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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은 층과 층을 연결하는 아주 기본적인 건축 요소이다. 기원전에 세워진 지구라트(Ziggurat) 정면에 긴 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떠올려보면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계단은 사실상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 수 백 미터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 전 세계에 천여 개가 넘고* 불과 수 초 내로 엘리베이터가 몇십층을 오르내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은 지금 사는 아파트나 근무하는 사무실의 계단실을 얼마나 자주 이용하는가?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걸어 다니지 않는 이상 계단실에 들어가 볼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고층건물의 계단을 법에서 부르는 이름조차 '특별피난계단'이다. '특별히 피난할'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모르고 살아도 될 것만 같은 공간의 이름이 아닌가. 이쯤 되니 계단실이라는 공간에 대한 연민과 함께 묘한 노스탤지어마저 느껴진다.


단지 이 건물을 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르세유를 찾았다.


 계단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건 마르세유에서였다. 우리는 1952년에 완공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 habitation)'을 보기 위해 이 도시를 찾았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구현한 '새로운 유형의 주거건축', '주상복합과 아파트의 원형', '도시처럼 작동하는 수직적 집합주택'...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 기념비적인 건축은 마르세유 남쪽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지상 12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총 337가구를 수용하도록 설계된 공동주택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선 직접 살아보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럴 수 없어 딱 하룻밤만 묵어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곳에는 70년이 넘도록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으며 중간 한 개 층은 '호텔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 아래 정식 숙박시설로 운영 중이다.


지상층의 거대한 콘크리트 필로티, 마치 선박의 용골을 보는 듯하다.

인상적인 캐노피 아래의 주 출입구

로비와 엘리베이터 홀의 전경, 아... 벌써부터 좋다.


 흙으로 잘 빚은 것만 같은 조형적인 콘크리트 필로티와 캐노피를 지나, 유리블록으로 한쪽이 치장된 로비를 거쳐, 기하학적 나무 창살이 인상적인 호텔 카운터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약한 방은 발코니가 있는 수페리어룸으로 지중해를 향해 멋진 뷰를 가졌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벽장, 주방가구, 의자, 조명기구...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좀 오래되어 퀴퀴한 나무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무슨 대수랴. 신이 나서 방방 뛰는 내 모습을 보곤 아내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다.


수페리어 룸의 전경, 벽면의 조명과 환풍구가 인상적이다.

상점가가 들어선 5층 복도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이 있는 7층 복도


 이곳에선 '방'이 곧 '집'이고 '복도'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슈퍼, 담배가게, 식당, 서점, 마사지샵 등 온갖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옥상에는 유치원과 수영장, 조깅트랙까지 있다. 그야말로 도시의 모든 기능을 한데 모아놓은 복합건물인 셈이다. 지금이야 이런 건물을 두고 간단하게 ‘주상복합'이라고 부르면 그만이지만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지어지던 1950년대만 해도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대부분의 상점이 여섯 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짐만 옮겨 두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막 셔터를 내리려던 서점에 들어가 건물의 입면을 담은 멋진 그림 한 장을 구매했다. 슈퍼마켓에도 들러 밤에 마실 물도 한 통 샀다. 건물 구석구석을 훑으며 옥상정원까지 오르니 말 그대로 ‘도심 산책’이 따로 없었다.


매력적인 물건이 참 많았던 서점

이 건물의 옥상정원 또한 매우 유명하다.

엘리베이터 홀, 왼쪽 끝으로 돌아 들어가면 계단실이 있는데...


 사실 계단실에 들어가 보는 건 계획에 없었다. 옥상정원 구경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내 시야에 작은 문 하나가 들어왔다. 위치로 보나 인방에 붙은 비상구 표지로 보나 계단실이 분명했다. 현대 도시민인 내 기준으로는 굳이 들어가 볼 필요 없는 공간이었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나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방문한 이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했다.


아니, 이렇게 멋진 계단실이라니...

앙증맞은 도어 스토퍼와 조명등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잘 생각해보니 원목을 덧댄 손잡이의 멋스러움에 끌려 이 문을 열었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제 아무리 르 코르뷔지에라도 계단실마저 열심히 만들었을까 하는 다소 바보 같은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나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바닥, 벽, 천장, 난간, 조명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조직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채 담아지지 않지만 두 개의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까지 더해져 감동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손 끝으로 철재 난간, 화강석 모서리, 황동 배관 하나씩을 천천히 애무하듯 훑으며 열개 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아쉽게도 보안 때문에 2층에서 철문이 가로막고 있어 계단실을 나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제자리를 돌아 열 두 개층을 내려온 계단은 필로티를 관통해 현관 옆으로 툭 하고 뻗으며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계단실을 끝까지 내려오면 이렇게 바깥으로 연결된다.

좌, 우측 주거 입면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가 계단실과 엘리베이터 홀이 있는 공용부다.


 문득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마르코폴로가 여행 중에 들렀던 도시들을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하며 설명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책 속에는 가상의 도시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중 '자이라'라는 도시에 대해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시의 가치는 위대한 건축물 몇몇에 있는 게 아니라 거리의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열 개층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공간을 구성하는 재료와 색채는 각 층의 문을 열고 나가면 만나는 기능에 따라 달라졌으며 매 높이마다 창문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의 풍경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두고 '도시'라 칭할 수 있는 건 기념비적인 옥상정원의 굴뚝이나 공중의 상점가 때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수직으로 적층 된 '방'과 '복도'들은 마침내 계단실을 통하며 이어지기도, 때로는 끊어지기도 하며 다채로운 풍경의 '도시공간'을 완성하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초고층건물의 계단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자. 임대료가 높은 창문가 대신 내부에 구획된 계단실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태양의 그림자가 드리울 방법이 없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을 공간이니 구태여 돈을 들여 불필요한 색채도, 장식도, 형태도 도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비상시에 안전하게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통로 폭과 불에 타지 않는 재료만 만족하면 그뿐인 공간이다. 계단실이 우리 뇌리에서 잊혀간 건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호텔 르 꼬르뷔지에'에는 '건축가의 배(le Ventre de l'Architect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

과연 건축가의 배를 채우기에 충분한 멋진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니 어느새 지중해 너머로 붉은 노을이 저물어간다.


 건축가는 경제적 논리만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업가여서도 안되고,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충실히 수행하는 서비스직도 아니며,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는 엔지니어여서도 안된다. 다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더라도 기어이 그렇게 하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쓰이고, 읽히고, 닳아가는 도시 공간을 만드는 직능에 불과할 따름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 중복도를 감싸는 복층 주거 유닛에서 건축가의 공간감각을, 옥상정원의 거대한 굴뚝 아래서 건축가의 조형감각을, 입면을 수놓은 색색의 차양막과 개구부의 비례에서 건축가의 미적 감각을 생각했다. 그리고 계단실에서 내가 건축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마침내 생각했다. 난 그곳에서 칼비노의 자이라를 걸었고, 코르뷔지에의 도시를 탐닉했다. (계속)


*젊은 건축가의 프랑스 휴가기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카카오 브런치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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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대한민국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초고층건축물'이란 높이 200m 또는 50층 이상의 건축물을 뜻하며, 세계초고층도시건축학회(CTBUH)에 따르면 2020년 5월 현재 높이 200m 이상의 초고층건축물은 전 세계에 총 1,622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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