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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설 연휴를 틈타 1박 2일간의 영산강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거리도 그럭저럭 괜찮고 일정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 힘들고도 처량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자가 정비능력의 향상과 함께 겸손함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면 그냥저냥 흘려보냈을 연휴를 알차게 즐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여행하며 틈틈이 맛보는 산해진미는 덤이다.


 순서상으로는 이미 작년에 마친 북한강, 금강 종주에 이어 '4대강 종주' 카테고리의 맨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매번 오래된 여행기만 끄집어내다간 생생한 추억마저 잊혀질까 해서 영산강 부터 적어보려 한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오늘은 무려 5일간의 꿀맛 같은 설연휴 후의 첫 월요일이다. 휴식이 길었던 만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대학생 시절엔 명절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설날은 겨울방학 중에 있었고, 추석은 늘 중간고사 직전이라 되려 더 바빴던것 같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맞이하는 연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어떻게 하면 짧은 연휴에 더 많은 추억과 즐거움을 만들어볼까 고민끝에 작년 추석땐 1박 2일간 금강 종주를 다녀왔다. 같은 맥락에서 올해 설에는 영산강 종주를 하기로 오래 전부터 벼르던 참이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설날이 지나가고,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 일찍 고속터미널행 지하철에 올랐다. 준비는 완벽했다. 지난 국토종주때 미처 펑크를 대비하지 못해 고생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은 덕분이다. 가방 속에 펑크패치는 물론이고 아예 새 튜브까지 한세트 챙겨 넣었다.



상경하는 차량들 사이로 거침없이 달려 담양에 도착했다.


 서울 호남터미널에서 8시 10분에 출발한 버스는 예정된 11시가 조금 지나 목적지인 담양에 도착했다. 아참, 이번 종주 역시 친구 Y와 함께다. 영산강까지 함께하면 비로소 국토종주, 4대강 종주를 모두 함께한 것이 된다. 출발을 앞두고 날씨가 추우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나에게, 그는 '추위 따위에 굴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지!'라며 당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감은 담양을 채 떠나기도 전에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주섬주섬 자전거에 짐을 챙기는데 Y의 가방이 없는게 아닌가. 그리 넓지 않은 터미널이었지만 우리가 타고온 버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수소문 끝에 문제의 버스와 Y의 가방은 최종 목적지인 광주를 향해 달리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져버렸다.



가방을 떠나보내고 허탈한 표정의 Y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가방을 놓고내렸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기사님께서 광주 터미널 사무소에 맡겨 주시기로 하셨다. 언제쯤 가방을 찾으러 올거냐는 직원의 물음에 '자전거를 타고 갈거라 좀 걸리것 같아요'하고 대답하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우리가 오늘 달릴 영산강 종주 자전거길은 다행스럽게도 광주 일부를 통과하게 되어있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종주로에서 터미널까지는 왕복 10km 정도를 추가로 타야했다. 조금 서두르면 가방도 찾고 일정도 소화할 수 있을것 같았다.



담양 시내는 나들이 나온 인파로 북적였다.


 어느덧 시계는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지만 담양댐까지 왕복 20km를 먼저 다녀온 후에 죽녹원 근처에서 대통밥을 먹기로 했다. 설 연휴라 그런지 시내쪽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날씨도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 오리털 패딩을 껴입고 있었는데 훌훌 벗어버리고 가벼운 바람막이 하나만 걸쳤다. 가방사건의 전말은 어느덧 성큼 다가온 봄기운에 저절로 잊혀지고 있었다.



멀리 담양댐이 보인다. 인증센터는 댐 아래쪽에 있어서 업힐은 없다.


 왕복 20km면 한시간 남짓해서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생각만큼 속도가 붙지를 않았다. 시뻘건 아스콘 포장을 해놓은 구간이 많았는데 무른 재질이라 바퀴가 푹푹 박혀서 힘이 배로 들었다.

 '댐'이라는 이름이 붙어 혹여 남한강 종주의 종착지인 '충주댐'에서 처럼 바짝 오르막이 있을까 걱정했으나 고도는 평탄한 편이었다. 오랜만에 라이딩(정확히는 올해의 첫 라이딩)이라 유난히 힘이 들었던걸 빼면 딱히 볼거리도 없고 기억에 남는게 별로 없었던 길이었다.



겨울의 메타세쿼이어길은 어쩐지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담양댐에 도착해 종주의 시작을 알리는 스탬프를 찍었다. 다시 담양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두 번째 인증센터인 메타세쿼이어길에 들렀다. 이 곳에서 갈라지는 다른 길을 따라가면 곧장 섬진강 종주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2008년 수학여행으로 처음 들렀던 이후 무려 7년만에 다시 찾은 메타세쿼이어길. 그땐 한 여름이라 푸르른 이파리들로 장관을 이뤘었는데 겨울에 보니 감동이 좀 덜한것 같았다.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라 앞에서 간단히 기념사진만 찍고 다시 출발했다.




죽녹원 근처 식당에서 대통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생각보다는 평범한 맛...


 두 시가 가까워서야 점심상에 앉았다. 원래 죽녹원 근처에 찍어둔 식당이 몇 곳 있었는데 연휴라 문을 닫았거나, 손님이 너무 많아 아예 기다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곳도 있었다. 연휴라서 사람이 많을거라는걸 미처 생각 못했다. 근처에 괜찮아보이는 다른 식당이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아 댓잎 막걸리와 대통밥 정식을 시켰다. 음식 맛은 그저 그랬는데 막걸리 안주로 함께 나온 사진 속 죽순 무침이 아주 일품이었다. 돌아와서 알아보니 저 대통밥의 대통을 기념품으로 가져올 수도 있다던데. 아쉬워라.





영산강 자전거길은 대체적으로 노면상태가 매우 안좋다.


 담양 시내를 벗어나 영산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딱히 볼것도 없고 길의 선형도 단순해서 지루한 라이딩이 계속되었다. 재미있는건 담양이라 그런지 가로수 처럼 길 옆으로 대나무들이 자주 보였다. 그러고보니 영산강 종주길은 전반적으로 노면 상태가 안좋은 곳이 많았다. 어느 특정 구간 할것 없이 비포장 길이나 고르지 못한 바닥이 번갈아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아예 공사가 끝나지 않아 임시 우회로를 만들어 놓거나 질척한 흙길이 그대로 방치된 경우도 꽤 있었다. 함께한 친구 Y처럼 산악자전거를 타기엔 큰 문제가 없지만 도로용자전거를 타기엔 다소 불편한 점이 많았다.




마침내 광주 터미널에 입성했다. 감격의 순간.


 영산강을 따라 달리던 중 광주 시내로 지름길을 이용해 들어왔다. 지도를 열심히 찾아가며 광주 시내를 누빈끝에 드디어 광주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미 시간은 다섯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출발 전 간단히 계획을 세울때만 해도 광주에 가면 5.18 기념공원 정도는 들러봐야겠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설 다음날이라 그런지 터미널 근처에는 차도, 사람도 참 많았다. 둘다 서울 촌놈이라 명절 기간의 상경하는 터미널 모습을 보는게 처음이었다. 비록 시내 관광은 못해도 난생 처음보는 터미널 풍경은 재미있는 구경이었다.


가방(속에 들은 양갱)을 되찾은 Y의 세레머니!


 홀로 버스에 남아 생이별을 해야만했던 Y와 가방은 그렇게 극적으로 광주 터미널에서 상봉했다. 가방을 되찾은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더니 저렇게 가방을 씹어먹는 세레모니를 보여주었다. 가방의 내용물 중 양갱이 제일 그리웠던 모양이다. Y는 광주까지 달리는 내내 가방을 찾으면 내가 깜짝 놀랄 선물을 주겠다고 선언했었다. 알고보니 가방엔 양갱 말고도 천혜향이 하나 들어있었다. 열심히 시내를 헤메느라 지친 심신을 새콤한 과즙으로 잠시 달래며 쉬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나주까지는 30km 정도가 남아있다. 과연 해가 지기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광주를 빠져나오면서 급격하게 체력이 하락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건 아니겠지...


 광주천을 타고 다시 영산강 본류에 진입했다. 어느덧 해는 수평선에 가까워져만 가고, 우리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가방에 들어있던 양갱 여섯개는 두 시간이 채 안되어 모두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가 좋은 에너지원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둘다 올해의 첫 라이딩이기도 하고, 국토종주의 경험때문에 자만해서인지 미리 테스트 라이딩이나 준비운동을 제대로 못한 탓도 있었다. 팔이며 엉덩이가 아주 그냥 비명을 지르는것 같았다.


해는 지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 지는데...


어째 같은 길을 계속 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안에 나주까지 갈 수 있을까...


 길은 또 어찌나 지루하던지. 하다못해 강물을 따라 굽이굽이 도는 맛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건 활주로도 아니고 직진, 또 직진이다. 풍경에 변화가 없으니 제자리에서 헛발질 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나주를 꽤 남겨두고 승촌보에도 못가 해가 지고 말았다. 설마 1박 2일 여정에서 야간 라이딩은 없겠지 하는 생각에 성능 좋은 라이트를 챙겨오지 않았다. 급한대로 깜빡이용 비루한 LED 불빛에 의존해 조금씩 나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승촌보 인증센터를 지날 즈음엔 이미 칠흑같은 어둠...


 완전히 깜깜해져서야 겨우 승촌보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나주 시내까지 약 5km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딱히 주변에 큰 마을이 없기에 숙소를 잡기 위해서는 나주까지 가야만 했다. 밤눈이 어두눈 Y를 대신해서 내가 앞장을 서서 어둠 속을 뚫고 천천히 달리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저녁시간도 훌쩍 지났다. 오늘 밤에는 나주 근처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숙소를 잡고 삼합에 막걸리 한잔 딱 하기로 했었는데 이미 불가능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영산포까지는 나주 시내에서 다시 5km를 더 가야만 한다. 욕심 부리지 말고 시내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러나...


아... 설마 했는데...


 결국 펑크가 났다. 나주 시내까지 2km 남짓 남겨둔 곳에서 말이다. 제대로 된 라이트가 없어 바로 앞에있는 도로 틈을 보지 못하고 바퀴가 걸린 것이 화근이었다. 노면 사정이 엉망인 것에도 화가 났지만 일차적으로는 야간 라이딩을 제대로 준비못한 내 잘못이 컸다. Y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가방을 두고 내리면서 부터 꼬여버린게 아니냐며 자책했다. 다행인 것은 국토종주의 교훈 덕분에 펑크를 수리할 준비를 완벽히 하고 왔다는 점이었다. 자리를 딱 잡고 앉아서 핸드폰 불빛으로 열심히 비춰가며 튜브를 갈았다. 그런데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새 튜브에 바람이 들어가질 않는다. 알고보니 교체하는 과정에서 새 튜브에도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서툰 수리공들이 가끔 이런 실수를 범한다던데 나 역시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 시간 가까이 길바닥에서 낑낑댔으나 결국 펑크난 채로 2km를 더 타고서야 나주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도 수리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분했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을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일단 주린 배는 채워야 하니... 나주에서 맛보는 나주곰탕과 잎새주!


 나주 시내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펑크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몇 바퀴 돌았지만 문을 연 밥집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연휴라 그런건지 식당 자체가 몇 안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가까스로 터미널 근처 곰탕집을 찾아 들어가 뜨끈한 곰탕 국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주변에 마땅히 술 한잔 할 곳도 없어보여 그냥 앉은 자리에서 소주와 수육을 더 주문해서 먹었다.

 당장 걱정이 되는건 내일 일정이었다. 나주에서 목포까지 남은 거리는 80여 km인데 근처 자전거포가 몇 시에 문을 여는지에 따라 출발 시간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종주를 마친 후 버스로 서울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못해도 오후 다섯시 근처에는 목포를 출발해야 했다. 이 머리아픈 고민 속에서도 수육과 곰탕은 너무 맛있었다....정말.




자가수리의 꿈도 물건너가고...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고민은 내일 하기로 하고 여관에 짐을 풀렀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정신이 좀 들었다. 혹시 펑크패치로 튜브를 수리할 수 있을까 했지만 아까 펑크난 채로 타고다닌 덕에 튜브는 물론 타이어까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자전거포가 일찍 열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뜨끈한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니 피로가 단번에 몰려왔다. 그래도 간만에 여행인데 나가서 맥주라도 한잔 더 할까 하다가 둘다 포기하고 불을 꺼버렸다. 밤 열한시도 채 안된 이른 시각, 우리는 완전히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계속)



영산강 종주 1일차 (담양→나주)

주행거리: 55.7km

주행시간: 3시간 41분

평균속력: 15.1km/h

최고속력: 37.4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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