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웹상에서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자욱한 안개 위로 깎아지는 듯한 높은 절벽이 날카롭게 이어지는 풍경으로 기억된다. 그 사진은 실제 영국 어느 지역에 있는 '하얀 절벽'이라는 곳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진을 더 찾아보니 맑은날의 풍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두어시간 거리에 있는 호까곶(Cabo da roca) 또한 여느 해안 절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세상의 끝'이다. 적어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의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포르투갈 서쪽 해안선에서 대서양을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다. 꽤 의미 있는 장소이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갈..
금강의 둘째 날 하늘 역시 맑았다. 아침나절엔 바람도 제법 선선하게 불어오는 것이 자전거 타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었던 부여에서 금강 하굿둑이 있는 군산까지는 아직도 70km 정도 남아있다. 하지만 바람도 없고 길도 좋아 큰 무리 없이 예정대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운 터라 아침은 가볍게 먹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커피를 샀다. 학생 때는 커피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회사에 다니면서 부터 확실히 늘었다. 평소엔 아주 연하게 내린 원두커피를 여러 번 푸짐하게 먹는 걸 좋아하지만 길 위에서만큼은 달달하고 걸쭉한 게 끌린다. 부소산성 근처에 숙소에서부터 남쪽으로 부여 시내를 가로질러 곧바로 금강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차도 ..
퇴근길에 외투를 벗어 손에 들었다. 정말 봄이 오려나 보다. 일부러 몇 정거장 전에 버스를 내려 밤공기를 쐬며 걸었다. 간만에 여유가 생기니 차곡차곡 밀려있는 여행기들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도 교환학생 시절의 유럽 여행기는 리스본의 차디찬 겨울에 머물러 있다. 마침 그 무렵 아팠던 터라 즐거운 기억도 딱히 없었다. 써지지도 않는 글 때문에 스트레스받기엔 아까운 밤이다. 작년 추석, 그러니깐 9월 초 날씨가 딱 지금 같았다. 기분 좋을 만큼 시원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 자전거를 타기엔 더없이 완벽한 조건이다. 물론 그 좋은 계절을 그냥 흘려보낼 리 없는 우리였다. Y와 난 추석 명절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대로 경부선 하행 기차에 올랐다. 연휴를 이용해 1박 2일로 짧게 다녀오는 라..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하도 푸지게 먹고 놀아서인지 몸이 무겁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여행하며 이렇게 마음 편히 놀고먹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스무 살 멋모르고 떠났던 첫 유럽여행에선 여유보다는 의무감이 앞서곤 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곳을 들르고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땐 그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맞이한 두 번째 유럽 여행은 더욱 즐겁고 풍성하기만 했다. 특히나 포르투갈에서의 짧은 일주일은 그 절정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의 여행은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여행하며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 아침 메뉴는 내가 제안한 프렌치토스..
전에 국토종주 여행기를 올리던 당시 학교 선배가 링크하며 붙여준 한 줄의 코멘트가 생각난다. '여행기도 여행기지만 가끔 등장하는 맛집투어가 일품'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정확히 보셨다. 어쩌면 우리가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목적은 전국의 산해진미를 맛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면에서 1편의 제목 '담양 죽통밥에서 나주 곰탕까지'는 이 여행의 정체성을 참으로 잘 드러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질세라 둘째 날 여행의 제목은 '비는 쫄딱 맞았지만 목포에서 산낙지'다. 가방을 잃어버려 광주 터미널까지 다녀온 일이나, 나주를 코앞에 두고 펑크 때문에 고생한 일, 밥 먹을 데가 없어 펑크난 자전거로 나주 시내를 빙빙 돌았던 기억. 이 모든 고생스런 여정에도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브라보. 설 연휴를 틈타 1박 2일간의 영산강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거리도 그럭저럭 괜찮고 일정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 힘들고도 처량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자가 정비능력의 향상과 함께 겸손함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면 그냥저냥 흘려보냈을 연휴를 알차게 즐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여행하며 틈틈이 맛보는 산해진미는 덤이다. 순서상으로는 이미 작년에 마친 북한강, 금강 종주에 이어 '4대강 종주' 카테고리의 맨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매번 오래된 여행기만 끄집어내다간 생생한 추억마저 잊혀질까 해서 영산강 부터 적어보려 한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오늘은 무려 5일간의 꿀맛 같은 설연휴 후의 첫 월요일이다...
텅 빈 캔버스 위에 도시를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우선은 배경, 코발트빛 하늘, 7개의 언덕, 푸른 강물 정도면 될 것이다. 다음은 세부적인 것들을 그려야 할 차례. 알록달록한 집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 사람들이 햇빛을 쬐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광장... 이 정도면 경치는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무엇인가 상징물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처럼 생긴 다리, 마누엘 양식의 작은 탑, 하얀 돔을 그려 넣어보자. 자, 이정도면 완벽하다. 이제 한발짝 물러서서 방금 그린 걸작을 한 번 살펴보자. 이것이 바로 리스본이다. -론니플래닛 스페인&포르투갈편 823p. 줄곧 스페인에 대해서만 써오다가 갑작스레 포르투갈 이야기를 꺼내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익숙한 책 한권을 펼쳤다. ..
입사 2년차 중반에 접어들던 지난 초여름, 처음으로 혼자 주택 설계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대상 부지를 답사를 시작으로 사례조사와 대지분석, 기본설계 제안까지의 초기 과정은 학교에서 하던 설계스튜디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계획안이 어느정도 잡히고 본격적으로 공사용 도면을 그리는 실시설계가 진행되면서 부터는 난생 처음해보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시간이 오래걸리는건 물론이고 마음고생도 심했다. 다행히도 이제는 설계가 거의 마무리되어 착공을 준비하는 중이다. 건축에서 도면은 설계자의 생각을 시공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다.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는 물론이고 창호도, 내부전개도, 화장실상세도, 천장도, 우오수계통도 등 수 많은 종류의 도면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