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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강까지 이제 두 주 남짓 남았다. 학기 초만 해도 '얼른 학기가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지만 막상 정말로 끝이 다가오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내일은 설계 수업이 있는 월요일이다. 내일 수업을 포함해 이제 마감까지 딱 두 번만 더 수업에 가면 바로 마감이다. 당장 내일 수업에 가져갈 도면을 그리기 위해 책상에 앉았지만 머리도 잘 안돌아가고 그래서 오토캐드 대신 블로그를 켰다. 이왕 이렇게 된거 마감도 가까워졌으니 한 학기동안의 내 작업을 되돌아볼 겸 수업 이야기를 좀 써보려 한다.

 마드리드 대학교로 교환학생이 확정되고나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수업은 당연히 '건축 설계 스튜디오'다. 건축학과의 특성상 다른 어떤 수업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업인데다 또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들 앞에서 내 작업을 이야기하고 크리틱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가 컸었다. 물론 다른 과목들 중에도 흥미로운게 상당히 많았지만 이번 교환학기동안에 설계 스튜디오 수업만 제대로 들어도 얻은게 많겠다 싶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걱정도 많았다. 군휴학 이후 2년 만에 다시 듣는 설계 수업인데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멀리 스페인에서. 하지만 '건축가는 말보다는 도면과 모형으로 이야기한다'라는 내 신념을 믿고, 어떻게든 잘 되리라 믿으며 마드리드 행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난다. 

모든 교수님들이 모여 자기 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자리


 마드리드 대학교(이하 UPM) 건축대학(ETSAM)의 스튜디오 커리큘럼은 'Proyectos 1' 부터 'Proyectos 9'까지 총 아홉 학기에 걸쳐 나눠져 있다. 한국 학기로 치면 난 지금 4학년 2학기를 이수해야 하기에 UPM에서 4학년 과정인 'Proyectos 7'을 선택했다.

 개강이후 얼마 안되서 각 설계 스튜디오 수업을 소개하는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한국 뿐 아니라 이 곳 학생들에게도 스튜디오 수업이 중요한 만큼 발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UPM의 모든 설계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월, 화, 수) 씩 진행된다. 보통 월요일과 화요일이 프리젠테이션과 크리틱이 있는 날이고 수요일은 조교들(조교라기 보단 보조교수 정도)이 담당해서 이론 수업이나 보충 강의를 진행한다. 때문에 한 설계스튜디오는 한 명의 교수가 아니라 보통 4~6명 정도가 한 팀이되어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한 학년 설계 스튜디오 수업은 여섯 분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반별로 담당 교수에 따라 내용도, 프로젝트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날 프리젠테이션을 잘 듣고 마음에 드는 반을 찾아가면 된다. UPM 건축학과의 조금 특이한 시스템중 하나는 설계 스튜디오가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눠진다는 점이다. 여섯 분반 중에서 세 반은 오후 12시 40분에 수업을 시작하고, 나머지 세 반은 저녁 7시 40분에 시작한다. 아무래도 한 학년 정원이 워낙 많다보니 수업을 아예 둘로 나누어 놓은 것 같다. 내가 선택한 'Proyectos 7'를 담당하는 여섯분의 교수님 중에서 무려 네 분이나 '엘 크로키(El Croquis)'에 나온 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엘 크로키가 스페인 잡지다 보니 스페인 사람들이 나오기 더 쉬운건 인정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인은 한 번도 나온적이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이 곳에서의 수업이 더욱 기대될 수 밖에 없었다. 

왼쪽 꽃남방(?) 입으신 분이 바로 '소리아노 교수님'


 그날 그렇게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고민끝에 '소리아노(Soriano)' 교수님 수업을 택했다. 사실 원래 마음먹었던건 '산초(Sancho)' 교수님 반이었는데 UPM 학생들에게 평판을 물어보니 너무 고리타분하고 평범한 프로젝트를 한다기에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막상 소리아노 반을 택하고 나서 알고보니, 이분 수업은 UPM 학생들 사이에서도 톡특하기로 엄청 유명하더라! 마르따도 한국에 오기전 소리아노 반을 들었다가 결국 드랍해버렸다 하고, 호세는 다른분은 몰라도 소리아노는 'muerte(죽음)'이라며 절대 듣지 말라고 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할 때도 다들 'Buena suerte!(행운을 빌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 유명한 소리아노 교수님 반에서 한 학기가 거의 다 지난 지금, 왜 그때 친구들이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죽음'이라던 소리아노 교수님의 수업 덕분에 좀 몸은 힘들었어도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흥미로운 수업을 한 학기동안 들어볼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밑에서 다시.


인원은 많아도 크리틱 시간이 떨리는건 한국이랑 똑같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건축학전공 한 학년 정원이 20~30명 사이인걸 생각하면 UPM 건축대학은 규모부터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 학년 정원이 보통 400~500명 정도이며 건축대학 전체 인원을 합치면 몇 천명 규모가 된다. 인원이 많고 규모가 큰 만큼 설계 스튜디오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한 학년을 여섯 분반으로 나눴음에도 한 반에 보통 30~60명 정도의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듣게 된다. 한국에 있을때는 한 반에 10명 정도가 오붓하게 모여 크리틱하고 수업했던걸 생각하면... 이정도면 문화 충격이다! 규모는 달라도 수업 진행방식은 거의 똑같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자기 작업을 강의실 벽에 가득히 붙이고, 돌아가면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교수님들의 크리틱을 듣는 방식. 하지만 인원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해오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수업시간도 부족해서 눈에 띄는 작업이 아니면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결국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진짜 경쟁' 시스템인 셈이다.


자유로운 설계 스튜디오 수업 모습


 수업 분위기도 상당히 자유롭다. 강의식 수업이 아니다보니 일단 의자에 앉는 경우가 잘 없다. 다들 책상에 걸터 앉아 크리틱을 듣거나 창틀에 올라가 있는 녀석들도 더러 있다. 하긴 이건 한국에 있을때도 비슷했다. 하지만 발표하는 모습은 더욱 흥미롭다. 그래도 나름 교수님 앞에서 자기 작업을 발표하는 건데, 책상에 올라가 이리저리 점프하며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고 아예 다리를 꼬고 책상에 걸터 앉아 얘기하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한 여자아이가 있는데, 발표하면서 등을 긁는게 버릇(!)인지 하도 몸을 배배 꼬길래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발표가 끝날 쯤에는 등쪽 옷이 다 말려올라가 거의 배꼽티처럼 되어버렸더라. 이것도 문화 충격이라면 충격이겠지.

 대충 UPM 건축대학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런식이다. 서양 학생들 답게 프리젠테이션도, 표현도, 수업중에 모든게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걸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이 많은 교수님들도 그리 권위적이지 않아 보인다. 학생들보다 더 흥분하며 강의실 여기저기를 방방 뛰어다니며 크리틱을 하실때도 있고, 'puta(시발)', 'joder(제길)' 같은 다소 강한 표현을 섞어 침을 튀기며 열변하시기도 한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수업 분위기도 재미있지만, 사실 더 흥미로운건 한 학기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내용이다. 블로그에 내 건축 작업을 올리고 설명한 적이 없어서 다소 부끄럽긴 하지만 한국에선 경험하지 못했던 특별한 수업이었기에 조금 소개해보겠다.




Por la mitad(반으로 만들기)

 소리아노(Federico Soriano) 교수님 반의 프로젝트 주제는 'Por la mitad(반으로 만들기)'다. 아직 지어지지 않는 세 개의 건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말 그대로 반으로 줄이는게 한 학기 프로젝트의 전부다. 하지만 '반으로 줄인다'라는게 단순히 리모델링이나 리뉴얼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먼저 대상 건축물을 분석하고 다이어그램화 한 뒤 물리적 실체는 날리고 데이터와 해석만을만 남긴다. 이후 분석한 데이터들 중에서 유지할 것과 반으로 줄일 것을 선택하여 새롭게 조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로직과 구성원리만 가지고 '반으로 줄여진 새 건물'을 설계하게 된다. 말이 좀 어렵다. 소리아노 교수님의 이런 프로젝트가 흥미로웠던건, 한국에서 늘 하던 '사이트'와 '컨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설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트도 의미가 없을 뿐더러, 반 친구들 프로젝트 중에는 심지어 땅에 박혀있지 않은 건물도 더러 있다. 

 아래에 그 간의 작업들을 시간 순서대로 첨부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만 아직 학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고 정리도 덜 된 부분이 있어서 패널만 첨부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할까 한다.

12 SEP diagrama


19 SEP parámetro


26 SEP diagrama planta y sección


03 OCT protoplanta y protosección


10 OCT maqueta y estructura


24 OCT materia y visibilidad


14 NOV construcción y economía


21 NOV 2 din A-0


21 NOV 2 din A-0


 마지막 두 도면이 마감에 가장 가까운 평면과 섹션이다. 소리아노 반 수업은 최종마감때 A0 두 장을 붙인 크기의 도면을 그려내는 걸로 유명하다. 지난 시간까지는 평면과 섹션이 각각 A0 사이즈였지만 조만간 크기를 더 키우고 디테일을 추가하게 될 것 같다.

이번 학기에 모형은 딱 한번 만들었다, 그것도 파스타 면으로!


 한 학기동안 이 반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많이 보고, 또 많이 배웠다. 처음에는 스페인어로 발표하고, 크리틱을 듣고 하는게 참 힘들었지만 점점 횟수가 거듭되면서 자신감도 찾은 것 같다. 무엇보다, 매 시간 놀라울 정도로 멋진 결과물을 가져오는 같은 반 친구들을 보며 자극도 많이 받고 느낀점도 많았다. 이제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곧바로 졸업전이다. 이곳 마드리드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얻은 모든 기억들이 좋은 약이 되리라 믿는다. 마감하고 기회가 되면 내 작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포스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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