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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지의 천국, 게스트 하우스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늘 즐거운 이야기가 있고, 웃음이 넘치는 그 곳.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자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하룻(혹은 여러날) 동안의 즐거움'일 뿐 다음날이면 또 다른 즐거움에 취해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여행하는 내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야 하루 즐겁게 놀다 가면 그만인 사람들이니, 아무리 정을 붙이고, 살갑게 굴어보려 해도 어디까지나 '객'에 불과한건 아닐까.
 어쩌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고, 소심한 의심이었을지 모른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동안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늘 하면서 달렸다. 하지만 '생태숙소 퐁낭'은 그런 나의 의심을 깨끗하게 지워준 곳이었다. 시설이 좋고, 편안해서라기 보다는...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변변한 간판 하나 없어서 바로 앞에 두고도 한참을 찾아 헤맸었다


 '생태숙소 퐁낭'은 일단 이름부터가 독특하다. 특별할 것 없는 허름한 외관이지만, 출입문에 쓰여진 '제주해오름생태학교'라는 말은 발을 들여놓는 나의 마음을 어딘가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전날 80km 가까이 열심히 페달을 밟아 이 곳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 경.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루에서 다른 여행자들이 조용히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며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으레 이쯤이면 고기와 함께 술잔이 오가는 다른 게스트 하우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걸 느꼈다.


온평리 마을회관을 보고 따라가면 쉽게 퐁낭을 찾을 수 있다


 생태숙소 퐁낭'이 위치한 온평리는 표선면의 작은 해안 마을이다. 짧은 일정에 자전거로 제주 여행을 하게 되면 이렇게 작은 마을이나 골목길에 들어와 볼 일이 없는데, 숙소 위치를 못찾고 한참을 헤메인 덕분에 온평리를 한바퀴 다 돌아보게 되었다. '생태숙소 퐁낭'은 마을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을회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찜질방'이라는 간판이 아직도 붙어있는 건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던 건물을 재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자들의 아늑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마루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아담한 마루가 나온다. 여행자들을 위한 책들도 보이고, 언제나 잔잔한 음악이 함께해서 더욱 좋은 공간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조그마한 숙소지만, 오히려 작은 덕분에 더 매력있는 공간이다. 마치 자기 집 거실에 앉아서 친구랑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듯, 함께 여행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침대 없지만 그래도 편안히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


 하룻밤 묵어가는 비용은 단돈 만원! 그것조차 계산하는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거실에 마련된 항아리에 셀프로 넣게 되어있다. 방값 뿐 아니라 먹는 것이며 기타 비용까지 모두 항아리에 알아서 넣도록 되어있다. 항아리를 감시는 사람도, 잠금 장치도 없지만 사람들은 정확하게 계산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이곳에 들어와 가장 마음에 들었던게 바로 이 항아리였다. 그저 하루 머물러 가는 손님일지도 모르는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느낌. 두 명치 방값을 항아리에 살포시 넣으며 왠지모를 고마움마저 느꼈다.

생태숙소 퐁낭의 주인장, 마당비님. 여행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신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 이불을 깔고, 그것도 남녀가 한 방에서 잠을 청한다는게 다소 불편할지도 모른다(물론 방 가운데는 사람 키만한 칸막이가 놓여져 있다). 하지만 모두가 한 공간에 있다는 점 덕분에 잘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불을 끄고 모두 잠을 청하게 된다. 나도 물론 술을 좋아하고, 밤새 떠들썩하게 노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밤새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단잠을 자는게 참 좋았다.

아침에는 원하는 만큼 삶은 달걀을 먹을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숙소에서 가장 늦게 나왔다. '마당비'라고 불리우는 이곳 주인 아저씨는 인상도 참 좋으시고 멋있는 분이셨다. 한 명 한 명, 이곳을 찾아온 여행자들을 이름으로 불러주시는데 그게 참 좋았다. 정말 이곳에 내가 묵어 갔다는걸 기억해 주실 것만 같은, 다시 와도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이 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실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아침으로 삶은 달걀 두 개를 먹고 슬슬 출발하려 하는데, '규빈씨!' 하고 다시 나를 부르셨다.

 원래는 오늘 성산 일출봉을 들렸다가 우도를 갈 계획이었다. 헌데 마당비님께서 오름에 가보지 않겠냐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손수 지도를 출력해 펜으로 길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 주시는데... '오름'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마침 다랑쉬오름과 용눈이 오름으로 가는 길에는, 어제 못 들렀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있었다. 다시 갤러리 구경도 하고 오름도 보면 좋겠다 싶어서 추천해주신 코스로 오늘의 일정을 급 변경했다. 한라산 중턱을 걸쳐서 자전거를 타야 하는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일단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하마터면 이렇게 멋진 오름을 못보고 그냥 갈 뻔 했다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


 마당비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우리는 그날 오름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진짜 제주를 만났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퐁낭 홈페이지에 접속해 마당비님께 감사의 인사글을 올렸다. 혹시나 까먹으셨을까 조심스레 인사를 드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반갑게 댓글을 달아주시더라.
 제주에는 수 많은 게스트 하우스가 있고, 그 곳에는 저마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들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다시 제주를 찾게 된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생태숙소 퐁낭'만큼은 꼭 다시 오고 싶다. 그때도 나를 기억해 주시겠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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