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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난생처음으로 산장에서 맞이해보는 아침이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아직은 걸은 길보다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지만 어제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루트와 산장 정보를 살피던 중 한 문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라가주오이 산장은 해발 2,700m에 위치하고 있어 돌로미티 지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숙소입니다.'

 잔잔하던 내 마음에 순간 물결이 일렁였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 높은 곳도 많다. 당장 같은 알프스에 속한 스위스 융프라우만 해도 해발 3,500m까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기차로 올라갈 수 있고, 네팔에 가면 에베레스트를 바라보고 해발 3,800m에 우뚝 솟은 호텔도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00'이라는 숫자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건 내가 '한국인'이어서, 또는 '해발 2,744m의 백두산'을 최고봉으로 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헌법에서 분명 대한민국 영토로 선언하고 있음에도 남의 나라를 거치지 않으면 발조차 디뎌볼 수 없는 산. 그 산 덕분에 수 천 km나 떨어진 이곳 이탈리아에서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창 밖으로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 윈도우 바탕화면인 줄...

어제 하루 신세 톡톡히 진 라바렐라 산장의 전경

산장 옆으로는 이렇게 조그만 기도당도 마련되어 있었다.

 어제 하루는 그렇게도 날씨가 변덕스럽더니만 오늘은 제법 화창하다. 아니 겨우 '화창'이 아니라 햇살이 너무 좋아 '황홀'할 정도였다. 이런 하늘 아래서라면 멀리 바라다보이는 아찔한 기암괴석들도 몇 번이고 거뜬히 걸어서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침식사는 언제나 든든하게!

혹시 모르니 비상식량 또한 든든하게!

 출발하기 전, 어제 길 위에서 얻었던 배를 곪아가며 얻은 소중한 교훈을 떠올렸다. 오늘은 그보단 짧게 걸을 예정이지만 넉넉하게 준비한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아침 식사 때 제공되는 과자를 몇 개 더 챙기고 따로 매점에서 초콜릿도 샀다. 한국에서 들고 온 라면과 믹스커피도 여차하면 먹어치울 요량으로 배낭 제일 위칸으로 옮겨 담았다.

알타비아, 길 위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표정의 풍경들

오늘의 루트는 라바렐라 산장을 출발하여 라가주오이 산장(Rifugio Lagazuoi)까지 남쪽으로 이어진다. 걷는 내내 해발 2,000m 이상을 유지하게 되다 보니 넓은 고원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길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알타비아(Alta Via)'가 이탈리아어로 '높은 길'이란 뜻이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그 이름에 걸맞은 길을 걷게 된 셈이다.

 방향을 전환할 때마다, 또 고개를 넘을 때마다 시시각각 풍경이 변한다.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 봉우리의 모양도, 나무의 높이도, 풀의 색깔도 장면마다 각양각색이다. 나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높은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이 알타비아를 꼭 한번 걸어보길 추천한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동물 친구들 또한 알타비아의 매력이다.

알타비아의 드넓은 초원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동물 친구들과도 조우하게 된다. 가장 흔한 건 소였지만 운이 좋으면 간혹 말이나 양도 만날 수 있다. 야생동물은 아니고 자연 방사하여 키우는 가축들이다. 이 귀여운 친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거의 없다. 멀리서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선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길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듯 그윽한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자연에는 그들만의 섭리가 있는 것처럼 이곳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바로 정해진 길 위로만 다니는 것이다. 별다른 울타리나 안내문 같은 게 없음에도 어느 한 사람 어김이 없다. 이 멋진 풍경을 인간에게 허락해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스치듯 지나쳐갈 뿐이었다. 

이거 먹는거 아닌데...

맛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은 귀여운 친구가 있었으니... 아직 앳된 얼굴의 송아지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해 길 위에 서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쓰다듬어주려는 찰나, 혹시라도 사람 손을 타면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 주먹을 꽉 쥐어버렸다. 하지만 이 귀여운 작은 친구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달콤한 막대사탕이라도 먹듯 내 주먹을 입에 대고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사진으로도 담았다. 이렇게 길 위의 소중한 추억이 또 하나 늘었다.

대자연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자전거 여행객들

알타비아는 두 발이 아닌 두 바퀴로도 여행할 수 있다. 그날따라 유난히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 또한 둘째 날 루트의 특성상 대체로 평탄한 길이 많아서이지 싶었다. 비포장 산악 도로를 따라 중장거리를 달리는 자전거 종목을 '트레일(Trail)' 또는 'XC'라고 한다. 이런 지형에 적합한 자전거는 앞바퀴축에만 쇽업쇼바(Shock Absorber)가 달린 '하드테일 MTB'다.

 학생 때부터 줄곧 로드 사이클만 타던 나는 좁고 매끈한 도로가 아닌 대자연의 거친 길을 누비는 산악자전거를 눈 앞에서 본 게 처음이었다. 그리곤 그 매력에 이내 매료되어버렸다. 이때의 관심은 귀국해서도 계속되었고 결국 다음 해 경북 영주에 있는 경륜훈련원을 찾아 정식으로 산악자전거에 입문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 알타비아에 다시 가게 되면 꼭 MTB를 타고 가겠다는 야심 찬 꿈도 가지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V자 모양의 협곡이 앞으로 지나야 할 길이다.

협곡으로 오르는 길, 좀 전에 걸어왔던 푸른 초원이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 이를수록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풍경이 계속된다.

 길 한편에 앉아 샌드위치와 과일로 점심식사를 간단히 해결했다. 오늘은 중간에 들를만한 산장이 딱히 없길래 미리 준비해온 음식이었다. 이후 오르막이 시작되며 주변으로 별안간 풀과 나무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회색빛으로 가득한 황량한 돌산에는 사각사각 밟을 때마다 쉽게 으스러지는 석회암뿐이다. 

네 분의 멋진 친구들, 출장에서 돌아와 이 사진을 메일로 보내드렸다.

이번엔 나도 같이 한 장

정상에 올라 다소 황량한 풍경에 아쉬워하고 있는데, 별안간 멋쟁이 노신사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온 일행은 고등학교 동창들이고 오래전 약속했던 '알타비아' 트래킹을 마침내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알타비아를 걸으며 동양인을 본 건 내가 처음이라 그 사연이 궁금해 일부러 사진을 부탁하셨다는 말까지 덧붙이셨다. 

 나는 한국에서 온 건축가이고 밀라노 출장을 마치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하자 연신 '멋쟁이'라며 나를 비행기를 태우셨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분들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우린 찰나의 인연을 뒤로하고, 서로의 여행이 즐겁고 무사히 끝나길 기원하며 각자의 길을 향해 또 걷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바라본 산 반대편, 골짜기 아래로 예쁜 호수가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숫가의 풍경

잠시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연에 몸을 맡겨 보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 알타비아를 걸을 땐 딱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고갯길 정상을 지나자마자 다시금 깎아지는 듯한 내리막이 아찔하게 펼쳐진다. 저 멀리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짝거리는 호수가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는 수면을 향해 열심히 비탈길을 걸어본다.

 호숫가에 도착해보니 몇몇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대자연속에서 유유자적 즐기는 물놀이라니! 그 낭만적인 풍경에 끼어들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옷과, 신발과, 배낭을 모누 벗어던졌다. 수영복은 미처 준비하지 못해 운동용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뼛속까지 짜릿하게 시원했던 호수에서 망중한을 즐겼다.

이제 해발 2,700m까지는 직진, 또 직진이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전쟁의 참혹했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라가주오이 산장, 돌로미티에서 가장 높은 숙소다.

내리막이 다음은 다시 오르막이다. 호수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뒤로하고 라가주오이 산장까지 약 5km는 꼼짝없이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한다. 이 험준한 돌산은 남쪽으로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녔다.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단한 요충지이자 격전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군데군데 산을 파서 만든 감시초소와 천연 진지들이 보인다. 대부분 개방되어 있어 실제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웅크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굴속으로 들어가 작은 바위틈에 눈을 갖다 댔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웅장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 군인들은 개미보다 작은 적군의 움직임만을 살피느라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리라. 문득 서글퍼졌다.

오늘의 숙소는 어제보단 제법 구색을 갖췄다.

해발 2,700m에도 있을 건 다 있다.

이건 뭘까요?

출발한 지 일곱 시간 반 만에 라가주오이 산장에 도착했다. 내가 걸어온 북쪽에서의 접근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 산장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남쪽 절벽을 따라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사람들은 산 아래에 차를 대고 케이블카를 통해 편하게 올라와 하룻밤을 묵어간다. 또한 겨울철에는 내가 걸어온 북쪽 길이 그대로 천연 슬로프로 변신한다고 하니 스키어들에게도 인기 만점일 게 분명하다.

 이곳엔 케이블카 말고도 또 유명한 게 또 있다. 다름 아닌 '사우나'다. 아찔한 절벽 끝에 위치한 핀란드식 건식 사우나는 숙박객에 한해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입장을 위해선 수영복 착용이 필수다.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호수에서도 그랬고 산에서 이렇게나 수영복이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라도 이곳을 찾을 계획이라면 한 벌 꼭 챙겨가시길.

열심히 걸어온 나에게 주는 달콤한 포상 한 잔

멀리 보이는 구름과 산의 모습이 이 곳의 높이를 짐작케 한다.

  아직 저녁식사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핫초코를 한잔 시켜 테라스에 나와 앉았다. 산장 아래로 넓게 깔린 운해(雲海) 사이로 알타비아의 진행방향을 향해 겹겹이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의 루트도 아직은 이틀이나 더 남았으니 아마도 저 산들 사이로 한참은 더 걸어야만 하리라. 부족한 일정 탓에 끝내 완주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나의 길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위치를 가늠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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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 로그 - 알타비아(Alta Via 1) 둘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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