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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찍은 사진, 누군가의 필름 첫 롤 속에 담긴 사진들은 그 사람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했다. 얼핏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갸우뚱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지금이야 사진을 찍고나서 마음에 안들면 '삭제'키를 눌러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지만 필름은 좀 다르지 않은가. 일단 셔터를 누르고 나면 좋던 싫던 '내 사진'이 되는 것이니 자연스레 더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고민도 더 많이 했고, 셔터를 반쯤 누르다가도 이내 손가락을 치워버리고 망설였던 기억도 많았다. 사람은 뭐든지 '처음', '최초'를 기억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필름 첫 롤이라는 의미는 더욱 크게 와닿는다. 왜, 티비에서도 나오는 말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살고있는 우리들이니 말이다. 

과외 가는 길에, 놀이터에 앉아서 (2006)


 카메라를 처음 중고로 구입했을 2006년은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정신없고 바쁜 한 해 였다. 갓 대학교에 입학해서 술자리에 불려 다니고, 또 스튜디오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며 과제를 하기도 하고, 나름 부모님께 철든 모습을 보이고 싶어 과외 아르바이트도 짬짬히 했었다. 책장 한 구석에 고이 모셔져 먼지만 풀풀 쌓여가던 내 필름 첫 롤 속에는 그래서 학교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는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2006)


 카메라는 샀는데 맨날 같은 길로만 다니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고있으니 여간 답답한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사먹고 밤에는 야식까지 매일 시켜 먹어가며 그렇게 밥먹듯 밤을 새웠으니 말이다. 그나마 과외 수업을 하러 학생 집으로 가는 그 길에 잠깐씩 짬을 내어 카메라를 꺼내어 볼 수가 있었다. 그 집앞 놀이터, 가는 버스 안, 길 위의 가로수. 그 이후에 다른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게 되면서 이제는 가 볼 일이 없는 곳이지만 필름 속에는 아직도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과외 가는길, 또 다른 경쟁자를 발견했다! (2006)


 학생 티를 이제 막 벗게 된 내가,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려니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놈의 과외가 뭔지. 태어나 한번도 과외 수업이라는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욱 막막했다. 수업을 하러 가던 중, 문득 과외 전단지가 눈에 띄어 셔터를 눌렀다. 나랑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며...

설계는 때려치고 사진이나 찍자! (2006)

  
 해가 떠있는 동안의 짧은 외출도 잠깐, 이내 다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매 학기마다 자리 배치가 바뀌는 스튜디오. 지금은 휴학생이라 내 자리도 없고, 책상도 제각각 위치가 달라져 버렸지만 거의 매일같이 지키고 앉았던 정겨운 그때의 책상을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4년동안 꽤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는데, 사진 속 저 주택은 아직도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프로젝트로 기억된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자그마한 작업실을, 그것도 증축으로 설계하는 프로젝트였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책상에서 책 잡고 공부할줄만 알았던 나에게 다짜고짜 도면을 그리고 설계를 하라는 교수님의 주문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것 같다. 그때는 너무 힘들고 괴로웠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것도 다 추억이더라.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지 (2006)


 괴로웠던건 나 뿐만은 아니었나보다. 보다보니 이런 재미있는 사진도 발견된다. 하라는 설계는 안하고 스튜디오에서 화투를 치고 있다니...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이때 야식으로 보쌈도 시켜서 술도 한잔씩 했던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진 속 친구들의 표정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설계의 고통을 잊기 위한 현실도피 였을까.


한때의 로망이었던 스트라이다, 지금은 내 곁에 있다 (2006)


 수업가는 친구들을 찍어주기도 했었다. 어두컴컴한 스튜디오 안에서는 아무래도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을테니 밖에 나갈일만 있으면 무조건 한 장이라도 찍으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스트라이다를 처음으로 구입해서 인기를 끌었던 친구. 누렁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고 애지중지 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지금은 나도 스트라이다 유저가 되어있다. 그때도 너무 사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아 4년이 흘러 이제서야 그 작은 소망을 이뤘다.

어휴, 저 익숙한 풍경을 다시 보게 될줄이야 (2006)


 사진 속에서 앳된 얼굴을 하고 있던 철없는 1학년 새내기들은, 시간이 흘러 지금은 어느새 유학, 취직 걱정을 하는 졸업한 엉아, 언니들이 되어있다. 나역시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얼굴도 더 멋지게 변하고, 옷차림도 훨씬 세련되 졌지만 너저분한 모형, 지저분한 작업실, 그 속에 앉아 열심히 30도 칼을 잡고 있는 모습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 다시 4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순간을 영원으로'라는 오래된 필름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진부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사진의 의의를 더 잘 설명하는 말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순간을 영원으로, 그리고 그 영원을 소중히 간직하는 작은 즐거움. 사진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한 이유다.

 

하늘높이 점프! 첫 롤의 마지막 한 컷 (2006)


 4년 전의 소소한 일상이 가득 담긴 필름 첫롤. 그 속에 담겨있는 나의 성격, 나의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저 높은 농구 골대를 담은 사진 처럼, 손으로 만질수는 없지만 그 목표를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나의 모습. 어쩌면 지루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사진 속에 담겨있는 나의 일상들은 그 노력의 한 순간,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낸 소중한 발자취다.

 첫 롤의 설레임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찍는 사진은 또 내일의 과거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사진을 찍고 있는가. 어떤 꿈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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