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히 ‘방청 페인트’일 줄로만 알았다. 아니, 그 빨간색이 '방청 페인트'가 아닐 거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쪽이 더 맞겠다. 흔히 말하는 '철골구조(Steel Structure)', 또는 더 정확한 표현으로 '강구조물'의 각 부분을 이루는 부재 표면에는 소위 '방청 도장'이라는 걸 하게 되어있다. 공기 중에 노출되면 금세 녹이 슬어버리니 특수한 도장으로 표면을 덮어 산소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사용되는 '방청 페인트'는 그 특유의 성분 때문에 붉은 빛깔을 띤다. 머릿속으로 공사 중인 현장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으레 붉으스름한 뭔가가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이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한창 공사 중이던 그 건축의 빨간색 또한 그런 사연으로만 여겼다. 그 색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줄은 미..

전시영역을 지배하는 건 중앙의 거대한 '아트리움'이다. 아트리움(atrium)은 건물 안쪽으로 여러 층에 걸쳐 형성되는 대규모 홀을 의미하는데 직역하면 ‘중정’ 또는 ‘중앙홀’이다. 그 기원은 고대 로마의 주거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앙의 안뜰에서 유래했다. 현대 건축에서는 주로 공간의 중심에서 시각적, 공간적 개방감을 제공하며 때로는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환경을 제어하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이제는 많은 건물들에서 자주 접할 할 수 있는 종류의 공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 모양 때문이다. 로비를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곡면의 노출 콘크리트 난간벽은 아트리움의 형상이 결코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게 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거기엔 전시 관람의 ..

전 세계인의 맛집 지도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는 별 하나부터 셋까지 개수로 레스토랑의 등급을 매긴다. 얼핏 듣기엔 흔히 배달앱에서 보던 ‘별점’ 시스템과 비슷해 보이지만 숨은 속뜻을 알고보면 제법 재미있다. 별 한 개는 ‘여행 중에 근처를 방문하면 들러볼 만한 곳’이라는 뜻, 그다음인 별 두 개는 ‘여행 경로를 바꿔 우회(detour)해서라도 찾아갈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가장 높은 등급인 별 세 개는 ‘오직 이 음식점을 방문할 목적만으로 여행(journey)을 계획해도 후회하지 않을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건축에도 미슐랭 가이드 같은 게 있다면 오늘 내가 찾아가려는 이 건축에는 몇 개의 별을 붙여야 좋을까. 그곳에 도착은커녕 아직 출발도 하지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만큼은 ..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습니다. 출품작은 브런치북 ‘젊은 건축가의 출장기’입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브런치북으로 이동합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좋아요 부탁드려요!브런치북 '젊은 건축가의 출장기' 바로가기이번 출품작은 지난 네 편의 단편 브런치북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것입니다. 총 30편의 글을 1부 이탈리아, 2부 일본, 3부 브라질, 4부 프랑스 순서로 묶었습니다. 단편으로 이미 읽으셨던 분들도 긴 호흡으로 다시 만나보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표지 그림은 예전에 마드리드에서 그려두었던 제 방입니다. 여러 나라 이야기가 함께 묶이다 보니 대표 그림을 선정하기까지 고민을 좀 했습니다. 출장이라는 게 결국 집을 떠나 조그만 호텔방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 안에서 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그 시작과 끝을 특정할 수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인류는 시각, 날짜, 계절과 같은 개념으로 시간을 한정하고 통제하며 이를 극복해왔다. 휴가, 여행, 출장, 학기, 방학 … 이처럼 고유한 이름이 붙은 ‘시간들’은 그래서 좀 더 특별하다. 우리가 어떤 시간들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꾸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분명 그 때문일 게다. 오늘은 이번 출장의 마지막 날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열 시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을 이륙할 예정이다. 아직 반나절도 더 남아있지만 공항철도까지 포함해 무려 세 번이나 환승을 해야만 갈 수 있는 먼 거리였다. 못해도 정오 전에는 도비아코를 떠나야만 했다. 나에게..
내 여행의 출발은 늘 혼자였다. 누군가 함께하지 않으면 금세 외로워질게 뻔함에도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버리는 나였다. 하지만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숙소에서, 혹은 레스토랑에서 나는 늘 사람들을 만났고, 어울렸고, 함께했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면 하루, 혹은 일주일, 때로는 한 달 가까이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여행이란 목적지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더 가깝다. 길 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에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이 차곡차곡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야 말로 곧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라가주오이 산장(Rifugio Lagazuoi)에서 묵기로 한 날, 나는 네 명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탈리..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난생처음으로 산장에서 맞이해보는 아침이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아직은 걸은 길보다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지만 어제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루트와 산장 정보를 살피던 중 한 문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라가주오이 산장은 해발 2,700m에 위치하고 있어 돌로미티 지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숙소입니다.' 잔잔하던 내 마음에 순간 물결이 일렁였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 높은 곳도 많다. 당장 같은 알프스에 속한 스위스 융프라우만 해도 해발 3,500m까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기차로 올라갈 수 있고, 네팔에 가면 에베레스트를 바라보고 해발 3,800m에 우뚝 솟은 호텔도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00'이라는..
돌로미티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전날 저녁 늦게 마을에 도착한 탓에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곧바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한 뒤였다. 반쯤 열린 발코니창 너머로 불어 들어온 선명한 산내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나의 의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새들마저 쉴 새 없이 지저귄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확실히 도시에서 맞이하던 아침과는 조금 달랐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문득 생각했다. 호텔 앞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 도로는 내 기억이 맞다면 어젯밤 역에서부터 걸었던 그 길이었다. 겨우 차 두대가 아슬아슬 지나갈 정도의 길이 마을의 중심 도로라니. 어쩌면 인구 3천 명 남짓의 이 작은 마을에선 중앙선을 그리는 것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