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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그락, 달그락. 한 걸음씩 내 딛을 때 마다 발 끝에 자갈이 채인다. 싱그러운 6월의 녹음이 가득한 벌판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그렇게 혼자서 걸어보는 나만의 시간, 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반나절이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는 그야말로 초고속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이지만, 유난히 '기차'라는 두 글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늘 낭만과 추억으로 먼저 다가온다. 궤도를 따라서 정해진 길로만 다닐 수 있는 기차. 하지만 그래서 더 아련하기만 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떠났던 여행의 설레임, 대학교에 입학해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MT를 떠나던 기억, 사랑하는 연인과 오붓하게 앉아 덜컹거리는 차장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였던 추억. 이 모든 이야기들은 철로 위에 쌓이고 또 쌓여만 간다. 같은 길을 달리며 차창밖으로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더라도 늘 설레일 수 있는건 아마도 그때문이 아닐까.

항동 철길은 하루에 딱 한번만 열차가 지나가는 길이다


 구로구 항동 일원은 강서구 마곡동과 함께 서울에서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던 한적한 동네다. 마곡지구는 벌써 워터 프론트니 뭐니 하면서 개발의 바람이 성큼 불어와 버렸지만, 항동 기찻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 속에는 아직 여백이 더 많다. 서울에서 태어나 기차라고는 여행가며 잠깐씩 타본게 전부인 나같은 서울 촌놈에게는, 빼곡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철길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서울에서 철길을 따라 걸어볼 수 있는 곳이 또 얼마나 될까. 하루에 딱 한번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이곳 항동 기찻길에는 그래서 걷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볼 수 있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쉽게 철길로 들어설 수 있다


 기찻길은 오류동 역에서 시작해서 항동 저수지 너머로 이어진다. 어느덧 30도 가까이 훌쩍 올라버린 날씨 때문에 벌써 등줄기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철로을 따라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점심먹는것도 잊고 이곳을 찾았다.
 7호선 천왕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쉽게 철길을 찾을 수 있다. 같은 서울 하늘아래 사람사는 동네지만 지하철 출구를 나와 변변한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 한적한 풍경에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지도 한 장 없이 무작정 찾아온지라 큰길을 따라 걷다가 마음 가는대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렸을 적 기억속에나 있을법한 좁은 골목길 저 편으로 살짝 솟아있는 철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조금은 생경한 풍경


 작은 방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잡초가 무성한 빈 철로와 아파트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방향도 모르고,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몰라 일단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여느 철길 주변의 풍경 처럼, 자투리 땅에는 상추도 심고 고추도 기르는 소소한 삶의 흔적이 뚝뚝 묻어나온다. 하지만 텃밭 한켠으로 자그마하게 세워진 팻말에는 정해진 기한 내로 작물을 수확해가지 않으면 강제로 철거하겠다는 문구가 조금 딱딱한 글씨체로 프린트 되어 붙어 있었다. 철로 옆의 땅은 주인이 없는 빈 땅이 아니기에 작물을 재배하는게 엄연히 불법이지만, 팻말을 보며 왠지모를 아쉬운 생각이 드는건 나만의 착각일까.




언제고 열차가 갑자기 나타날지 몰라 지레 겁을 먹어버렸다


 하루에 딱 한번만 화물열차가 지난다고는 하지만, 철길을 따라 걸으며 괜히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폭이 좁아지며 갓길이 없어지는 구간이 나오면 지레 겁을 먹고 잰걸음으로 뛰기도 했다. 철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있는 풀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되다가도, 건널목 마다 세워진 차단기를 보면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으로 살포시 비켜 서게 된다.
 


아이코, 실수로 반대쪽으로 걸어와 버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더 한적한 곳으로 이어질 줄로만 알았던 기찻길은 오류동 역으로 들어가며 사라져버렸다! 알고보니 천왕역에서 처음 철길에 들어섰을때 왼쪽으로 가야 항동 저수지 방향인것을 반대로 걸어와 버렸다. 이대로 철길은 오류동 역으로 들어가 본선과 합류한다.
 바로 옆으로 요란한 굉음을 내며 화물열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간다. 더 들어갔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서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다시 봐도 마냥 좋은, 고요한 기찻길 풍경


 철로 바로 옆으로 5층짜리 작은 아파트가 옹기종이 들어서 있고, 자동차들도 바쁘게 지나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하다. 마을을 빠져나와 조금 더 걸다 보면 사진속에서나 보아왔던 낭만적인 풍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양 옆으로 울창하게 펼쳐진 숲을 가로질러 하늘을 향해 이어지는 듯한 기찻길.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도, 북적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곳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인것만 같다.





기차가 다니지 않을때면 이곳 주민들의 지름길이 되어 주기도 한다


 기찻길을 따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밭을 매러 나갈 채비를 한 아주머니도 보이고, 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도 지나친다. 자그마한 언덕을 가로질러 넓은 논밭으로 이어지는 철길은 마을 주민들에게 편리한 길이 되어주고,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여로가 되어준다.

 



생각치도 못했던 손님, 노란 유채꽃


 주말이라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많을 줄로만 알았는데, 손에 카메라를 든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나 하나뿐이다. 여기가 정말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시원한 풍경은 자꾸만 철로 위에서 내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철길 옆으로 자그마하게 펼쳐진 유채밭에는 벌과 나비가 바쁘게 날아다닌다. 
 유채밭 너머로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듬성듬성 세워진 원두막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잠시 태양을 피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평화로이 비어있는 풍경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곧 이 자리에는 '항동 수목원'이 들어서게 된단다. 또, 지금 걷고 있는 철길을 따라 레일 바이크를 운영할 계획이라는데... 강원도에서나 하는줄로만 알았던 레일 바이크를 서울 한복판에서 즐길 수 있다는게 꽤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안그래도 이 근처로 벌써 보금자리 주택지구가 확정되면서 슬슬 공사가 시작 될텐데, 개발의 바람에 치여서 서울의 마지막 남은 여유마저 사라지게 되는건 아닐런지.




철길을 따라 걸어보는건 도시 사람들에게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니다


 철로를 받치는 침목이 놓여진 간격은, 사람의 보폭에 조금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철로를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어디를 가더라도 무조건 빠르게, 숨넘어 갈듯 오로지 시계만 쳐다보며 걸어 다니지만 오늘만큼은 꾹꾹 침목을 즈려 밟으며 천천히 걷는게 참 좋다. 한 발짝 옮기고 하늘 한번 바라보고, 또 한 발짝 옮기고 산 한번 바라보고.





다시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이왕 왔으니 끝까지 걸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점점 뜨거워 지는 태양이 목도 마르고 슬슬 배도 고파온다. 철로를 따라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만, 항동 저수지 쪽으로 버스 정류장 팻말이 하나 서 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노선도를 보니 마냥 반갑다. 그래도 아직 내가 서울에 있기는 하구나.
 6614번 버스를 타면 오류동 역을 지나 신정 네거리, 양천구청 역으로 갈 수 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도 맞아서 덕분에 쉽게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같이 화창한 여름날의 기찻길 풍경도 너무 좋았지만,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 그리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에 꼭 다시 찾고 싶은 그런 곳이다. 친구랑, 혹은 연인이랑 와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홀로 호젓하게 걷기 너무 좋은 멋진 곳이다. 옛 추억에도 잠기고, 설레이던 첫 기차여행의 아련한 기억도 떠올려 보며 그렇게.


photograph by LeeKyu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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