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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Valls, 1951~)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건축가다. 학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으나 이후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로 진학하여 토목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건축학과 공학을 모두 섭렵한 독특한 커리어 덕분인지 그의 작품들은 자연물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독특한 구조미로 유명하다. 몇 년 전에는 현대자동차 광고를 이 곳 발렌시아의 칼라트라바 건축물을 배경으로 촬영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바르셀로나(Barcelona)가 가우디의 도시라면 발렌시아(València)는 단연 칼라트라바의 도시다. 이 곳에서 나고자란 그는 건축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뒤 돌아와 많은 건축물들을 고향에 남겼다. 하지만 꼭 칼라트라바가 아니더라도 발렌시아는 오래 전 로마인들이 남긴 유적과 이슬람의 흔적 등 매력적인 볼거리가 충분히 많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오렌지로 유명한 도시이자 우리가 잘 아는 스페인의 대표적 음식인 빠에야(la paella)와 음료 오르차타(horchata)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겨우 하루짜리 여행이지만 두 편으로 쪼개 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칼라트라바 없는 발렌시아'와 '칼라트라바의 발렌시아', 이 모두를 보아야만 비로소 이 도시를 제대로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늘은 먼저 칼라트라바 '없는' 발렌시아의 이야기다.


 

 

발렌시아에 들어서자마자 당장 표지판부터 두 언어로 쓰여진다. 위쪽이 발렌시아어, 아래쪽이 우리가 흔히 아는 표준 스페인어인 까스떼야노(castellno)

  

 하룻동안의 짧은 꾸엔까(Cuenca) 여행을 마치고 다시 올라탄 열차가 마침내 발렌시아에 도착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미리 검색해둔 구시가지 호스텔로 곧장 향해 짐을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철도노조의 부분 파업으로 인해 우리가 탄 열차는 시 외곽에 조용한 동네에서 멈춰버렸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에게 저 멀리서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Hablas castellano? (스페인어 할줄 알아?)


 할줄 안다고 대답하자 간단히 상황설명 후 시내까지 들어가는 공짜 지하철표를 나눠주었다. 유유히 사라지는 승무원을 뒤로하고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의문 하나. 그는 분명 español(에스빠뇰, 스페인어)을 할 줄 아냐고 묻지 않고 castellano(까스떼야노, 마드리드 근교 지방 방언-표준 스페인어)을 할줄아냐고 물었다. 그랬다. 마드리드에서 겨우 열차로 몇 시간 달려왔을 뿐인데 어느새 우린 '발렌시아어'를 쓰는 전혀 다른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겪게되는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10유로 안되는 호스텔에서 아침까지 준다니, 그야말로 횡재했다!

 

 기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구시가지를 걸어 호스텔에 도착하기까지 길거리의 모든 표지판이며 간판들이 미묘하게 마드리드의 그것과는 달랐다. 어떤게 다르고 또 어떤게 같은지 이것저것 비교해보는 재미에 어느새 도착. hostel.com 앱으로 검색한 발렌시아에서 가장 싼 호스텔이었다. 생각보다 깨끗한 시설에 안도하며 지친 몸을 뉘였다.

 다음날 아침.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빵과 씨리얼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최저가 호스텔이었음에도 아침까지 제공해주는 센스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다. 애초에 꾸엔까, 발렌시아를 합쳐 1박2일로 짧게 잡은 일정이라 우리 힘만으로 이 큰 도시를 하루에 돌아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럴때 가장 좋은건 바로 여행자들을 위한 '프리투어'다. 보통 호스텔 카운터에 가보면 매일 아침 시내 중앙광장에서 출발하는 프리투어 안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여행 프로그램이라 별도의 참가비는 없지만 모든 투어가 끝나고 소정의 팁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오늘 우리도 이 프리투어를 이용해 가볍게 발렌시아 구시가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오늘 우리를 안내해줄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이드, 이름이 뭐였더라...

 

 아침 10시. 비르헨 광장(Plaza de la Virgen) 광장 분수대에 모여 투어가 시작되었다. 시간 맞춰 나가보니 대략 대여섯명 정도의 배낭여행객들이 모여있었다. 오늘 우리의 가이드를 맡아줄 친구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유학생이다. 나처럼 교환학생으로 처음 발렌시아에 왔다가 이 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서 몇 년째 머물며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인이 아닌 덕에 영어로 가이드를 듣는건 좋았지만 스코틀랜드 억양이 워낙 강한데다 어쩐지 스페인어 억양까지 섞여 있어서 알아듣는데 애를 좀 먹었다.


 

조촐한 무리로 구성된 오늘의 프리투어팀


 겨울철인데다 주말도 아니라 그런지 투어에 참가한 사람수가 저조한 편이라고 했다. 덕분에 좀 더 가까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건 좋았지만 어딘가 썰렁한 분위기. 그래도 귀를 쫑긋 하고 하나라도 더 들으려 애썼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 지중해를 접한 발렌시아의 지리적 특징 때문인지 기원전 138년 로마인들이 먼저 이 곳에 도시를 세웠고 이후 이슬람의 영향도 받으며 다양한 문화가 섞여들게 되었다. 우리가 출발했던 비르헨 광장은 과거 로마인들이 세운 고대도시에서도 중심 광장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했다. 근처 오래된 건물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진 후 우리는 구시가 경계의 끝자락에 있는 세라노 탑(Torres de Serranos, 또레스 데 쎄라노스)으로 향했다.


 

 

구시가 모든 건축물에 이슬람 색채가 상당히 묻어 있었다.

 

 세라노 탑은 과거 성벽의 북쪽 초소를 담당하던 곳이다. 1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바르셀로나를 바라보고 서있다. 비슷하게 생긴 또 하나의 탑인 쿠아르트 탑(Torres de Quart, 또레스 데 꾸아르뜨)은 구시가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숭례문에 해당하는 오래된 유적이다. 생각보다 보존 상태가 좋았지만 자세히 보면 과거 전쟁의 흔적인 포탄 자국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로마인들의 유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 광장

 

 구석구석 구시가를 돌아보던 중 지하에 묻힌 로마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그 위를 유리로 덮어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광장을 발견했다. 전에 사라고사(zaragoza)에 갔을때도 비슷한 시설을 본 적이 있다. 스페인 곳곳에 남아있는 로마인들의 흔적을 보존하면서도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였을까. 투박한 유리와 철제 프레임이 눈에 거슬리기는 해도 과거 로마인들이 광장으로 썼던 자리에 그대로 다시 서보는 경험은 나름 즐거웠다.


 

 

 

 

차분한 느낌의 시가지, 하지만 3월에는 불바다(?)가 된다고 했다.

 

 구시가 건물들에 주로 쓰이는 독특한 색상의 석재(사암으로 추정됨. 정보있으면 알려주시길)가 아니더라도 새로 지은 건물들 역시 비슷한 톤의 색상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차분해 보이는 거리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발렌시아의 거리는 라스 파야스(las fallas)라는 광란의 축제로 유명하다고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한마디로 밤마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폭죽을 미친듯 터트리는 광란의 축제란다. 그것도 매년 3월 1일부터 19일까지 매일 밤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데, 이 기간이 되면 발렌시아 온 거리에 불꽃과 굉음이 가득해 잠들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너무 평온해보이는 지금의 거리 풍경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이야기였다.


 

 

 

여행자의 목을 축여줄 최고의 음료, 오르차타(horchata)

 

 앞에서 언급한것 처럼 스페인의 전통음료인 오르차타(horchata)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 발렌시아다. 스페인이나 남미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마셔봤을법한 대중적인 먹거리로 기름골의 뿌리 줄기 즙 또는 대용으로 쌀 등을 주원료로 설탕이나 꿀, 향신료 등을 원료로 하는 음료이다. 기름골(chufas, 추파스)이라는건 땅콩과 같은 덩이뿌리 식물로 맛이 견과류와 매우 비슷하다고 했다. 생 기름골에서는 헤이즐넛,아몬드,코코넛과 비슷한 향이 난다고 하는데 과연 오르차타에서도 비슷한 맛이 났다.


 해장국 문화가 없는 스페인에서는 술먹은 다음날 숙취를 해결하지 위해 오르차타를 마시기도 한다. 나 역시 집앞 까르푸에서 몇번 사다 마신적이 있었다. 물론 본고장에서 맛보는 오르차타는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가격이 싼 편은 아니지만 발렌시아에 방문하게 된다면 잊지말고 맛보시길.


수줍은듯 시선을 피하고 계시는구만...안녕하신가?

 

 오르차타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걷던 중 재미있는 사진을 한장 찍었다. 오래된 건물의 무너진 벽 일부를 보수해놓은 부분 처럼 보였는데 벽돌 대신 잘 생긴(?) 조각상 파편을 넣어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다. 문화재도 많고 오래된 도시라 자칫 딱딱할 수도 있는 도시 풍경을 유쾌하게 만드는 재치가 아닐까 싶다. 이런 재기발랄함은 몇 번이고 본받고 싶을 따름이다.


 

 

 

 

못난 우리를 인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오 가이드님...

 

 근처 오렌지 시장까지 돌아보는 것으로 해서 짧은 프리투어가 끝났다. 허기를 느끼며 조금씩 집중력을 잃어가던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설명해준 이방인 가이드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근처 맛집 정보를 좀 물어봤다. 발렌시아에 왔으니 빠에야(la paella, 스페인식 철판 볶음밥)을 먹어야 하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가이드 말에 의하면 정통 빠에야집들은 배낭여행자가 먹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라고 했다. 대신 근처 로컬식당 중 메뉴 델 디아(menú del día) 중 일부로 빠에야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곧장 그 집으로 향했다. 배낭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사정엔 고민도, 흥정도 필요없는 법이다.

 

활기찬 분위기의 로컬 식당, 스페인의 점심 풍경이다.

 

 10유로 안팎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메누 델 디아(menú del día, 오늘의 메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전에 사라고사 여행편에서 설명한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간단히 설명을 붙인다. 보통 전채요리 하나(보통 샐러드나 슾)와 메인요리 하나(보통 고기요리), 거기에 음료와 디저트로 구성되는데 전채요리와 메인요리는 그날 메뉴에 따라 보통 두세가지 중 하나를 고르게 된다. 따지고보면 10유로라는 가격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지만 패스트 푸드가 아닌 현지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정한 타협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우리가 찾은 엘 끼오스꼬(el kiosko)라는 이름의 식당은 벌써부터 점심 식사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primero plato(쁘리메로 쁠라또, 첫번째 요리)

 

 시원한 맥주 한 잔씩을 들이키는 사이 전채요리가 나왔다. 그냥 신선한 야채 몇가지에 올리브유를 올리고 소금을 뿌린 전형적인 스페인식 샐러드. 오전나절 열심히 걸어다니느라 체력을 다 써버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흡입해버렸다.


발렌시아에서 맛보는 보급형(?) 빠에야!

 

 드디어 기다리던 빠에야(la paella)가 나왔다. 그저 고기 몇조각 들어간 볶음밥처럼 보이지만 가격이 비싼 이유는 다름아닌 저 노란빛깔을 내는 사프란이라는 향신료 때문이다. 우리가 이날 먹은 빠에야는 보급형이라 사프란 대신 강황가루를 썼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발렌시아에 와서 어쨌든 빠에야를 맛봤다는 사실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segundo plato(세군도 쁠라또, 두번째 요리)

 

 남은 두 접시의 메인 요리가 나왔다. 역시나 전형적인 로컬식당의 고기 요리들. 썩 맛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갈길이 멀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싹 비워버렸다. 개인적으로는 미트볼 말고 다른 종류의 고기 구이를 시킬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미트볼 세 개가 뭐니 건장한 청년들한테.


자, 이제 배도 채웠으니 다시 걸어볼까!

 

 자. 뭔가 후다닥 건성으로 보고 지나갔지만 이젠 구시가지를 뒤로하고 '칼라트라바의 발렌시아'를 만나기 위해 떠나야할 시간이다. 우리는 과거 구시가 북쪽으로 흐르던 뚜리아(Turia) 강을 매립해 만든 공원을 따라  그 이름도 거창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까지 무작정 걷기로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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