화책을 참 좋아했었다. 그 희미한 기억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림 한 장. 푸른 초원위로 마치 바람을 타듯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얼룩말 한쌍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바로 오늘. 그림속이 아니라, 바로 내 눈 앞에서 그때의 얼룩말들을 다시 만났다. 눈이 아플정도로 또렷하게 흑과 백으로 갈라진 멋진 줄무늬를 가진 얼룩말들은 부끄러운지 자꾸만 엉덩이를 내 쪽으로 향하고 얼굴을 쉬이 보여주질 않는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어여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함께 소꿉놀이하던 동네 친구를 만나는듯 그렇게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본다.



기린의 늘씬한 자태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높은 나무의 풀을 뜯어먹고 산다는 기린들은 왠일인지 나무 한그루 없는 초원위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자연을 캔버스 삼아 누가 그려넣기라도 한 듯한 자태에 모두들 잠시 숨을 죽이고 그들이 몸짓 하나, 발짓 하나를 따라 열심히 눈동자를 움직여 본다.









아슬아슬하게 지프 옆으로 코끼리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어느덧 그토록 뜨겁던 여름날의 오후가 지나가고, 한바탕 소나기와 함께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불어온다. 광활한 초원을 빠져나와 다시 숲속으로 들어와 캠프사이트로 돌아간다. 지붕 위로 몸을 기대로 덜컹거리며 한참을 달리는데 저 멀리 앞에 지프가 한 대 멈춰서 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쪽을 바라보며 모두들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옆을 보니, 세상에.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코끼리가 떼로 지나가며 길을 막고 있었다.


아직 어려보이는 아기 코끼리, 어서 엄마를 쫒아가렴...


 갑자기 많은 사파리 지프들이 다가와서 조금은 놀랬던 모양이다. 외길 위에서 모두 멈춰선 지프들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시동을 끄고 숨죽인채 그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유난히 몸집이 작은 아기코끼리는 아직 걸음마저 어색해보인다. 행여 앞서가는 엄마 코끼리를 놓치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참 귀엽다. 
 후두둑. 다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열어두었던 지붕 뚜껑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하루종일 난간을 꽉 잡고 서있어서 다리가 많이 아팠나보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자마자 발끝부터 스르륵 다리가 저려온다.

강한 향에 코 끝이 찡해지던 오늘의 저녁 레시피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릴 때가 다 되어서야 캠프사이트로 돌아왔다. 우리의 셰프는 벌써부터 저녁을 준비하느라 많이 분주한 모습이다. 식당에 앉아 잠시 커피와 차를 마시며 오늘 보았던 동물들의 사진을 하나씩 보며 이야기 꽃을 피워본다. 어느새 저녁 식사가 한가득 식탁위에 차려지고, 오늘 보았던 초원의 모습만큼이나 야생의 향이 가득한 요리들로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내일은 게임 드라이브 2일차. 세렝게티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우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가는 날이다. 오늘 마냐라 호수에서는 맹수들 보다는 순하고, 약한 동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을거라며 우리의 드라이버가 살짝 귀뜸을 해준다. 또 어떤 동물들을 만나게 될까...
 술을 꽤 많이 사왔지만 오늘은 딱 한병만 마시고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딱딱한 텐트 바닥에 누워 침낭을 덮으니 사알짝 알딸딸한게 기분이 참 좋다. 세렝게티 초원 위에 지금 누워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아! 세렝게티. 내가 지금 바로 그곳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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