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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주말을 이용해 당일치기로 영월에 다녀왔다. 요새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게 너무 싫다. 멀리 여행이라도 가고 싶지만 그럴수도 없기에 기차라도 타고 싶어서 영월에 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곳이지만 왠지 모르게 기차를 타면 내가 멀리 떠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기차에 덧씌워진 이미지, 혹은 환상으로 나를 잠시 덮는 셈이다. 사진을 또 찍어보겠다고 가방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왔는데, 사실은 그냥 좀 걷고 싶은게 전부였다. 아무데도 못가고 하루종일 길바닥에서 걷다가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사람도 차도 없는 곳에서 그냥 좀 걷고 싶었다.

도란도란 기차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혼자 고독을 씹는 척은 다 해 놓고서는, 또 혼자 갈 용기는 없어서 학교 후배들을 불렀다. 아직 학기초라 이것저것 정신없이 바쁠텐데 그래도 이렇게 먼길을 함께해주는 녀석들이 참 고맙다. 어느새 새 단장한 민자역사로 옮겨진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월로 향한다. 좀 지저분하고 덜컹거려도 그게 기차타는 또 맛이었는데, 요새 기차는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좀 아쉽다. 새 건물에 옮겨간 청량리역도 마찬가지다.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헉헉대며 올라가 기차를 아슬아슬하게 잡아타던 추억은 이제 서서히 잊혀지겠지. 객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삶은 달걀이랑 사이다를 팔던 카트도 요새는 자주 오질 않는다. 대신 열차 중간에 딸려있는 카페 칸에서 여러가지 주전부리를 한데 모아서 팔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맥주 한캔을 땄다.

덜컹거리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후배 한 녀석이 열심히 영월 지도를 출력해 왔길래 잠깐 들여다 봤다. 영월이 강원도에 있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줄은 미처 몰랐었다. 별별 재미나 보이는 볼거리가 지도에 빼곡하게 점으로 찍혀있다. 그런데 지도에 스케일이 없다. 당최 얼마나 걸릴지, 버스는 있는건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볼거리에는 욕심 부리지 말고 천천히 걸으며 갈 수 있는 곳 까지만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차창 너머를 아득히 바라보며 맥주를 한모금 더 삼킨다.



매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게 기차역 풍경이다


 큼지막한 가방에 렌즈를 딱 두개 챙겨왔다. 처음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부터 써왔던 광각렌즈 하나. 그리고 펜탁스 DA☆200 단렌즈 하나. 보통 여행에서 광각렌즈나 표준 줌렌즈로 풍경을 많이 담는 일이 많은걸 알아서인지 후배들이 200mm 렌즈는 왜 가져왔냐고 묻는다.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통 인물사진에 주로 쓰는 망원렌즈를 인적이 드문 풍경속으로 들어가며 가져왔으니 말이다.
 그냥 녀석들 얼굴 좀 이쁘게 담아주고 싶었다. 길을 따라 걷고 싶어 영월을 찾았고, 함께 걸을 고마운 친구들이 옆에 있으니 최고의 모델이 어디 따로 있나. 평소에는 자주 못보는 미안한 마음에 사진으로라도 이쁘게 담아주고 싶었다.



기차역에 내려 제일 가까운 식당을 들어갔다


 아침 일찍 청량리를 출발한 기차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영월역에 도착했다. 오며가며 많이 지나던 역인데 정작 영월에서 기차를 내려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멋드러지게 한국식으로 꾸며놓은 역사가 산세와 어우러지며 반갑게 먼저 사람들을 맞이한다. 
 다들 배가 고파 먼저 뭐라도 좀 먹고 가기로 했다. 잘 모르는 도시에서 식당을 맛있는 식당을 찾으려면 역 앞에있는 식당을 들어가면 된다고 들은게 얼핏 생각이 난다. 어차피 이곳 지리도 잘 모르고 아는 식당은 더더욱 없으니 역 앞에 있는 가장 가까운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다. 연필로 꼼꼼히 그린 영화 포스터들이 즐비한 식당 내부. 이국적인 그림들을 뒤로하고 다분히 한국적인 다슬기해장국과 순두부 찌개가 식탁위에 올려졌다. 인스턴트 뼈 해장국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그런지, 고기 한 점 없어도 국물이 구수하고 참 시원하다. 아직 영월에서 아무것도 본건 없지만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터미널에서 주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밥을 다 먹고 시내에 있는 버스 터미널을 찾았다. 요선정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주천까지 가야 하는데, 가까운 줄 알았더니 고속버스로 50분이나 가야한단다. 주천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고 우선은 주천까지만 버스를 타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버스에 대부분이다. 그렇게 굽이굽이 강을 따라, 산을 따라 버스는 주천으로 간다.



함께 걸으며 사랑하는 이들의 표정을 담아주는 작은 행복이란...


 주천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마을이 작았다. 그래도 요선정 정도 되는 관광지면 버스가 다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버스 정류장처럼 생긴 표지판 하나 보이질 않는다. 근처 부동산에 들어가 방향을 물어보고는 국도변을 따라서 무작정 걸어가기로 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지 금새 손끝이 빨갛게 저려온다.
 200mm 단렌즈로 길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 참 더 뒤에서, 아니면 한 참 더 앞에 먼저 가 있어야 한다. 갈림길도 없는 2차선 국도위에서 그렇게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며 조금씩 요선정을 향해 걸었다. 네 명이 한데 모여 걷다가, 또 잠시 흩어졌다가.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사진이라는 주제를 함께 공유하며 그렇게 길을 걸어본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사람이 걷는 속도는 시속 4km정도 된다. 너무 느리지도, 또 너무 빠르지도 않은 참 매력적인 속도가 아닐까. 빠르기만을 강요하는 이 사회 속에서 그렇게 흘러흘러 살다보면 놓치는게 너무도 많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잡고 싶은 것들은 지나가버린 후다.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낯선 풍경, 두 볼에 느껴지는 바람의 냄새, 멀리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리. 이 모든것들이 지금 내가 걷고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작은 행복은 아닐까.

히치 하이킹을 하게 될 줄이야...


 슬슬 바람이 더 거세진다. 분명 아까전에 지났던 표지판에는 요선정이 2km 남았다고 써 있었는데, 앞에 있는 다른 표지판은 다시 3km로 거리가 늘어나 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건지 걸어도 걸어도 요선정은 커녕 사람 사는 집도 안보인다. 추위에 못이겨 점점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계속 길 옆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승합차 한대가 우리 앞에 멈춰선다. 반 쯤 열린 창문으로 추운데 얼른 올라타라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요선정 바로 옆에 살고 계신다는 두 부부. 바로 어제 아들을 군대에 보내셨다는 그 분들은 우리를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다고 하셨다. 덕분에 쌩쌩 달려 순식간에 요선정에 도착했다. 이따 다시 요선정에서 나올때는 이 길을 또 다시 걸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강산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풍경이다


 요선정에 오르기 전에 산을 따라 굽이치는 강가에 잠시 들렀다. 오랜 세월동안 대 자연이 빚은 아름답고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장관을 이룬다. 쏴 하고 흐르는 물소리에 눈을 감고 바위에 앉아 혼자 신선놀음도 해본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위때문에 정신이 번쩍 하고 뜨인다. 그냥 좋다. 마냥 좋다. 무작정 떠나고 싶을때면 이렇게 금새 서울을 빠져나와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게, 그게 좋다. 너무 새삼스럽게 혼자 그러는걸까.

카메라는 그렇게 잡는게 아니라구~


 나야 어떻게 보면 한가한 휴학생이지만, 학교 다니랴 과제하랴 학점챙기랴 바쁜 후배녀석들도 이곳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바위 사이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서로 사진찍느라 정신이 없다. DSLR을 오늘 처음 만져본다는 지혜는 몇번이고 다시 알려줘도 카메라 잡는법이 몸에 익숙치 않은가보다. 뭐 아무렴 어떤가. 잘 찍던 못 찍던 찰칵거리며 나름의 방법으로 풍경을 즐기면 그만이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요선정에 올라


 아무것도 없는 강가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보다. 몸이 또 슬슬 차가워지기 시작해서 얼른 요선정에 올랐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산세를 뒤로하고 우뚝 솟은 요선정이 보인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아래로 강물이 굽이쳐 돌아가고, 집채만한 바위를 옆으로 요선정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나무들이 잎새가 없어서 그런지 사방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시원스럽다. 아무도 없는 정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조용히 여유를 만끽한다.


한반도 지형마을은 차 없이는 가기 힘든 곳이다


 요선정에서 다시 주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때보다 더 멀고 험난했다. 걷는것도 좋지만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입이 얼어서 말도 잘 안나온다. 옆 산에 '무릉도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진 글씨를 애써 외면하려 고개를 돌려본다. 한 시간쯤 걷다가 결국 콜 택시를 불러서 한반도 지형 마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택시가 잘 없는 동네라 그런지 가격이 꽤 많이 나오더라. 택시를 타고 오며 물어봤더니 워낙 버스도 없고 해서 차가 없이 다니기는 조금 힘들꺼라고 귀뜸을 해 주신다. 그렇게 따뜻한 차 안에서 몸을 좀 녹이며, 1박2일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 졌다는 한반도 지형 마을 앞에 도착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러서 이곳만 들렀다가 바로 서울로 가야 할것 같다.


우리나라와 너무나 닮은 풍경


입구에서는 어디가 한반도 지형이라는지 잘 보이질 않는다. 한 오 분쯤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나무들 사이로 짠 하고 시원스러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반도의 모양을 쏙 빼닮아 한반도 지형마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난히 굽이치며 흐르는 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감입곡류천 지형이다. 하지만 대부분 평범하게 생긴데 반해 일부러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한 한반도 모양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른쪽 강가에 보이는 선암마을은 원래 사람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되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나 역시 아래로 풍경을 내려다 본다.

우연의 일치일까, 자연이 만든 선물은 아닐까


 처음엔 그리 멋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아니어도 으레 강이 흐르는 곳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질 수도 있는 지형인데 뭘 그리 가져다 붙여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지 하는 의심도 했다.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한게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정말 너무 정교하게 닮아 있다.
 일단 서해와 동해 부분에 해당하는 쪽에 모래밭이 마치 갯벌을 연상시키듯 있는데 반해서 동해쪽은 정말 바위 절벽으로 되어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참 신기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특성을 쏙 빼닮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고서저의 지형 역시 나무의 높낮이가 똑같이 재현하고 있고, 사람들로 복작이는 서울부분만 하얀 나무가 심어져 있는것도 신기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더욱 비슷하다. 산지가 훨씬 많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더 높은 나무들이 멀리 보이는 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참 기막힌 우연에 감탄하고 있는데, 아차 제주도가 없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강 위로 가끔 뗏목이 지나간다고 하니 어쩌면 뗏목이 제주도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코끝이 찡한 추운 날에는 군밤이 최고다


 산을 내려와 군밤 세봉지를 샀다. 뜨끈한 오뎅국물에 군밤이랑 호떡을 먹으며 하룻동안의 짧은 방황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힘들다고 혼자 괴로워하고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면 해결되는건 없는 것 같다. 그럴때 일수록 더움직이고, 더 능동적으로 길을 찾는 사람만이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새삼 깨닫는다. 추운 주말이라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또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계속 어깨가 축 쳐져 다녔을지도 모르지만, 영월에 다녀온 덕분에 또 한번 기운이 난다. 하루만 투자하면 그 멋진 풍경에 내가 들어갈 수 있고, 물소리, 바람소리, 모든걸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서 얼었던 몸을 좀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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