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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마냐라 호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세렝게티 사파리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그래도 캠프사이트에서 두 밤을 자고 나니 처음에는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샤워실도, 등이 뻐근하도록 딱딱했던 텐트 바닥도 이제는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해볼 여유도 없이 어느새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널부러진 침낭을 말끔히 개고, 차곡차곡 배낭에 짐을 다시 챙겨 넣어보는데 덤불 속에서 벌레 한마리가 튀어나와 내 손등위에 앉았다. 자연 속에서 그들과 함께 숨쉬며 함께했던 시간들을 아쉬워 하듯 좀처럼 내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다른 손으로 벌레를 들어서 원래 있었던 풀숲에 살며시 놓아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폴짝폴짝 뛰어서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래, 정말 이제는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다.


벌들의 습격 덕분에 정신없는 아침식사를 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빼놓은 물건이 없는지 텐트 안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짐을 챙겨서 식당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 부터 주방이 부산스럽더니만 벌써 아침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토스트와 과일, 거기에 차를 곁들인 가벼운 식사다. 마침 꿀이 있길래 한스푼 듬뿍 퍼서 토스트에 발라 먹고 있는데, 달콤한 냄새를 어느새 맡았는지 순식간에 식당 안으로 벌들이 날아들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한 입 먹어보지만 역부족. 결국 한손에는 그릇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토스트를 집어 올려가며 멀리 떨어져 선채로 식사를 계속했다. 성미가 급한 꿀벌들 덕분에 아침부터 때아닌 전쟁이 한바탕 벌어진다.

체체파리가 있다는 말에 해충 기피크림을 온몸 가득 펴발랐다


 아프리카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예방접종이 필수다. 장티푸스나 간염, 말라리아는 꼭 맞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가능하면 미리 대비하는게 좋고, 황열병 같은 경우엔 국제공인접종인증서가 없으면 탄자니아 공항에서부터 입국자체가 거부되기도 한다. 출국 전, 국립 의료원에 들러서 이런저런 사전 교육을 받으며 가장 겁이났던 질병은 다름 아닌 수면병. 아프리카 초원지대에 서식하는 체체파리에 의해 전염되는 수면병은 걸리게 되면 하루종일 잠만 자다가 시름시름 죽어버리는 무서운 병이라고 한다.
 마냐라 호수나 응고롱고로에는 체체파리가 서식할만한 덤불이 없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사람 키만한 수풀과 덤불이 가득한 타랑기레 국립공원은 체체파리들의 천국이다. 걱정 반, 불안함 반으로 출발하기 전 해충 기피제를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후배 녀석은 벌써부터 볼멘 소리를 해댄다.

바오밥 나무와 코끼리. 어린왕자가 사는 별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게임드라이브의 마지막을 장식할 타랑기레 국립공원은 아루샤에서 남쪽으로 10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넓이가 26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공원은 무려 3500여마리의 코끼리가 서식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코끼리 서식지다. 나무가 거의 없던 응고롱고로 분화구와는 달리, 둘레만 해도 몇 십 미터는 족히 되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들이 가득해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지구를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오밥 나무와 그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코끼리를 보고 있으면 마치 어린왕자 책 속의 한 페이지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책 속에서는 별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 맹렬하게 자라던 바오밥 나무였지만, 실제로는 무섭기 보다는 오히려 친근한 존재라고 한다. 동물들이 쉬다 갈 수 있는 커다란 그늘이 되어 주기도 하고, 코끼리 들에게 수액을 내어주기도 하는 바오밥 나무는 아프리카 주술사들에게 신성시되는 존재다.


약속을 지킬때 자연은 더 아름답게 보인다


 해가 따갑게 내리쬐던 어제와는 달리, 제법 선선한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온다. 잘 닦인 타멕로드를 따라서 드디어 타랑기레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바오밥 나무가 먼저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워낙 넓은 공원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한 느낌이 든다. 우리 말고는 다른 지프도 잘 보이질 않고 동물들도 한결 더 여유로운 표정이다. 공원 초입에 세워진 '제한 속도 50km/h'라는 조그만 표지판은 우리에게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다녀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바람소리만 가득했던 타랑기레의 오후


 타랑기레의 지형은 꽤 역동적이다. 언덕을 오르는 듯 하더니만 어느새 또 내리막을 달리고, 자그마한 강을 건너고 나면 이내 늪지대가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사파리 3일째가 되서 그런지 지프가 계속해서 덜컹거리며 뽀얀 흙먼지를 일으킨다.
 이곳에서는 애써 멀리있는 동물들을 망원렌즈를 마운트해가며까지 찍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어제도 그랬듯 많은 야생 동물들이 눈 앞을 지나가지만,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 보다는 멋진 풍경과 울창한 나무들,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그 모습, 큰 그림을 보고 싶었달까. 어제까지의 게임 드라이브가 '나무'를 보는게 주였다면, 오늘은 '나무'를 보기 보다는 '숲'을 보는 게임이 아닐런지.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며 사파리에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정말 적절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어디를 봐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대 자연이 펼쳐진다


 드라이버도 여행자도, 다들 조금은 지친 모습이다. 지붕 뚜껑을 열어놓아도 아무도 올라서지 않는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게 더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따금씩 지프가 방향을 틀면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기도 한다. '대자연'이라는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웅장한 풍경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어 버린다.

이 죽일놈의 체체파리들!


 몸이 지친 까닭도 있었지만, 사실 피곤함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로 그 체체파리들 때문이다. 사진속에 보이는 녀석들이 바로 수면병을 옮긴다는 주인공, 체체파리다. 이름은 파리지만 한국에서 보는 자그마한 파리들과는 덩치부터가 차이가 난다. 갑옷을 두른듯 단단해 보이는 껍질과 튼실한 다리를 보게되면 지레 겁부터 먹기가 십상이다. 공원 안을 돌아다니며 잠시도 손이 쉴 틈이 없었다. 눈으로는 멋진 경치, 풍경을 즐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래로는 계속해서 달라붙는 체체파리를 쫒느냐고 연신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물리지 않더라도, 잠깐 피부에 닿는것만으로도 따끔거리는게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녀석들이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없는 체체파리들의 공격에 모두들 신경마저 날카로워졌다.




바오밥 나무는 참 타랑기레와 잘 어울리는 나무다


 자꾸 신경쓰이긴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창문을 닫으면 찌는듯한 더위에 수면병에 걸리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해본다.
 체체파리를 한손으로 계속 쫒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딜 둘러봐도 꼭 한그루씩은 보이는 바오밥나무가 묘한 스카이라인을 타랑기레 초원 위로 만들고 있었다.




참 순해보이는 임팔라들


 타랑기레에서 가장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동물은 임팔라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귀여운 표정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들. 하지만 지프가 가까이 다가가면 이내 반대편으로 도망쳐버린다.



기린도 코끼리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임팔라도 많지만 코끼리들은 더 많다. 반쯤 수풀사이로 가려진 채로 유유히 걸어가는 코끼리들은 마치 커다란 바위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게임 드라이브를 하는 3일 내내 코끼리는 매일 만났던 것 같다. 이제는 지겨워질 법도 한 코끼리들이지만 마냐라 호수와 응고롱고로, 그리고 이곳 타랑기레의 코끼리들은 어딘가 조금씩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색깔? 표정? 무엇일까.






이제는 코끼리 사진을 찍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워낙 코끼리가 많아서 사진을 찍기도 훨씬 수월하다. 뒷꽁무늬만 쫒으며 엉덩이만 찍어야 했던 첫날과는 다르게, 이제는 나름 먼저 기다려 보기도 하고 정면을 쳐다보는 사진도 꽤 가까이서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상아가 이렇게 큰 코끼리들은 세렝게티에서 또 처음이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는 건지, 차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길을 건너서 어디론가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타랑기레를 뒤로하고... 다시 아루샤로


 그렇게 한바퀴 타랑기레 국립공원 드라이브를 마치고, 이제 아루샤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못내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른 숙소로 돌아가 샤워도 말끔히 하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다. 아무래도 체체파리한테 하루종일 시달려서 더 그런 것 같다. 공원을 다 빠져나올 때 쯤, 이제 체체파리로 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다들 긴장하고 있어서 피곤했는지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다.

 타랑기레도 안녕, 세렝게티도 안녕. 언제 다시올 수 있을 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해본다. 마치 어린왕자의 작은 별에 잠시 다녀가듯, 바오밥 나무와 코끼리가 가득했던 탄자니아의 작은 별 타랑기레가 지프 뒤로 서서히 멀어져 간다.

모두들 안녕! 고마워!


 다시 타멕로드를 따라 아루샤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3일간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의 친구들. 수줍음이 많던 일본인 친구, 조금 깐깐해도 미워할 수 없는 캐나다 친구, 험난한 길을 열심히 운전해준 우리의 드라이버와 매일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던 쉐프까지. 서로의 이메일을 교환하고는 또 각자의 길을 따라 그렇게 헤어졌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 또 있을까. 함께 이야기하며 세렝게티를 누볐던 그들의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 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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