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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겁고,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키스 처럼 달콤하다' - 탈레랑

 그는 짧은 한 문장으로 커피를 묘사했다. 티스푼 네 개 분량의 원두와 한 잔의 물이 만들어 내는 마법, 커피. 이 악마의 음료는 어느새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탈레랑의 묘사 처럼 커피 한 잔에는 수많은 맛과 향이 담겨있다. 처음엔 혀끝이 찌릿하도록 쓰다가도 이내 새콤한 향이 입안을 맴돌다가, 목구멍을 타고 흐른 뒤에는 달콤한 뒷맛이 여운처럼 남는게 바로 커피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기쁨, 슬픔, 고통, 환희, 모든 감정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달콤한 커피향은 추억을 만드는 묘약이다. 그래서 또한 여행하며 마셨던 커피의 맛은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정열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 이곳에서는 하늘마저 생기가 넘친다


 하늘빛이 참 좋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 올라가니 나이로비 시내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따금씩 보이는 조각 구름들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하늘 아래, 도시의 소음은 잠시 잊어도 좋았다.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 슬슬 다가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짧지만 강렬했던 여행을 함께 하며 동고동락했던 후배녀석은 많이 지쳤는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홀로 난간에 걸터 앉아 '어떻게 하면 마지막 저녁을 근사하게, 또 잊을 수 없게 만들어 줄까' 하고 생각에 잠겨본다.


바쁘게 돌아가는 나이로비의 일상 풍경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수많은 차들 사이로 바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들 처럼 꿈틀거린다.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표정,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저 멀리 한국에서든 이 곳 나이로비에서든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인데. 선입견이라는게 참 무섭다. 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아프리카라고 하면 그저 티비에서 보던 시골 마을,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만 떠올리고 있었으니... 짧았던 이번 여행에서 가보지 못했던 많은 도시들, 지나쳐 버린 수 많은 풍경들 또한 영원히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내 머리속에서 막연한 허상으로만 존재했던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을 지울 수 있었던것 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은 것만 같았다.


옥상에 올라 바라보니 나이로비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늘이 더 어두워 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나이로비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케냐 AA 원두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말이다. 겨우 커피 한잔인데 말이 참 어렵다. 내 혀가 둔해서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커피의 맛 보다는 그 기분, 커피의 본 고장에서 여유롭게 한잔을 즐긴다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기 더 컸기 때문에.

나이로비 자바 하우스. 고심 끝에 선택한 커피숍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JAVA HOUSE를 찾았다. 번화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종로3가쯤에 있는 커피숍쯤 되려나. 사실은 좀 더 매니악한 작은 커피숍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시간도 별로 남지 않고, 또 나이로비가 워낙 넓은 탓에 론니 플래닛에서 추천하는 가장 가까운 이곳을 찾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이로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커피숍이란다. 커피의 본 고장 케냐에서 자웅을 겨룰 정도라니 믿고 들어가보기로 했다.

웃지 못할 헤프닝을 만들어 주었던 알쏭달쏭한 메뉴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진한 커피향이 코 끝을 스친다. 여름날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어우러져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케냐 AA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House Coffe 한잔의 가격은 90 케냐 실링. 한국에서는 꽤 비쌌던 걸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환율을 얼른 계산해보는데, 90 케냐 실링이면 우리돈 1300원 정도다!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커피숍 중에서 가장 싸다는 맥카페에서도 한잔에 1500원인데 이정도면 거진 거저먹는 기분이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세 잔을 주문했다. 가격도 마음에 드는데 서비스는 더욱 좋다. 아랫층에 내려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서빙까지 해주겠단다. 습관처럼 카운터 옆에 서서 쟁반을 들고가려고 준비하던 내가 못내 무안해져버렸다.

 여기서 작은 헤프닝 하나! 가격을 계산해보니 너무 싸길래 처음에는 House Coffee가 케냐 AA 원두를 쓰지 않는줄로만 생각했다. 메뉴판 왼쪽에 적힌 케냐 AA라는 글씨를 가르키며 저걸 먹고싶다고 말했더니 점원이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알고보니 왼쪽에 써있던 메뉴는 커피가 아니라 로스팅된 원두를 봉지에 담아 파는 가격. 엉뚱한 곳을 가르키며 케냐 AA를 연발하는 나를, 원래 커피 가루를 씹어서 먹는걸 즐기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웃은 건 아닐런지. 허허허... 알고보니 이곳의 모든 커피는 케냐 AA 원두를 기본으로 사용한단다. 난 그것도 모르고... 커피도 잘 모르는 서울 촌놈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였다^^

케냐 AA 원두의 깊은 향을 함께 느껴보시겠어요~?


 새하얀 커피잔에 다소곳하게 놓여진 커피가 드디어 나왔다. 생각했던 것 보다 양도 충분하고 향도 너무 좋다. 드디어 잔을 들고 감격적인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음, 이럴때면 꼭 내가 소믈리에라도 된 것 마냥 손가락이 오글거리는 유치한 멘트가 머릿속을 멤돈다. 나는 바리스타도 아니고 커피를 자주 즐기는 편도 아니기에 비교하기가 조금 어렵긴 하지만... 내가 마셨던 다른 커피들 보다는 좀 더 맛이 진하고 신맛이 더 강하달까. 진하다는 표현을 바리스타들은 바디감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치면 이 커피는 바디감이 무거운 커피쯤 되려나.

카페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우리들이 신기한 모양이다


 남자 셋이서 커피 한잔씩 앞에 두고 간만에 수다를 즐겼다. 아까 점심 때도 느꼈던 건데 이런 깔끔한 식당이나 상점에서 제일 안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누더기처럼 걸친 영락없는 여행자의 행색. 하지만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다들 단정하고 깔끔한 회사원처럼 보인다. 오히려 우리쪽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 사람들. 이것 참 부끄럽게시리... 좀더 이쁘게 꾸미고 올걸 그랬나보다.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앉아 커피 한잔을 더 마셔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달콤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후배녀석은 아무리 그 유명한 케냐 AA라고 해도 입맛에 영 아닌 모양이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워버린 내가 그 녀석 남은 커피까지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고 또 한잔을 더 사서 손에 들고 카페를 나섰다. 이거 오늘 잠은 아무래도 다 잔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 가까이 있는 작은 바에 앉아서 마지막 밤을 즐겨본다


 어느새 해가 지고 금새 거리가 한산해졌다. 치안이 안좋기로 악명높은 나이로비(Nairobi)의 또 다른 이름은 'Nairobbery(robbery:강도, 약탈).' 그만큼 범죄 사건이 많고 위험한 도시라 여행자들은 어두워지면 가급적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듣곤 한다. 소심한 탓에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밤거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하지만 마지막 밤을 방에서 얌전히 있다가 잠들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사람 심리가 원래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지는 법. 그래도 멀리까지 가지는 않고 대신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바에서 마지막 밤을 즐기기로 했다. 이정도면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도망갈 수 있겠지하고 생각하며...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크게 틀어 놓은 음악이 쿵쿵거린다. 스피커 상태가 하도 좋지 못해서 DJ가 하는 멘트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리듬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여행의 추억, 그리고 아쉬움. 모든 것들을 털어놓으며 이제는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두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맥주처럼,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또 열심히 내일을 향해 살아야 겠지.

 잠보! 맘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들, 잠깐만 같이 이야기를 나눠도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들, 모든 것들이 너무나 그립고, 또 아쉽다. 아까보다 조금 더 커진 스피커 음악 소리에 이제는 옆 사람 말소리조차 잘 들리질 않는다. 테라스 난간에 혼자 몸을 기대고 밤바람을 맞으며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그토록 뜨거웠던 아프리카지만 왠지 오늘 밤 만큼은 춥고, 또 왜이리 시리토록 아프게 느껴지는 걸까.
(끝)



맘보! 언젠간 다시 또 찾아 올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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