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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이 세나라의 공통점은? 그렇다. 요새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유럽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를 이끄는(?) 주축이 되고있는 세 나라다.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도 있다. 바로 유럽에서 가장 소매치기와 좀도둑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들이다. 경제위기와 소매치기. 언뜻 보면 별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 같지만 생각해보면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두 테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관광수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들이다. 독일처럼 공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경제를 지탱할 수 있는 산업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관광업에 의존해서 먹고사는 나라들. 즉 관광객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소매치기들이 들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값비싼 카메라 하나쯤은 으레 들고다니는 관광객들이야 말로 소매치기들의 가장 쉬운 표적일테니!
교환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누가봐도 딱 '외.국.인'이라고 이마에 써놓은 듯 도드라지는 동양인의 외모 덕분에 쏠(sol)광장 근처만 가도 항상 배낭을 앞으로 메고 다니는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름 조심하고 또 조심한 덕분에 아직까지 단 한번도 소매치기를 당한적 없지만 몇 주 전 크게 한 건을 당했다. 자전거를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제목에 '자전거'라고 써놓고 다짜고짜 소매치기 이야기부터 꺼낸건 그 때문이다.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 6호선에는 이렇게 24시간 늘 자전거를 가지고 탈 수 있다!
사실 스페인은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나라다. 사시사철 구름 한 점없는 쾌청한 날씨, 자전거 이용자들을 배려한 다양한 편의시설, 그리고 보행자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주는 운전자들의 센스까지. 마드리드에도 자전거를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인데 서울 한강에서나 보던 일명 '자전거 좋아하는 아저씨들(헬멧부터 각종 의류, 장비까지 풀 셋트로 갖춰입은 사람들)'을 여기서도 꽤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원래 한국에 있을때도 왕복 두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기도 하고, 주말이면 여기저기 자전거로 쏘다니길 좋아하는 편이라 마드리드에 오자마자 자전거 살 궁리부터 세웠었다. 무려 집을 구하기도 전이다. 새 자전거를 사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져올 상황도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중고 자전거'로 눈을 돌리게 됐다.
스페인판 중고나라, 세군다마노
세군다마노(www.segundamano.es)는 한국으로 치면 '중고나라'쯤 되는 사이트다. 세군다마노(segundamano)는 스페인어로 'Second-hand(중고)'라는 뜻이니 '중고닷컴'으로 해석되려나. 어쨌든 사이트를 휘리릭 둘러보고 맘에드는 자전거를 몇 개 고르고 시세도 대충 익혔다. 한국에서는 로드용 미니 스프린터를 탔었기에 여기서도 로드 자전거를 사고 싶었지만 가격대가 너무 높아서 패스. 그렇다고 쌀집 자전거 같은 유사 MTB를 유럽까지 와서 타고싶지는 않았다.
검색하다가 발견한 순간 '이거다!' 싶었던 예쁜 자전거
고민 끝에 결정한 이녀석. 중고치고는 만만치 않은 150유로짜리 자전거지만 왠지 모르게 유럽스러운(그 당시에는 그런게 나름 중요하게 느껴졌었다) 외모와 로드용 타이어, 그리고 자물쇠까지 달려있으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는 아베니다 아메리까(Avda. America)역으로 곧장 달려가 자전거 주인을 만나 구입하게 되었다.
어찌나 반질반질 광이 나던지... 자전거 사온날 사진을 몇장이나 찍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중고거래를 하면서 안좋은 일이 몇번 있어 가는 내내 걱정을 좀 했었다. 말도 잘 안통하는데 혹시나 이상한 소리해서 바가지 씌우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참 착하고 좋은 분이라 한시름 놓았다. 깜빡하고 자물쇠를 놓고 오시는 바람에 졸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판매자 집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광고쪽 회사에 다니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집에 가보니 방 한쪽 벽 전체가 카메라다! 나 역시 카메라 쪽에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또 한참을 더 얘기하다가 집을 나왔다.
자전거의 상태는 말 그대로 까시 누에바(casi nueva, 거의 새것)! 흠집이나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외관뿐 아니라 자물쇠와 타이어 펌프까지 딸려있었다. 150유로라는 가격때문에 살짝 고민하던게 순식간에 잊혀질 정도로 기분좋은 자전거! 거래를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러 께베도(quevedo)역 까지 타고 오는데 마드리드에서 처음 타는 자전거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하도 기분이 좋아 페달을 밟다보니 길을 잃어 잠시 헤멨을 정도.
자전거가 생긴 이후론 안그래도 작은 마드리드가 더 작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자전거는 말 그대로 생활이 되어버렸다. 마드리드는 서울에 비교하면 한참 작은 도시라 자전거만으로도 시내 어디든 쉽게 다닐 수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처럼 자전거 도로가 시내 구석구석 잘 되어있는 편은 아니지만,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힘 들이지 않고도 쭉쭉 잘 나가는게 꽤 괜찮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운전자들의 기분좋은 습관. 마드리드는 전적으로 '보행자 우선 도시'처럼 보인다. 스페인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길을 건널때 만큼은 별로 그렇지 못한데, 심지어 무단 횡단을 하는 경우에도 차는 클락션 한번 안울리고 사람이 다 지날 때 까지 멈춰 기다려준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역시 조금만 횡단보도 가까이에 서 있어도 알아서 착 하고 멈춰주는 차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나중엔 부담스러울 정도). 덕분에 자전거를 타는 것도 서울에 비하면 꽤 안전한 편이다.
역시 라이딩의 끝판왕은 강따라 무작정 달리기!
자전거 타고 가장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cuatro caminos역에서 학교까지 15분 정도의 통학길. 하지만 달릴때 가장 기분 좋은 길은 따로 있다. 바로 마드리드 남쪽을 가로지르는 manzanares강이다. 한국에 있을때도 물론 한강변을 따라 수도 없이 달렸지만 manzanares강을 달릴땐 참 기분이 좋다. 한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얕은 강, 그 강을 따라 최근에 예쁘게 조성된 산책로와 공원들이 그림처럼 쉭~하고 지나간다. 사진들은 Benjamin을 따라서 처음 강에 자전거 타고 갔던 날 찍어둔 건데 다시 봐도 참 기분좋은 느낌! 특히나 남쪽에는 아기자기한 인도교들이 쪼로로 모여앉아 있어서 그야말로 장관이다.
우리 학교(UPM)가 manzanares강을 끼고 있는 덕분에 학교에서 출발해도 곧바로 강으로 진입할 수 있다. 또 매주 일요일마다 즐기는 BIKE POLO 경기장 역시 강 바로 옆이라 이래저래 강가에서 자주 라이딩을 즐기게 된다.
손수 자전거를 손봐주던 Benjamin에게 미안한 마음뿐...
한번은 친절한 Benjamin이 손수 핸들과 페달을 구해와 늘 말썽이던 내 자전거를 손봐준 적도 있었다. 한 달여 정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렇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던 내 자전거였는데... 바라만 봐도 기분좋아지는 그런 이쁜 자전거 였는데... 어느날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사건현장 사진.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오는 법이래서 기다렸는데...제길! 안오잖아!
사건 현장을 발견한건 9월 25일 점심때. 전전날 호세네집 파티에 가서 과음하고는 하루를 꼬박 방에 누워있다가 주차해놓은지 만 이틀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였다. 그날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바람에(이게 실수였다) 집 앞 반지하 창틀에 묶어놓고 호세네 집에서 친구들과 한바탕 신나게 마시고 있었다. 새벽무렵 다같이 클럽에 가기 위해 밖에 나왔을때 이미 내 자전거 자물쇠는 껍데기가 벗겨지고 열쇠가 말을 안듣는 상태. 이미 누군가가 절도를 시도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탓에 별 대수롭게 생각 안하고 자전거를 내버려 둔 채로 자리를 떠나 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전거 앞에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 없었다. 잘 살펴보니 자물쇠를 부신 플라스틱 파편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쇠창살에 자물쇠를 묶어놓았던 부분에는 하도 잡아당겨서 창살이 다 휘어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드리드에 그렇게 자전거 도둑이 많다더니만 이렇게나 빨리 내가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역시 그날 술을 좀 덜 마시고 정신차렸어야 하는데.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냥 터덜터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세군다마노를 검색했다
그 후로 몇 일간 자전거 없이 뚜벅이로 다녔다. 하지만 막상 뚜벅이로 다니려다보니 자전거가 너무 그리워지더라. 결국 다시 세군다마노에서 다른 중고 자전거를 뒤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한 달만에 또 한 대를 새로 사려니 아까운 생각도 들지만 사람 욕심이 욕심인지라 이참에 아예 로드용으로 확 질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도둑맞은 죄인이 무슨 할말이 있으랴. 욕심을 버리고 한참 눈높이를 낮춰서 90유로 짜리 유사 MTB를 골랐다.
훨씬 싸게 주고 샀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새 친구!
새 자전거를 사고 또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오히려 지금 자전거가 훨씬 더 만족스럽고 더 이뻐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유럽에서 결과적으로 유사 MTB를 타고 다니게 된건 유감이지만, 덕분에 BIKE POLO에서 비약적으로 기량이 늘었다! 이전 자전거는 단일기어라 기어비가 BIKE POLO를 하기엔 영 불편했었는데 지금 자전거는 변속할 수 있어서 통학용으로도, BIKE POLO용으로도 아주 안성맞춤이다. 계속 등장하는 BIKE POLO라는게 뭔지는 다음 글에서...
자전거 값이 90유로인데 자물쇠만 따로 22유로나 주고 아주 굵고 튼튼한 놈으로다가 구입했다. 다시는 도둑맞지 않겠다는 신념하나로 눈 딱감고 비싼 자물쇠로 질렀다.
자전거도 좋고 친구도 좋고, 같이 마드리드를 달리는건 더 좋다!
비록 자전거는 한대 잃어버렸지만 여기서 자전거 덕분에 얻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소중한 친구, 즐거운 시간, 예쁜 추억들...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마드리드에서의 라이딩은 늘 신나고 즐겁다! 이번엔 정말 잃어버리지 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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