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시간' 안에서 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그 시작과 끝을 특정할 수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인류는 시각, 날짜, 계절과 같은 개념으로 시간을 한정하고 통제하며 이를 극복해왔다. 휴가, 여행, 출장, 학기, 방학 … 이처럼 고유한 이름이 붙은 ‘시간들’은 그래서 좀 더 특별하다. 우리가 어떤 시간들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꾸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분명 그 때문일 게다. 오늘은 이번 출장의 마지막 날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열 시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을 이륙할 예정이다. 아직 반나절도 더 남아있지만 공항철도까지 포함해 무려 세 번이나 환승을 해야만 갈 수 있는 먼 거리였다. 못해도 정오 전에는 도비아코를 떠나야만 했다. 나에게..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희뿌연 연무(煙霧) 뿐이었다. 온데 사방이 구름으로 둘러싸인 누볼라우 산장의 아침 풍경은 마치 내가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어로 구름(Nuvolau)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따뜻한 물은커녕 샤워실도 변변히 없고, 전기 콘센트라도 한번 쓸라치면 줄을 서야 하는 불편한 곳이지만 지난밤 이곳에서 나는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라(Mara)와 소피아(Sofia)와 헤어진 뒤, 이 산장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호주인 부부와 친해진 까닭이었다. 선생님으로 일하며 방학 때마다 전 세계를 함께 여행한다는 둘은 저녁식사 내내 나와 함께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언젠가 호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또 연락처..
내 여행의 출발은 늘 혼자였다. 누군가 함께하지 않으면 금세 외로워질게 뻔함에도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버리는 나였다. 하지만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숙소에서, 혹은 레스토랑에서 나는 늘 사람들을 만났고, 어울렸고, 함께했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면 하루, 혹은 일주일, 때로는 한 달 가까이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여행이란 목적지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더 가깝다. 길 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에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이 차곡차곡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야 말로 곧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라가주오이 산장(Rifugio Lagazuoi)에서 묵기로 한 날, 나는 네 명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탈리..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난생처음으로 산장에서 맞이해보는 아침이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아직은 걸은 길보다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지만 어제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루트와 산장 정보를 살피던 중 한 문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라가주오이 산장은 해발 2,700m에 위치하고 있어 돌로미티 지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숙소입니다.' 잔잔하던 내 마음에 순간 물결이 일렁였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 높은 곳도 많다. 당장 같은 알프스에 속한 스위스 융프라우만 해도 해발 3,500m까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기차로 올라갈 수 있고, 네팔에 가면 에베레스트를 바라보고 해발 3,800m에 우뚝 솟은 호텔도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00'이라는..
돌로미티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전날 저녁 늦게 마을에 도착한 탓에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곧바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한 뒤였다. 반쯤 열린 발코니창 너머로 불어 들어온 선명한 산내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나의 의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새들마저 쉴 새 없이 지저귄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확실히 도시에서 맞이하던 아침과는 조금 달랐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문득 생각했다. 호텔 앞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 도로는 내 기억이 맞다면 어젯밤 역에서부터 걸었던 그 길이었다. 겨우 차 두대가 아슬아슬 지나갈 정도의 길이 마을의 중심 도로라니. 어쩌면 인구 3천 명 남짓의 이 작은 마을에선 중앙선을 그리는 것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건축하는 일은 곧 땅에 대한 존중과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설계 작업은 으레 그 땅을 직접 찾아가 두 발로 걸으며, 두 눈으로 면밀하게 살피는 일로 시작된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연필을 쥐기 전부터 건축가의 사유라는 것이 이미 시작되는 까닭이다. 내가 건축에 매력을 느끼는 건 자연과 인간이 서로 밀고 당기며 균형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지경계라는 가상의 선을 땅 위에서 찾아내고 이를 기준으로 집의 향과 배치를 결정하는 일부터가 당장 그렇다. 더욱이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되면 중력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대 자연의 힘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여야 하며, 건물이 높아지면 질수록 바람과도 싸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공사가 시작되면 더욱 힘겨운 과정의 연속이다. 땅을 파고, 메우고, 벽을 세우고, 붙이고..
'문화원'은 우리나라 밖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공공시설이다. 일반적으로 해외 주요 도시에 설립되어 문화예술행사 및 교류, 한국어 또는 한국문화의 강습 등 민간차원에서의 문화교류의 장으로서 활용되곤 한다.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공공 차원에서 행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것을 고려했을 때 대사관을 '아빠', 문화원을 '엄마' 정도로 비유해도 나름 적절할 것 같다. 2020년 현재 전 세계 27개국에는 총 32개의 한국문화원이 운영 중이다. 꼭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문화원을 접해볼 방법이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서울을 비롯한 한국 내 주요 도시에 같은 방식으로 문화원을 설립해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운현궁 옆에 위치한 일본문화원의 경우, 일본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각종 ..
채 일주일도 안 되는 빡빡한 출장 일정에도 굳이 쿠리치바를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내 의지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역만리 브라질 땅에서 상파울루에만 머물다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업무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딱 하루 정도는 어떻게 시간을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보지는 크게 세 곳. 모두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들로 대략 예상되는 일정은 아래와 같았다.1. Rio de Janeiro: 브라질 최대의 관광도시 리우의 거대 예수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2. Foz do Iguazu: 세계 3대 폭포라 불리는 이과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3. Curitiba: 전 세계 건축/도시/교통/행정가들의 참조도시, 쿠리치바를 답사한다. 관광을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