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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뭐할거야? 스파이스 투어라는게 있는데 아주 싸고 재미있어. 해보지 않을래?'

 잔지바르에 도착하자마자 파파시(papasi, 일종의 호객꾼)들이 벌떼처럼 달라붙기 시작한다. 아직 오늘 하루도 뭐 할지 모르겠는데 내일 일정부터 먼저 짜주려고 다들 아우성이다. 쏘리, 노땡큐를 연발해가며 힘겹게 그들을 따돌렸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는 과거 중개무역의 요지였다. 따사로운 열대의 기후와 비옥한 토질이 맞물려 많은 향신료와 과일들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기도 했고, 그곳에서 혹은 더 먼 곳에서 일을 하기 위한 노예들이 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짐짝처럼 팔려 나가기도 했다. 아픈 기억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스파이스 투어'라는 가장 인기있는 여행 상품이 되었다.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잔지바르의 하늘

  
 '스파이스'는 향신료, '스파이스 투어'는 향신료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쯤 되겠다. 사실 이미 짜여진 루트를 따라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향신료가 재배되는 숲속을 한 바퀴 걸어보는 정도가 전부지만 13달러라는 비교적 싼 가격으로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어느새 잔지바르의 필수 여행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배를 타고 멀리 섬에 다녀오지 않을래? 낚시는 좋아하니? 끝내주는 해변이 있는데 한번 가볼래?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는 어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호객꾼들 사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다음날 아침 일찍 '스파이스 투어'를 가기로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

스파이스 투어로 유명한 MITU's OFFICE


 론니 플래닛에서 추천하는 MITU's OFFICE에서부터 스파이스 투어가 시작된다. 향신료 나무들이 자라는 숲은 해변에서 좀 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에 조그만 봉고차에 함께 올랐다. 미로같이 얽혀있는 스톤타운을 돌아다니며 부시시한 얼굴로 막 잠에서 깬 듯한 서양 여행자들을 한 명씩 태우고, 차에 빈 자리가 없게 되어서야 드디어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유창한 영어실력의 가이드였지만 내 귀는 그다지 유창하지 않은가보다


 그렇게 한 삼십분 쯤 달렸을까. 인적이 뜸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 조용한 숲 속에서 차가 멈췄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는 가이드. 오늘 하루 이 낯선 숲속을 안내할 친구다. 익숙한 솜씨로 나무등걸 의자에 사람들을 앉히고는 유창한 영어로 스파이스 투어에 대한 안내가 시작된다. 
 숲속은 지저귀는 새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삐죽한 야자수들 사이로 연한 초록빛 하늘이 수줍게 아침을 열고 있다. 마음도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13달러가 아니라 30달러를 주고 와도 아깝지 않겠다며 너스레를 떨어가며 바쁜 걸음으로 가이드를 따라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한다.

카데몬, 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향이 난다


 일단 숲속을 들어오면 정신을 집중해가며 영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으로 보고, 코로 느끼며, 입으로 맛보면 그만이다. 마치 어렸을때 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현장학습을 나와 있는 것 마냥 이것 저것 만져보고 몸으로 느끼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카데몬은 사프란, 시나몬과 함께 꽤 고가의 향신료로 주로 인도 커리에 많이 들어간다. 자극적인 향에 비해 노랜 과실속의 빨간 씨앗의 모습은 달콤한 과일맛이 날 것 처럼 생겼다. 일단 반으로 쪼개고 나면 옆을 따라다니는 조수들이 바쁘게 칼을 놀려가며 작은 조각으로 썰어서 사람들 코에 먼저 가져다 대준다. 혀로 깨물어 보기도 전에 톡 쏘는 향이 코 끝을 찌른다. 강렬하지만 의외로 꽤 익숙한 향이 이내 그윽하게 퍼진다.

아보카도, 아직 덜 익어 떫은 맛이 난다


 카다몬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맛인 전혀 다른 아보카도도 자주 눈에 띈다. 그나마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들 중에 익숙한지라 저거 안다며 손가락으로 가르키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따와서는 쩍 하고 반을 갈라서 먹어보란다. 초록빛 껍질과 연한 노란색 속살이 참 예쁜 아보카도는 아직 덜 익었는지 살짝 떫은 맛이 났다.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신기한 과일, 처음보는 식물들이 많아 졌다.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 처럼 낯선 향기에 점점 취하는것만 같다. 차를 달여 먹기도 한다던 '레몬 그라스'라는 이름의 풀은 말 그대로 톡 쏘는 레몬향을 풍긴다. 한 웅큼씩 쥐어 반을 툭 잘라 사람들 손에 쥐어주는데, 어느새 그윽한 레몬향이 손에 가득 베어 걷는 내내 폴폴 풍기며 기분까지 좋게 만든다.



말 그대로 '친환경' 선글라스. 햇빛을 막을지는 미지수...


 나무에서 또 다른 나무를 찾아 걷는다. 어느새 햇볕이 꽤 강해졌지만 울창한 나무들 덕에 숲속은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잠깐 걷는 시간조차 지루할까봐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꼬마 청년들이 풀잎을 엮에 목걸이며 반지며 만들어 저마다 손에 하나씩 끼워준다. 지난 여름 인도에서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나 돈이라도 달라고 할까봐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처음부터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던것 같다. 조금 투박하지만 정성이 가득담긴 진짜 '친환경' 악세서리 덕분에 서양 여행자들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바닐라가 이렇게 투박하게 생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둥글넙적하게 생긴 이 식물의 이름은 다름아닌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만 먹을 줄 알았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덕에 충격이 더 컸다. 저 주머니 같이 생긴 깍지 않에 바닐라 콩이 들어있고, 그 콩에서 향을 추출해 만든게 우리가 아는 바닐라 향의 정체다. 촌스럽게 혼자 문화 충격을 받고는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그러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보다 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서양 특유의 한옥타브 높은 탄성을 질러가며 뚫어져라 바닐라를 쳐다보더라.

립스틱 트리, 정말 화장품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페퍼민트 같은 허브 나무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신기했던 나무는 바로 립스틱 트리. 나무에 달려있는 빨간 알맹이를 따서 반을 가르면 정말 화장품 처럼 새빨간 가루가 안에 가득하다. 옆에 나무 껍질에 열매를 긁어보면 페인트를 칠한 것 처럼 빨간 가루가 묻어나는데, 사람 피부에도 진하게 덧바를 수 있어서 립스틱 트리라고 부른단다. 서로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묻혀주며 장난도 한번 쳐본다.


스타프루츠, 톡쏘는 상큼한 맛이 나는 과일이다


 사실 향신료보다도 더욱 즐거운게 열대 과일을 맛보는 일이다. 직접 입에 넣고 혀로 맛볼 수 있는 열대과일은 그야말로 꿀맛. 별모양 같이 생겨서 스타 프루츠라는 이름의 이 과일은 오렌색 과육처럼 톡 쏘는 상큼한 맛이 나는 과일이다. 그렇게 달지도, 그렇게 시지도 않아서 사각거리는 씹는 맛에 질리지 않고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계속 먹었다.




맛있는 것도 있고, 뱉어버린 것도 있고...


 잭푸르츠, 람부탄, 리치... 이것저것 참 많이도 먹었다. 쉬지않고 계속 먹었다. 날씨가 더운 나라를 여행할때는 개인 물병을 들고 다니는게 기본이지만 이날은 깜빡 한 덕분에 물 한모금 못마시고 목이 많이 말랐었다. 다행히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들이 많아 간간히 과즙으로 목을 축여가며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그래도 스파이스 투어는 먹는 재미가 최고다


 어느덧 짧지만 즐거웠던 스파이스 투어가 모두 끝났다. 오솔길을 따라 아침 나절 내내 걸어다녀서 그런지 다들 지친 표정이다. 그래도 아낌없이 계속해서 잘라주는 열대과일을 맛보는 재미에 다시 기운이 난다. 스파이스 투어가 끝나면 돈을 더 내고 해변까지 돌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점심을 먹고 바로 북쪽 해변으로 올라갈 생각이었기에 해변 투어는 참가하지 않고 그냥 다같이 모여 점심을 먹고 우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차린건 별거 없지만 맛있게 먹었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은 먹는 것에서 시작해서 먹는 걸로 끝난다고. 그렇게 이것저것 맛보고 냄새 맡아가며 다녔지만 아무래도 날 재료보다는 요리가 되었을때 더 군침이 도는 법이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야생의 향신료들이 요리가 되어 듬뿍 들어간 소박하면서도 푸짐한 점심상이 차려졌다. 인도식으로 짜파티(납작한 밀가루 빵)와 달(녹두를 개어 만든 일종의 스프), 그리고 시금치 나물이 전부지만 워낙 배가 고파서 다들 잘도 먹는다. 이제는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느껴가며 오늘 걸었던 숲속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 것으로 스톤타운에서의 여정은 마치기로 하고, 이제는 잔지바르의 북쪽 끝 능궤 해변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 시간후, 두 그릇이나 먹어 두둑했던 배는 어느새 다 꺼져버렸다. 시원한 숲속은 벌써 온데간데 없고 그늘 하나 없이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능궤행 버스를 마냥 그렇게 기다리고 서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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