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 국제공항 국내선 환승 터미널에 막 들어섰다. 감각적인 노출 콘크리트 벽체와 유리로 된 천장이 참 아름다웠지만 뜨거운 7월의 햇볕 때문에 어쩐지 후텁지근한 기분이다. 아내는 화장실에 들러 헛구역질을 하고 나왔다.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열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아내의 몸상태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번 여행의 출발지인 리용에는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다. 걱정스러운 마음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국내선 환승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내 아내의 손을 끌어당겼다. 늦지 않으려면 지금 뛰어야 한다. 이게 다 라 투레트 때문이다. 애초에 이번 휴가를 계획한 이유부터가 라 투레트를 보기 위해서였고, 긴 비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국내선을 한 시간이나 더 타야 했던 것도 라 투레트가 파리보다는 리용에서..
결혼을 하고, 나는 가장이 되었다. 이제는 늘 두 사람이 함께니 무엇을 하더라도 혼자일 때 보단 어렵고 힘이 든다. 하물며 여행도 마찬가지다. 철없던 연애시절엔 하룻밤에 5유로짜리 호스텔에도 곧잘 묵곤 했었다. 하지만 일 년에 단 한번 부부가 함께하는 여름휴가에 그런 숙소를 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리부터 세워보는 휴가 계획에는 비행기 값도 두 배, 식비도 두 배, 숙박비는 두배 플러스 알파로 계산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회사의 공식 여름휴가 기간은 주말을 합쳐도 단 6일이 전부였다.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우리 부부의 이번 휴가지는 멀리 가도 동남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난 올해 여름 꼭 '라 투레트'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말이야 쉽지만 프랑스까지 가려면..
'문화원'은 우리나라 밖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공공시설이다. 일반적으로 해외 주요 도시에 설립되어 문화예술행사 및 교류, 한국어 또는 한국문화의 강습 등 민간차원에서의 문화교류의 장으로서 활용되곤 한다.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공공 차원에서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것을 고려했을 때 대사관을 '아빠', 문화원을 '엄마' 정도로 비유해도 나름 적절할 것 같다. 2020년 현재 전 세계 27개국에는 총 32개의 한국문화원이 운영 중이다. 꼭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문화원을 접해볼 방법이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서울을 비롯한 한국 내 주요 도시에 같은 방식으로 문화원을 설립해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운현궁 옆에 위치한 일본문화원의 경우, 일본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각종 ..
'딱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걸' 쿠리치바에서 상파울루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애초에 며칠 일정 가지고는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딱 하루만 더 있었더라면 브라질리아 정도는 가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이 생겼다. 브라질리아는 미국의 워싱턴 DC,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시 같은 일종의 행정수도이다. 행정가도 아닌 내가 브라질리아에 가보고 싶은 이유는 순전히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 1907-2012)의 작업을 보고 싶어서였다. 명실상부한 브라질의 국민적인 건축가, 우리에겐 어쩐지 오스카 니마이어라는 발음으로 더 익숙하지만 근래 들어 포르투갈어 표기법을 따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브라..
채 일주일도 안 되는 빡빡한 출장 일정에도 굳이 쿠리치바를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내 의지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역만리 브라질 땅에서 상파울루에만 머물다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업무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딱 하루 정도는 어떻게 시간을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보지는 크게 세 곳. 모두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들로 대략 예상되는 일정은 아래와 같았다.1. Rio de Janeiro: 브라질 최대의 관광도시 리우의 거대 예수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2. Foz do Iguazu: 세계 3대 폭포라 불리는 이과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3. Curitiba: 전 세계 건축/도시/교통/행정가들의 참조도시, 쿠리치바를 답사한다. 관광을 목적..
불현듯 드니 빌 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Arrival, 2016)'가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전 세계 도심 상공에서 묵묵부답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괴 비행체 '셸(Shell)' 말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영화에서 세로로 긴 비행체를 가로로 눕혀 놓았고 곤충의 다리같이 뻗어 나온 4개의 기둥이 달려 있다는 점뿐이었다. 상파울루 미술관(MASP, Museu de Arte de São Paulo)의 첫인상은 이처럼 지구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경하고 이상했다. 이탈리아 태생의 브라질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 1914-1992)의 설계로 지난 1968년 완공된 이 미술관은 명실상부한 상파울루의 상징이다. 처음 이 건물에 대해 알게 된 건 정말이지 우연한 기회였다..
이번 브라질 출장길에 임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이전 과는 사뭇 달랐다. 지난봄 일본으로의 출장이 모형을 들고 가 설치하는 나름 단순한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엔 어찌 됐든 간에 '집'을 '지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이역만리 브라질까지 와 대나무로 집을 짓게 된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풋-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이번 출장은 그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하나같이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가로 1.8m, 세로 3m, 높이 6.5m의 2개 층 규모의 대나무 건축물' 이것이 이번의 내가 완수해야 하는 '출장의 목적'이다. 이 요상하게 생긴 건축물은 이미 서울과 도쿄에서 전시되었던 'DMZ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계된 것으로 당시 모형과 영상으로 선보..

너무나 아는 것이 없을 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허구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특히나 그 대상이 단순한 사물이 아닌 도시, 문화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상인 경우 사실은 더욱더 왜곡되고 실체와 멀어진다. 지금 나는, 출장을 떠나기 전 막연하게 가졌던 브라질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아프리카를 처음 여행하기 전에도 비슷한 실수를 범했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초원, 야생동물, 소수민족 따위의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대륙을 일반화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한복판에서 번쩍이는 고층 빌딩 숲을 마주했을 땐 스스로가 부끄러워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첫인상은 '도시' 그 자체였다. 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