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대학에 입학해 과제며, 술자리며 정신없이 흘러갔던 2006년. 열심히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내 인생의 첫 카메라 PENTAX me super와 함께 사진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5년째다. 사진은 찍는만큼 는다고, 경력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짧은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참 이런저런 사진들을 많이도 찍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필름 첫 롤 현상의 감동에서 부터 지난 사진들을 찬찬히 되돌아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이 스냅사진이다. 표준에 가까운 화각으로 늘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담는게 전부였던 나의 사진들. 편안한 그런 사진이 좋았지만 가끔은 큼지막한 망원렌즈로 모델도 찍고, 스튜디오 촬영도 해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여행하며 주로 풍경 사진을 찍는걸 즐기는 터라 12-24m..
유난히 골목마다 이슬람 사원이 많던 아루샤의 아침. 싸구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모를 노래와 종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나를 깨운다. 조금씩 밖은 밝아오지만 왠지 몸이 침대에 찰싹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질 않는다. 어제의 여독이 아직 덜 풀린걸까. 세렝게티 사파리를 떠나면 두 밤은 텐트에서 자야만 한다. 샤워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기는 또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벽을 등지고 돌아 누웠다. 머리맡에는 지난 밤에 보던 론니 플래닛이 펼쳐진 채로 놓여져 있다. 그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만나고 싶었던 세렝게티를 만나는 날이구나. 바로 오늘이구나.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샤워를 미리 해두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이곳에..
지난 토요일. 주말을 이용해 당일치기로 영월에 다녀왔다. 요새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게 너무 싫다. 멀리 여행이라도 가고 싶지만 그럴수도 없기에 기차라도 타고 싶어서 영월에 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는 곳이지만 왠지 모르게 기차를 타면 내가 멀리 떠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기차에 덧씌워진 이미지, 혹은 환상으로 나를 잠시 덮는 셈이다. 사진을 또 찍어보겠다고 가방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왔는데, 사실은 그냥 좀 걷고 싶은게 전부였다. 아무데도 못가고 하루종일 길바닥에서 걷다가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사람도 차도 없는 곳에서 그냥 좀 걷고 싶었다. 혼자 고독을 씹는 척은 다 해 놓고서는, 또 혼자 갈 용기는 없어서 학교 후..
답답한 지하철 보다는 시원스런 기차가 더 좋고, 제 갈길로만 가는 기차보다는 어디로든 달릴 수 있는 버스가 그저 좋았다. 서울에서 가장 혼잡하다는 2호선 신도림역. 매일 아침 그곳을 지나며 짜증이 나다가도 이내 터널을 빠져나와 신나게 고가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창 밖으로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다시 기운이 나곤 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달리는 이 길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또 어떤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질 지. 한 명, 또 한 명 일일히 눈을 마주쳐가며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멀게만 느껴지던 목적지도 한 달음에 닿곤 한다. 그래서 였을까. 다르에스살람에서 아루샤까지는 버스로 6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먼저 푹 내쉬는 후배녀석을 앞에 두고 괜히 혼자 또 설레..
여기가 어디일까. 답답한 마음에 누가 내 지도를 빼았어서 손가락으로 콕 하고 찍어주는 상상도 해본다. 벌써 한 시간 째, 스톤타운 외곽 어느 길가에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능궤 행 미니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중이다. 오전 보다 더욱 맑아진 하늘 아래로 내 어깨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참 얄밉다. 버스 정류장이라고는 하지만 변변한 그늘 조차 없는 덕분에 시원한 콜라로 더위를 식히는게 전부다. 하지만 그 전에 지루해서 먼저 지칠 노릇이다. 그렇게 한 시간 쯤 더 지났을까. 드디어 저 멀리서 조그만 봉고차가 한대 이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멈춰선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이미 자리가 없는 버스. 뒷 좌석 창문으로 힘겹게 내 배낭을 구겨넣고는, 이내 나 역시 배낭처럼 구겨진 채로 들이밀어 진다. 스톤타운이 인도 바..
'내일 뭐할거야? 스파이스 투어라는게 있는데 아주 싸고 재미있어. 해보지 않을래?' 잔지바르에 도착하자마자 파파시(papasi, 일종의 호객꾼)들이 벌떼처럼 달라붙기 시작한다. 아직 오늘 하루도 뭐 할지 모르겠는데 내일 일정부터 먼저 짜주려고 다들 아우성이다. 쏘리, 노땡큐를 연발해가며 힘겹게 그들을 따돌렸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는 과거 중개무역의 요지였다. 따사로운 열대의 기후와 비옥한 토질이 맞물려 많은 향신료와 과일들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기도 했고, 그곳에서 혹은 더 먼 곳에서 일을 하기 위한 노예들이 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짐짝처럼 팔려 나가기도 했다. 아픈 기억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스파이스 투어'라는 가장 인기있는 여행 상품이 되었다. '스파이스'는 향신료, '스파이스 투어'는 ..
간밤에 내내 잠을 설쳤다. 찐득찐득한 땀냄새가 진하게 베어있는 침대커버는 몸이 닿을 때 마다 찰싹 달라붙어 따라 올라오고, 침대를 통째로 감싸는 모기장은 어디가 뚫려있는건지 당최 제 기능을 못한다. 윙윙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손을 휘젓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전날의 피로가 풀릴리 만무하지만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길 생각을 안한다. 대충 고양이 세수로 눈꼽을 떼고는 조금 이른 시간 밖으로 나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깜깜하지만 15달러인 숙소와 가격이 두배긴 해도 선풍기가 돌아가는 숙소, 그래도 첫날이니 더워서 잠을 못자는 일은 없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비싼 돈을 주고 짐을 풀었건만 밤새도록 돌아가는 발전기 소리때문에 선풍기가 돌고있는지 내가 돌고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사진을 시작하면서 부터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가방, 돔케. 지나치게 높은 가격으로 인해 그림의 떡일 뿐이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어 사용해볼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써보니 알겠다. 왜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도 사람들이 이 가방에 열광을 하는건지. 카메라 가방이라는건 사진사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 있는 듯 없는듯 묵묵히 제 자리에서 할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방. 어쩌면 돔케야 말로 그런 가방의 본분을 다 하고 있는 가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으로 더 오래 사용해봐야 하겠지만 오래두고 쓰면 쓸수록 더 정이들것만 같은, 그래서 친구같이 서로에게 길들여 질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