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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드리드 공과대학교의 2011년 2학기 공식 종강일은 12월 21일 수요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기 위해 독일 뒤셀도르프로 떠나는 내 비행기표 역시 12월 21일 출발이었다. 다른 과목들은 일찍이 종강을 했지만 한국에서도 늘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는건 설계스튜디오 과목이다. 강의 계획표 상에는 12월 19일 월요일 마감이었던게 어찌된 영문인지 21일 수요일로 일정이 변경되어버렸다. 마감 제출시간은 정오~오후 1시 사이, 뒤셀도르프로 가는 내 비행기표는 오전 11시 20분 출발. 결국 교수님께 따로 말씀드려 하루 일찍 마감을 하고서야 독일로 갈 수 있었다.

처음 타보는 라이언에어, 생각보다는 꽤 괜찮았다


 그렇게 마드리드에서의 교환학기 마지막 할 일을 끝내고, 치킨과 맥주를 곁들인 소박한 종강파티 뒤에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오전 11시 20분 비행기라 이른 시간부터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이언에어나 이지젯 같은 저가 항공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서 기내 수화물 규정을 생각하느라 짐을 싸고 풀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생각보다 번거롭지 않았다. 특별히 수화물을 검사하는 사람도 없고 그리 까다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Aeropuerto Barajas Madrid)을 출발한 FR4732편 비행기가 새하얀 구름 위로 올라서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더라. 마감하랴 종강하랴 정신없이 학기를 보내가다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으니 그럴법도 했다. 지난 한 학기를 찬찬히 되돌아 보기에는 뒤셀도르프까지의 비행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뒤셀도르프로 가는 라이언에어는 뷧쎄(Weeze)로 들어간다


 누가 저가항공 아니랄까봐. 독일 뒤셀도르프행 이라고 써 있는 비행기지만 실제 착륙한 공항은 뒤셀도르프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뷧쎄(Weeze, 독일어 발음을 들은대로 적었다) 공항. 라이언에어 혼자만 사용하는 아주 작은 공항이라 뒤셀도르프까지는 무려 14유로나 주고 버스를 타야 한다.

 뒤셀도르프가 아닌 뷧쎄 공항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돈을 내고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날씨가 이토록 흐리고 우중충한 줄은 미처 몰랐다. 분명 마드리드 공항을 출발할때만 해도 창밖으로 푸르른 초목들과 파란 하늘이 보였었건만, 뷧쎄 공항에 내리던 순간 창 밖으로는 잿빛 하늘과 채도 심하게 빠진 앙상한 나무들만 지나갈 뿐이었다. 그순간 새삼 다시 느꼈다. 스페인이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지.


파울네 집을 찾아가는 동안 네 번이나 길을 잃었다... 그것도 건축과 두 명이서 말이다


 한 시간이 넘 도록 달려 뒤셀도르프 중앙역(Hauptbanhof)에 도착했다. 사실 스페인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독일에 온건 순수하게 '크리스마스' 때문이었다. 마드리드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제일 가깝게 지냈던 독일인 친구 파울네 집이 바로 뒤셀도르프기 때문이다. 파울은 오래 전부터 크리스마스에 자기 집에 놀러오라며 날 초대했었고, 덕분에 기쁜 마음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앙역에서 파울네집까지 가는 길, 뒤셀도르프의 첫 인상


 그렇게 뒤셀도르프 중앙역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저녁 6시. 하지만 파울은 우리보다 더 늦은 비행기를 타고 오기로 되어있었다. 먼저 집에 찾아가 있으라며 친절하게 가는 길과 주소까지 알려줬지만... 막상 파울이 없는 파울네 집에 먼저 들어가 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도 떼울 겸 중앙역부터 파울네 집 까지 걷기로 했다. 라인강을 건너야 하고 무려 두 시간 가까이 헤메는 대 장정이었지만 덕분에 뒤셀도르프 지리에 훤 해졌다.


파울네 집 도착, 우리를 위해 작은것 하나까지 이토록 신경써주실 줄이야1


 혹시나 파울도 없는데 먼저 도착한 우리가 예의없게 보이면 어떡하지? 불편해하시면 어떡하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띵동'하고 벨을 누르는 순간 '할로(Hallo)!'하고 맞아주던 가비(파울네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찌나 반갑게 맞아 주시던지. 잠시나마 주저했던 우리가 바보같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파울네 집에 짐을 풀고, 독일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크리스마스 사다리에 우린이 이름으로 선물이 걸렸다


 다음날 아침. 마드리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있는 빵과 스크램블드 에그를 곁들인 아침식사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독일에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재미있는 풍습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사다리'. 총 24개의 발판으로 이루어진 사다리에는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아래부터 한 칸씩 선물이 달린다. 자기 이름이 걸린 선물이 달려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받으면 된다. 물론 누가 걸었는지는 비밀. 이날은 우린이 이름이 적힌 선물이 달렸다. 한 칸씩 올라가며 달리는 선물을 받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셈이다.

파울네 집 근처 산책에 나섰다. 일본 절에 들러서 한 장


 집 주변도 돌아볼 겸 산책을 나섰다. 파울네 집 바로 옆에는 꽤 큰 일본인 학교와 일본 절이 들어서 있다. 안그래도 전날 밤 중앙역 근처 거리에 즐비한 한, 중, 일 음식점과 식료품점들이 어쩐지 신기했었는데. 알고보니 뒤셀도르프는 독일 내에서 아시아 사람들이 제일 많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당연히 한국사람들도 많다.

 부슬부슬 비가내리는 영락없는 독일 하늘 아래, 독일인 남자 한명과 한국인 둘. 길가에는 학교에서 나오는 일본인 아이들 수 십명이 지나가는데 우리 셋은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있는 상황. 어쩐지 이 상황이 재미있어 속으로 혼자 한참을 웃었다.








파울네 집 주변 풍경, 비내리는 라인강이 나름 운치있다


 막 마드리드에서의 학기를 끝내고 독일에 온 터라 이날은 가벼운 산책을 끝으로 푹 쉬기로 했다. 겨우 비행기로 3시간 조금 못되게 날아왔을 뿐인데 어쩜 그렇게 마드리드와는 날씨가 딴판이던지. 처음 뒤셀도르프에 왔을때 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일 주일 가까이 계속 되었다.


오늘의 크리스마스 사다리에는 내 선물이!


 다음날 아침,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다. 변함없이 맛있는 빵과 버터, 스크램블드 에그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보니 오늘의 크리스마스 사다리에는 내 이름이 적힌 선물이 걸려 있다! 꽤 길쭉한 사다리지만 이제 겨우 남은 발판은 두 칸. 어느새 정말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다.



뒤셀도르프는 그리 크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 좋은 도시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뒤셀도르프 시내에 나가보기로 했다. 여전히 하늘에선 부슬부슬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그새 적응이 되어버렸는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파울네 옆 집에서 자전거 한 대 더 빌려서 집을 나섰다.


뒤셀도르프의 도시 풍경은 라인강이 만들고 있다


 파울네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라인강을 건너야 한다. 처음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밤, 한 손에 지도를 들고 두 다리로 열심히 건넜던 바로 그 강이다. 서울에는 한강이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마드리드에 비하면 뒤셀도르프의 라인강은 정말 큰 규모의 강이다. 그동안 마드리드의 작은 강(사실 강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냥 개천)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한강처럼 큼지막한 라인강이 제법 반가웠다.





뒤셀도르프에도 프랭크 게리 건물이 있는줄은 몰랐다


 뒤셀도르프의 라인강 강변에는 과거 항구로 쓰이던 조그마한 구역이 있다. 더이상 항구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서 이곳은 전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이 모여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변모했다. 프랭크 게리, 렌조 피아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다.





시내 번화가의 모습은 여느 유럽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더 시내 깊숙히 들어가면 일명 '뒤셀도르프에서 가장 비싼 거리'가 나온다. 각종 상점들이 가득 들어선 이 거리 역시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렇게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사뿐사뿐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즐기다 보니 사진은 별로 찍지 못했다. 뒤셀도르프. 사실 파울이 아니었다면 찾을 생각조차 안했을 법한 그런 도시다. 지금은 독일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옛 친구 한명도 '왜 뒤셀도르프에 갔어? 거긴 여행하러는 잘 안가는 곳인데'라며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렴 어떠랴. 뒤셀도르프 거리를 따라 구석구석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좋았고, 파울네 집 크리스마스 사다리에 걸려있던 내 이름 적힌 선물도 좋았다. 촉촉히 젖은 골목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파울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곳에서 보내게 될 크리스마스가 엄청 기대되기 시작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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