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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방청 페인트’일 줄로만 알았다. 아니, 그 빨간색이 '방청 페인트'가 아닐 거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쪽이 더 맞겠다. 흔히 말하는 '철골구조(Steel Structure)',  또는 더 정확한 표현으로 '강구조물'의 각 부분을 이루는 부재 표면에는 소위 '방청 도장'이라는 걸 하게 되어있다. 공기 중에 노출되면 금세 녹이 슬어버리니 특수한 도장으로 표면을 덮어 산소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사용되는 '방청 페인트'는 그 특유의 성분 때문에 붉은 빛깔을 띤다. 머릿속으로 공사 중인 현장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으레 붉으스름한 뭔가가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이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한창 공사 중이던 그 건축의 빨간색 또한 그런 사연으로만 여겼다. 그 색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파크원은 소위 '여의도에 새로 지은 그 빨간색 건물'로 통한다

김치, 고추장, 태극기, 곤룡포, 붉은 악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빨간색은 제법 친숙한 색이지만 이 건축에서의 평가만큼은 꽤 박했다. 입점한 쇼핑몰의 이름인 '더현대서울'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이 건물의 공식 명칭은 '파크원(Parc.1)'이다. 여의도 증권맨들 사이에서는 건물의 외벽을 따라 길게 솟아오른 빨간 기둥이 주식차트의 '양봉(Red Candlestick)'을 닮아 행운의 상징으로 불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단다. 

공식적인 언론 발표에 따르면 이 빨간색은 한국 전통건축의 '단청'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단청이라는 게 꼭 빨간색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설계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기에 으레 '경관심의' 따위를 통과하기 위한 핑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설계한 건축가 공식 홈페이지에도 똑같이 소개되어 있었다. 자의였을지 타의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파크원(Parc.1)은 사진 좌측의 숙박시설, 중앙의 판매시설, 우측의 업무시설 세 동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출처: c3korea)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파크원을 설계한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의 출세작이다(출처: The Economist)

파크원을 설계한 사람은 영국의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다. 꽤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출신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 공동으로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 현상설계에 당선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둘은 각각 2007년과 1998년에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다.

건축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파리를 여행하고 나면 1977년 준공된 이 오래된 미술관을 제법 잘 기억해낸다. 독특한 외관 때문이다. 가변성과 확장성을 극대화한 크고 자유로운 실내 전시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구조는 물론이고 각종 설비까지 건물의 모든 기능적인 것들을 밖으로 내보낸 건축이다. 심지어 외벽에 노출된 각종 배관과 덕트에는 기능에 따라 색깔을 칠해 더욱 파격적인 인상을 자아냈다. 전기는 노란색, 공조는 파란색, 수도는 초록색, 동선은 빨간색, 구조는 흰색 같은 식이다.

뒤로 보이는 업무시설의 빨간 기둥과 앞쪽 판매시설의 빨간 앵커, 모두 건물의 구조를 위한 부분이다
숙박시설 필로티 기둥에도 빨간색 마감재를 덧대어 구조를 표현했다

사실 파크원에 사용된 색상은 빨강 딱 하나뿐이다. 퐁피두 센터의 화려한 색상 조합에 비하면 다소 심심한 수준이고 그마저도 구조와 관련된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빨간색 자체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건축가의 다른 작업들을 살펴보면 분명 컬러 코드(color code)를 즐겨 사용하고 있지만 각 색상에 내포된 의미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바르셀로나의 투우장을 쇼핑몰로 리모델링한 라스 아레나스(Las Arenas) 프로젝트에서는 새롭게 추가된 구조 부분을 파크원과 동일하게 빨간색으로 표현했지만 퐁피두 센터에서 빨간색은 동선의 의미였다. 구조 부재에 색상을 적용했던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 T4에서는 빨간색이 아닌 노란색을 선택했다. 건축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국 런던의 로이드 빌딩은 아예 색상을 배제하고 금속 자체의 은백색이 주된 인상을 만든다.

바르셀로나 라스 아레나스(Las Arenas)의 구조체는 빨간색이다(출처: Archidaily)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 T4의 구조체는 노란색이다(출처: Archidaily)
대표작 영국 로이드 빌딩(Lloyd's Builindg)에는 별다른 색상이랄게 없다(출처: Archidaily)

표면에 덧칠해진 빨간색의 강렬함에 묻혀버렸지만 사실 색상보다 중요한 건 '구조' 그 자체다. 건축의 다른 부분들과 시각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빨간색은 사실 이 건물이 어떻게 중력과 바람에 저항하며 그 자태를 유지하고 서있을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히나 파크원에 적용된 대표적인 두 가지 구조 시스템은 일상적인 건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들이기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최고 높이 333m의 업무시설 외주부의 여덟 개 기둥 또한 빨간색이다

건축물에 작용하는 하중은 중력에 의한 '수직하중(축하중)'과 바람에 의한 '수평하중(횡하중)' 두 가지다. 그리 높지 않은 대다수의 건물에서야 바람에 의한 영향은 수직방향 하중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지만 초고층 건축에서는 얘기가 좀 다르다. 바람에 의해 좌우로 밀리고 뒤틀리는 힘으로부터 버티기 위해서는 별도의 ‘횡력 저항 시스템’을 도입해야만 한다. 파크원 업무시설의 빨간색은 바로 이 횡력 저항 시스템의 얼개를 보여준다.

횡력 저항 시스템의 종류, 왼쪽부터 순서대로 벨트 트러스/아웃리거/메가 브레이스

초고층 건축의 횡력 저항 시스템, 일명 '수퍼 스트럭쳐(Super Structure)'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벨트 트러스(Belt Truss)'와 '아웃리거(Out Rigger)'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벨트 트러스는 2~30개 층마다 마치 허리에 벨트를 두르듯 연속된 트러스(Truss)를 계획하여 건물의 거동을 일체화하는 방법이다. 보통 벨트 트러스가 있는 층은 구조체 간섭으로 인해 거주성도 나쁘고 시야도 가려서 공조실이나 기계실 등으로 할당되는 경우가 많다. 아웃리거는 바깥쪽(외주부) 구조체를 안쪽의 단단한 콘크리트 코어와 연결하여 강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적용됐다.

파크원의 초기 입면도에서 뒤집어진 V자 형상의 메가 브레이스를 확인할 수 있다(출처: 동양구조안전기술)
준공 사진에서도 메가 브레이스를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출처: c3korea)

'메가 브레이스(Mega Brace)'는 위 두 가지 방식과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해서 여러층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버팀대(Brace)를 계획하여 건물 전체가 강성을 가지도록 하는 방법이다. 초등학교 때 수수깡으로 구조물을 만들 때 한쪽 모서리에서 다른 한쪽 모서리로 대각선 부재를 하나 대면 엄청 단단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해외에서는 종종 사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파크원에 적용된 것이 최초라고 한다. 도면에 의하면 각 면마다 역 V자 형상의 대칭형 브레이스가 약 여덟 개 층마다 계획되어 있다.

당초 105층 초고층으로 계획되었던 현대 GBC도 메가 브레이스로 계획되었다(출처: 현대자동차)

메가 브레이스가 횡력 저항에 효과적인 방식임에도 많이 쓰이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결정적인 이유는 창가에 형성된 버팀대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탁 트인 시원한 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눈앞에 거대한 버팀대가 영 불편할 테니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밖에서 볼 때에도 건물 전체에 브레이스의 생김이 잘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방식을 택한 다른 건물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브레이스를 디자인 요소로 사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최근 무산된 현대 GBC 계획안에서 보이는 외벽의 X자 모양도 메가 브레이스다.

초기 조감도에서는 외벽으로 빨간색 메가 브레이스가 확연하게 드러난다(출처: 포스코건설)

파크원의 초기 조감도를 보면 메가 브레이스 또한 빨간색으로 칠해 눈에 잘 띄도록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깥으로 노출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반사도가 높은 유리 뒤에 숨어 완공된 현재는 밖에서 그 모습을 확인하기가 다소 어렵다. 층과 층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대각선 부재들이 숨어버리니 수직 방향의 빨간 기둥만 도드라져 다소 밋밋한 느낌만 남고 말았다. 건축에 적용된 특별한 구조 시스템을 디자인으로써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더현대서울의 거대한 천장은 이런 방식으로 케이블에 의해 들어 올려진다(출처: c3korea)
천장을 들어 올리기 위한 구조 시스템 또한 빨간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더현대서울로 불리는 판매시설 쪽의 빨간색은 조금 더 솔직하다. 지상에서 올려다보이는 건물의 외벽을 따라 각 두 개의 강철 케이블로 연결된 좌우 총 여덟 개의 빨간색 구조체는 ‘사운드 포레스트’라고 불리는 내부의 거대한 실내공간을 구현하기 위한 해법이다. 세 개로 나눠진 정방형의 지붕 구조체를 기둥 없이 공중으로 부양시키기 위해 마치 야영장에서 텐트 고정줄을 바닥에 망치질해서 찍듯 네 코너에서 줄로 당겨 내리는 방식을 택했다.

건물 옥상에서 살짝 삐져나와 케이블의 방향을 전환하는 구조체의 모양을 보고 ‘크레인’이라고 많이들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틀린 비유다. 줄은 크레인에 의해 위로 들어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레인에서부터 아래로 당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프랑스 프릿가드 팩토리(Fleetguard Factory, 1981)도 비슷한 방식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출처: dezeen)
건물 밖으로 삐져나온 크레인은 텐트 폴대(pole)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줄은 사실 아래로 잡아당겨지는 중이다

초고층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어 무감각하지만 사실 파크원의 최고 높이는 333m로 무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상징성이나 건축적 성취에 비해 여의도라는 입지상 서울 이곳저곳에서 하도 잘 보이니 '그 빨간 건물'은 구설에 오르기도 더 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직접 방문에 바깥을 한 바퀴 돌아보니 빨간색의 비중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고 그마저도 일종의 디자인 요소로서 가로등, 공공 시설물 등에도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 건축은 주변으로 보이는 비슷비슷한 투명한 유리 건물들 사이에서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 빨간색'이 그리 싫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어차피 강구조물의 표면 도장은 시간이 지나면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빨간색이 싫으면 그때 파란색으로 바꿔 칠하면 그만이다. 색깔에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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