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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캔버스 위에 도시를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우선은 배경, 코발트빛 하늘, 7개의 언덕, 푸른 강물 정도면 될 것이다. 다음은 세부적인 것들을 그려야 할 차례. 알록달록한 집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 사람들이 햇빛을 쬐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광장... 이 정도면 경치는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무엇인가 상징물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처럼 생긴 다리, 마누엘 양식의 작은 탑, 하얀 돔을 그려 넣어보자. 자, 이정도면 완벽하다. 이제 한발짝 물러서서 방금 그린 걸작을 한 번 살펴보자. 이것이 바로 리스본이다. -론니플래닛 스페인&포르투갈편 823p.


 줄곧 스페인에 대해서만 써오다가 갑작스레 포르투갈 이야기를 꺼내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익숙한 책 한권을 펼쳤다. 세계적인 여행서적인 론니플래닛의 포르투갈 리스본 장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단어들의 열거일 뿐이지만 정말 완벽하게 리스본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본 리스본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을 넘을 즈음 멀리 아침해가 떠올랐다.


 전에 글에서도 한번 밝혔던 것처럼, 당시 세계일주 중이었던 신현재라는 친구와, 스페인에 교환학생으로 와있던 나는 마드리드 내 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동서남북으로 한 번씩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는 자그마한 계획을 실행중이었다. 그 중 지난 글의 꾸엔까(Cuenca)와 발렌시아(València)가 '동부'에 해당했다면 이번 글의 포르투갈은 '서부' 행선지에 해당한다.


 4박 5일정도 일정을 잡아 리스본과 포르투를 돌아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드리드에서 리스본까지는 밤새 국경을 넘어 달리는 야간 열차가 한 편 있지만 유레일 패스 없이는 가격이 너무 비싸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출발 당일 밤, 현재는 밤기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난 이른 새벽 비행기 시간까지 노숙을 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침 9시, 리스본 오리엔떼(Oriente) 역 맥도날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마드리드를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급하게 또 택시를 잡아탔다.


 밤새 공항 바닥에서 비몽사몽 하다가 새벽 5시경 비행기를 탔는데 그마저도 연착되어 기내에서 한참을 대기야해만 했다. 출국 게이트를 나올때에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 현재와 나는 핸드폰이 없어 약속장소와 시간을 못맞추면 리스본 여행 내내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약속장소까지 그리 멀지않아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면 되겠거니 하고 역을 찾는데... 없다? 알고보니 저가항공사가 내리는 곳이라 지하철이 연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에스따시온 오리엔떼!' 하고 외쳤다. 이른 아침이라 길은 한산한 편이었다. 요금은 6유로가 나왔고 무사히 오리엔떼 역 앞에 내렸다. 이제는 어제 구글맵에서 미리 확인해둔 약속장소, '맥도날드'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세장한 철골과 육중한 콘크리트가 이루는 구조적 조화


 리스본의 오리엔떼(Oriente) 역은 지난 글에 등장했던 스페인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Valls, 1951~)가 설계했다. 역사 내부는 전체적으로 그가 즐겨 사용하는 육중하지만 유연하고 동적인 콘크리트 구조 일색이다. 다만 눈길이 가는건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이었는데 굉장히 가는 철골 부재들을 조밀하게 엮어 얇고 가벼우면서도 되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침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플랫폼을 채우고 있어서 멀리 들어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천장 구조물에 여러번 반사되어 만드는 메아리가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사진으로는 그 몽롱했던 경적소리와 그날 아침의 분위기를 담을 수 없어서 그저 아쉬울 뿐이다.


요- 드디어 만났다 이놈!


 그렇게 역사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어가며 칼라트라바의 건축세계에 푹 빠져있던 중,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걸어보아도 현재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인 '맥도날드'가 보이질 않는게 아닌가. 분명 어젯밤 구글 지도를 켜놓고 정확한 위치까지 확인했지만 두 눈을 비비고 다시봐도 없었다. 하필이면 또 '거장'이 설계한 건물이라 역사 내부는 광대하리만큼 넓고, 또 복잡했다.

 벌써 몇 바퀴째 역사 주위를 돌던 중, 저 멀리서 익숙한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현재였다! 하마터면 포르투갈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길을 잃고 외톨이가 될 뻔 했었다. 우리만의 악수법으로 간단히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가는 길, 낯선 도시와 첫 인사를 주고 받는다.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같은 배낭여행자들은 으레 새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싼 숙소를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호스텔 닷컴을 뒤져본 결과 구시가 근처의 'NEXT HOSTEL'이라는 곳이 가격도 저렴하고 괜찮아 보였다. 일단 밤새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여기가지 오느라 지쳤으니 짐을 풀고 간단히 아침으로 뭐라도 좀 먹어야 움직일 힘이 날것 같았다. 

 호스텔로 가는 길, 가볍게 거리를 걸으며 포르투갈과 리스본에 대한 첫인상을 두 눈에 담아본다. 전체적으로 스페인과 상당히 닮아있지만 좀 더 낡고 오래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낡은 물건이 오히려 정이가는 것처럼 왠지모를 편안함 같은게 있었다.







아침을 먹고 쇼파에 녹아버린 현재... 행복해하는 저 표정 좀 보게나


 얼굴이 두껍고 붙임성이 좋은 현재가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운전수라면, 난 조수석에 앉아 지도를 보고 계획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난 처음 온 도시에서 길을 찾거나 지도를 보는데에 능숙한 편이다. 리스본에서 며칠 묵게될 호스텔까지 찾아오는 길도 단번에 성공. 방을 잡기가 무섭게 식당을 뒤져 남은 빵과 씨리얼로 주린 배부터 채웠다. 아침시간이라 체크인, 아웃하는 손님들로 카운터 근처가 제법 붐볐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식사를 끝낸 뒤 쇼파에 반쯤 누워 온 몸으로 망중한을 즐겼다. 


리스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좋은 친구, 28번 트램


 트램을 타기 위해 숙소에서 그리 멀지않은 정류장을 찾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7개의 언덕으로 구성된 리스본의 구시가는 길이 좁고 가파른 곳이 많아 다른 교통수단보다 트램이 인기가 좋다. 그 중에서도 주요 관광지들을 한 눈에 돌아볼 수 있는 28번 트램은 리스본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한번 타봐야 할 필수 노선이라고 한다. 아무리 리스본이 작다고 해도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무턱대고 아무데나 찾아가보기는 힘들 터, 트램을 타고 전체를 먼저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우리 말고도 정류장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침내 트램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줄을 서서 올라타야 할 만큼 많아졌다.




아름다운 트램 내부, 하지만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법...


 반질반질하게 손때묻은 목재 내장재에서 느껴지듯, 리스본의 트램들은 대부분 이렇게 오래전 원형을 유지 한채 2010년대를 달리고 있다. 내부 사진을 몇장 찍자마자 다음 정류장에 도착했고, 이내 가득 올라탄 사람들 때문에 카메라를 꺼내지 못할 정도로 내부는 비좁아져버렸다. 마치 출근길 2호선 신도림역을 떠올리게 할 만큼 사람들로 꽉 차있었는데 다들 창밖에 정신이 팔려 그리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나 역시 카메라를 꺼낼 수 없다는게 안타까웠을 뿐 덜컹거리는 트램의 리듬에 몸을 싣고 한창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지갑이 들어있는 주머니 근처로 뭔가 뜨거운게 쑥 들어왔다. 소매치기였다. 마치 목덜미를 스치는 뱀이라도 느낀것 마냥 내 몸은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말로만 듣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마치 가위 눌린것처럼 꽥 소리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내가 반응이 없으니 소매치기의 손이 더 깊게 파고 든다. 난 어찌할 줄 모르고 그냥 주머니 속 지갑을 꼬옥 쥐고 있었다. 이내 소매치기도 지갑을 빼낼 수 없다는걸 알았는지 포기하고는, 다음정거장에서 인파에 밀려 튕겨나듯 내려버렸다. 그제서야 소매치기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를 노려보고 있던 당당함에 오히려 살기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그 눈빛은 여러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쉬 잊혀지질 않는다.




아픈 기억도 잠시, 고즈넉한 리스본의 트램있는 풍경


 본래 28번 트램은 관광객들에게 유명해 사람이 많아 종종 소매치기가 발생하기로 유명하단다. 론니 플래닛에도 그렇게 써있는걸 미리 읽어봤었지만 정말 내 일로 닥치고 나니 경황이 없어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이 멍 해서 트램이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보니 어느새 알파마 지구의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니 좁은 골목길과 앙증맞은 트램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트램이 지나갈때면 꼭 댕-댕- 하고 종을 울리는데, 좁은 골목 사이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참으로 고즈넉하고 좋았다. 어느새 소매치기의 기억 또한 골목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리스본의 구도심 풍경


 트램길을 따라 몇 군데 조망점들이 소개되어있는데, 알파마나 구시가의 길이 하도 좁고 복잡하다보니 지도를 손에 들고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길을 따라 발걸음 가는대로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야가 탁 트이는 순간들이 오는데, 그때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붉은 지붕들의 향연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게 되었다.

 다시 트램을 타고 구시가의 다른 쪽으로도 갈 수 있지만 현재와 나는 그냥 정처없이 걷는게 좋아 트램길을 따라 언덕 아래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마치 트램처럼 좁은 골목을 자유롭게 누비며 언덕을 내려왔다.


 알파마의 골목길은 참으로 걷는 맛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볼거리들도 많고 호객하는 상인도 없어 이가게 저가게 기웃거리며 한가한 오후를 보내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흔히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박물관, 미술관, 성당 따위의 볼거리들이 너무 많아 이곳저곳 다 둘러보다보면 적장 이동하는 중간에 길 위에서 마땅히 봐야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리스본 역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볼거리가 산재해있지만(실제로 론니플래닛에도 각종 지도와 자세한 설명들로 구시가의 볼거리들을 잘 정리해두었다) 어쩐지 알파마의 골목길을 걷는 그 순간에는 손에서 책을 놓는게 맞지 싶었다. 나중에는 아예 포켓지도마저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햇볕이 따사로웠던 광장에서.


 언덕을 다 내려오니 자연스럽게 광장이 나왔다. 해변에 위치한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다. 걷는 내내 날씨가 참 좋았는데 광장에 들어서니 비로소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모두 참 하늘이 맑고 푸르른데, 마드리드의 하늘이 남성적이고 솔직한 푸른빛이라면 리스본의 그것은 바닷물을 한껏 머금은 여성적이고 수줍은 느낌이었다. 오죽 날이 좋았으면 지금 떠올려도 이런 낯간지러운 비유밖에 생각나질 않을까.

 볕이 좋은 날은 사진찍기도 참 좋은데, 그날 따라 광장에는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고있는 연인들이나 동호회 무리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거지꼴을 한 남자 둘이 서있는 우리쪽은 어쩐지 먹구름이 드리운 느낌. 영 흥이 나질 않아서 바다쪽으로 더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멀리 대서양으로 가버렷!


 어째 바다쪽은 더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 애꿎은 비둘기들만 날려보냈다. 에잇-

 많이 걸어서 그런지 배가 고파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있었다. 간단하게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들어가 휴식을 좀 하기로 했다. 벌써 몇 개월째 질리도록 여행중인 현재에게도 오랜만에 야간열차는 피곤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저녁장을 보며 거금좀 썼다... 과연 오늘의 메뉴는?


 잠깐 자고 일어난다는게 어느새 눈을떠보니 저녁시간이 되어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오늘은 숙소에서 잘 먹고 잘 자는 걸로 첫날 리스본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저녁까지 바쁘게 돌아다녔으면 모르겠는데 집에서 처럼 푹 쉬다가 외식하러 나가는것도 좀 그렇고 해서... 그냥 장을 봐와서 저녁은 호스텔에서 직접 해먹기로 했다.


일단 간 쇠고기를 팬에 익혀주고,


캬라멜 색이 되도록 양파를 잘 볶아준 다음에


간장을 넣고 살짝 볶아주다가


물을 부어 약한불에 은근히 졸여내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맛보는 규동 완성!


 오늘의 저녁메뉴는 '뜻 밖의 규동'이다. 메뉴가 정해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숙소 앞 까르푸에 들어가 이것저것 골라담으며 뭘 해먹으면 좋을까 물어봤더니 현재가 단번에 '규동이 먹고싶다'고 했다. 왜 리스본까지와서 하필이면 규동이냐(한국요리도 아닌데) 되물어보니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먹고 싶다'고 했다. 세계일주를 오래 하다보면 갑자기 포르투갈에서 규동이 먹고싶을수도 있겠구나 싶어 그냥 선심쓰는 셈 요리해주기로 했다.

 쓰던 재료가 있는 집에서면 몰라도 외지에 나와 별안간 요리를 하려니 돈이 좀 들었다. 일단 밥을 하기 위해 쌀부터 작은 팩으로 사야했고, 한 끼 식사를 위해 소고기며 양파, 간장까지 사야했기에 이왕이면 맛있었으면 했다.


의외로 맛있었던 규동, 잊지 못할 리스본에서의 기억.


 비록 비주얼은 좀 무식하지만 맛은 의외로 정말 '규동'이었다. 현재는 연신 맛있다고 외치며 두 그릇이나 싹 비워버렸다. 개인적인 생각에서는 아무 간장이나 쓰지 않고 일부러 일본간장을 골라서 사온게 유효했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리스본에서의 첫날밤은 맛있는 요리로 지친 마음을 달래며 아름답게 저물어갔다. '기-승-전-규동'의 어수선하고도 훈훈한 이야기였다. (계속)


덧. 최근 올리는 여행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신현재라는 친구는 글의 배경이 되는 3년 전에도 세계일주를 하는 중이었는데 2015년 지금 이 순간에도 남미 어느메를 여전히 여행중이다. 오늘 아침에는 메세지로 파나마 운하 사진과 함께 안부를 전해왔다. 힘든 여정 중에도 리스본에서 함께 먹었던 '뜻 밖의 규동'을 떠올려보며 잠시 웃음지어보길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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