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시간' 안에서 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그 시작과 끝을 특정할 수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인류는 시각, 날짜, 계절과 같은 개념으로 시간을 한정하고 통제하며 이를 극복해왔다. 휴가, 여행, 출장, 학기, 방학 … 이처럼 고유한 이름이 붙은 ‘시간들’은 그래서 좀 더 특별하다. 우리가 어떤 시간들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꾸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분명 그 때문일 게다. 오늘은 이번 출장의 마지막 날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열 시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을 이륙할 예정이다. 아직 반나절도 더 남아있지만 공항철도까지 포함해 무려 세 번이나 환승을 해야만 갈 수 있는 먼 거리였다. 못해도 정오 전에는 도비아코를 떠나야만 했다. 나에게..
화려한 테이프 커팅과 함께 밀라노에서의 나의 공식적인 출장 업무도 모두 종료되었다. 그건 지난 며칠간 내 집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던 전시장을 관람객들에게 양보하고 떠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원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무사히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보다 내 마음은 이미 출장 뒤로 붙여 써둔 일주일간의 여름휴가에 가있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불과 몇 발자국 만에 '출장'에서 '휴가'로 나의 상태가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맨 처음 생각했던 건 '토스카나 렌터카 여행'이었다. 업무가 끝나는 날짜에 맞춰 여자 친구를 밀라노로 불러 함께 차를 타고 남쪽으로 토스카나의 소도시들을 여행하는 멋진 계획이었다. 하지만 둘이 휴가를 맞추어 쓰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수..
나에게 있어 출장지에서의 한 끼 식사란 언제나 ‘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 이상의 의미였다. 한 그릇의 음식은 낯선 도시를 탐험하는 체력의 원천이자,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위로가 되기도 하며, 새로운 정보와 문화를 습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먼길을 떠나기 전, 일에 대한 설렘만큼이나 먹게 될 음식에 대한 기대감 또한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게다. 지치지 않는 체력은 출장에서 최고의 덕목이다. 특히나 지난 밀라노에서 처럼 현장 업무가 수반되는 경우엔 더욱 그랬다. 예정에 없었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의외로 빠른 판단력보다는 체력이었다. 그러니 출장 중에는 입맛이 없어도 삼시세끼 일부러 잘 챙겨 먹어야만 한다.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환경에 익숙해지면 일의 능률도..
모든 예술은 대중 앞에 내어짐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화려함의 이면엔 언제나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있다. 크레딧에 이름 한 줄 나올까 조마조마할지언정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그들의 노고를 어느 누가 하찮다고 여길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언제나 전시장에선 하얀 벽 이전의 모습이 더 궁금하고, 공연장에선 까만 장막 뒤편의 일들에 더 관심이 많은 나였다. God Knows.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와 인터뷰를 위해 뉴욕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 '설마 이런 사소한 것까지 누가 알아볼까요?’라는 직원의 우문(愚問)에 거장 건축가는 '신은 알고 계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스태프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작은 것 하나 포기 않고 끝까지 물..
거리에는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두 달 전 인천 앞바다에서 배로 부쳐진 전시물품들이 아침 일찍 미술관으로 반입되는 날이다. 대부분이 원목으로 만든 가구인지라 혹여나 작렬하는 적도의 태양 아래 틀어지거나 휘어지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컨테이너에서 내리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서둘러 호텔 문을 나섰다. 밀라노 도심 서쪽에 위치한 '트리엔날레 지구'는 거대한 녹지대를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과 다양한 미술관 및 박물관이 산재하는 곳이다. 내가 담당하는 전시가 열리게 될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박물관(Triennale di Milano)'은 그중 단연..
‘다시 유럽에 올 수 있을까?’ 스무 살, 유럽으로의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푼돈에 부모님의 지원금까지 보태어 무리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물론 여행지로서의 유럽은 충분히 멋지고 좋은 곳이었지만 그만큼 과분했다. 그곳에서 한 달간 수없이 마주했던 감동들은 마치 손 틈새로 새어나가는 모래알과 같아 다시는 쥐기 힘들 것만 같았다. 인생이 충분히 길다는걸 채 다 알지 못했던 그때, 나는 유럽에 다시는 오지 못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나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고 다시 유럽 땅을 밟았다. 생각보다 빠른 재회였다. 하지만 아직 학생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 여기고 매 순간을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다. 무..
덜컹. 크게 한 번 출렁이는 차축의 진동이 창문에 기댄 내 머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시 스무 살 나이에 유럽을 배낭여행 중이던 나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를 출발해 '생폴 드 방스'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순간 안내방송에서 들리는 '방스'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가방을 챙겨 버스를 내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가이드북에 나온 마을 사진과 영 딴판인 게 아닌가. 분명 '방스'라고는 했는데 여기가 정말 '생폴 드 방스'가 맞는지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친구들과 상의 끝에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생폴!'이라고 소리 지르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운 좋게도 푸조 한 대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버스를 내린 곳은 ..
정말이지 시에스타는 스페인에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점심도 못 먹고 마르세유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왔건만 이 작은 마을에는 우리 부부 허기를 달래줄 빵 한 조각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문이 열려있는 식당들의 주방은 불이 꺼진 지 오래고 저녁 장사 전까지는 재료마저 없단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은 굶게 생겼다. 시계는 이제 막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낮의 찜통 같은 더위속에 체력만 허비한 채로 터덜터덜 차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동을 걸자 내비게이션이 남은 길안내를 다시 시작했다. 최종 목적지였던 르 토로네 수도원(Abbaye du Thoronet)까지는 겨우 5km 만을 앞두고 있었지만 목적지 부근 지도상에는 눈 씻고 봐도 식당은커녕 작은 건물 하나 없음이 분명했다. 수도원 기행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