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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2년을 묵혀뒀던 인도 여행기. 이제는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밀린 여행기를 쓴답시고 하루가 멀다하고 여행사진을 꺼내어 보고, 또 다시 보고 그러는 시간들이 참 좋았다. 벌써 먼 옛날 일이 되어버렸지만 사진을 주욱 훑어보고 있노라면 마치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한데... 그래서 여행기를 마치는 것조차 아쉽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모르게 여행기를 천천히 썼던걸지도 모르겠다.

현정누나, 경훈이형, 정민이형...보고싶은 사람들

 

 델리를 떠나던 그날 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름도, 얼굴도 서로 몰랐던 네 남녀가 함께 모여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나와 정민이형은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떠날 예정이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도 여정이 많이 남아있던 터. 우리는 우리대로 여행이 끝나는게 아쉬워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은 그들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부러워했다. 떠나는 그 날까지 어찌나 날씨가 덥고 습하던지 비행기에서 입으려고 미리 빨아둔 옷은 물에 푹 담궜다 뺀 것처럼 축축해져 버렸다.


현정누나가 써준 편지. 이보다 더 멋진 선물이 또 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직 여정이 남은 두명의 방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겼다. 한달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차분히 마지막 짐을 꾸리다보니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더라. 그렇게 마지막으로 크로키북을 가방에 집어넣으려는데 뭔가 종이 한장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한달여를 인도에서 울고 웃고 함께했던 현정 누나의 편지였다.

 원래는 나 몰래 노트에 숨겨서 나중에 보게 할 생각이라고 했는데 너무 빨리 들켜버려서 아쉬워 하던 누나. 대신 편지의 내용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읽어보기로 약속했다. 비행기에서 몇번이고 다시 편지를 읽어보는데... 괜시리 코끝이 찡해졌었다. 여담이지만 지난주 부산 여행을 하며 현정 누나를 다시 만났다. 집이 서로 멀어서 인도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기에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나도 누나도 그때보다 두 살씩 더 먹고서야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돌아가는 기차시간 때문에 한 시간도 채 안되어 헤어져야 했지만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2년전 인도 얘기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시 인도로 돌아가보자. 일행중 막내였던 나는 생각치도 않았던 작별의 선물을 잔뜩 받았었다! 귀걸이나 팔찌같은 인도 기념품부터 편지까지.... 나도 뭔가 추억이 될만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생각했던게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거였다. 사실 인도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열심히 크로키북을 한쪽에 끼고 돌아다녔지만 푹푹 찌는 날씨와 정신없는 거리에 지쳐서 그리 많은 그림을 그리진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인도에서 그리는 마지막 그림은 정말 제대로 그려보고 싶었다!

유쾌한 낭만여행자 경훈이형


 이건 내가 그려준 경훈이형의 캐리커쳐다. 사실 난 사람이나 동물을 그리는덴 소질이 그다지 없는 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도시나 건물같은 무생물만 그릴줄 아는 전형적인 건축학도다. 그래도 열심히 그린다고 그려봤는데 실물과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다.

 경훈이형은 처음 한국에서 델리로가는 비행기에서 만나 제썰메르까지 동행했던 사이다. 제썰메르를 떠나면서 우리는 마운트 아부, 형은 남부지방으로 갈라졌지만 운명처럼 바라나시 길거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결국 델리까지 함께 오게되어 나의 여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게 되었다. 인도에 온 이후로는 늘 저렇게 체크무늬 머리띠를 하고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다니던 경훈이형. 집이 제주도라 한국에 온 후로는 한번도 보질 못했다. 지금은 어떻게 또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문득 보고싶어 진다.

좌충우돌 터프 여행자 현정누나


 이번엔 현정누나의 캐리커쳐. 이건 사실 여행중반 오르차를 여행하면서 미리 그려둔 그림이다. 인도에서 늘 함께 다니다보니 몰래 그림을 그릴 기회가 없었는데, 오르차에서 마침 아파서 일찍 잠든 사이에 카메라에 있던 사진을 보면서 열심히 그렸다.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배낭을 메고 늘 낑낑거리던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림에도 배낭을 큼지막하게 넣었다. 물론 앞서 말한것처럼 사람은 잘 못그리는 편이기에 실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더 예쁘게 그려주지 못해서 미안^^;

내가 그린 나의 모습. 하지만 별로 안닮았다는 혹독한 평가ㅠㅠ


 이건 내가 그린 내 캐리커쳐다. 일종의 자화상이랄까. 델리로 돌아오기전 바라나시에서 숙소에 모여 여행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그렸던 그림이다. 그날 내가 경훈이형의 캐리커쳐를 그려주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술자리가 그림대회로 변해버렸다! 나도 좀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다들 손사래를 치길래 모범답안(?) 삼아 자화상을 그려본건데 다들 실물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다면 형, 누나들이 그려준 내 모습은 어땠을까?

경훈이형이 그려준 내모습... 마치 고시생같군ㅠㅠ


 이건 경훈이형이 그려준 내 모습이다. 내가 볼때는 실물과 1%도 비슷하지 않아 보이지만(형 미안...) 어쨌거나 작가의 작품세계는 자유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후대에 값이 크게 오를지도 모른다며 그림 한켠에 큼지막하게 사인까지 해주는 센스!

현정누나가 그려준 내모습은 교과서에 나올법한 철수(?)처럼 생겼다^^


 이건 현정 누나가 그려준 내 얼굴이다. 이것도 실물과 썩 비슷하지는 않아보이지만 어찌나 정성스레 그리던지! 손을 대면 댈수록 자꾸 다른 사람이 된다며 울상이던 누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누나가 찍어준 인도에서의 마지막 내모습. 공항으로 가는 릭샤.


 그렇게 그림으로 시작한 여행은 그림으로 끝을 맺었다. 인도에 도착한 첫 날,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조차 없는 허름한 숙소 침대에서 방의 모습을 그리던 내 크로키북에는 이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과(엄밀히 말하면 원본은 선물로 줬으니 나한텐 사진만 남아있지만) 그들이 그려준 나의 얼굴까지 담겨있게 되었다. 너무나 더웠고, 또 너무나 정신없는 인도에서의 하루하루는 일기를 쓸 여유조차 주지 않았기에 아쉽게도 글로 된 기록은 단 한장도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기록보다 생생하고 또 선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 담긴 여러장의 그림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때 그 여행을 영원히 담아낼 수 있을것만 같다.

 지금도 인도에 들고갔던 크로키북을 펼치면 희미하게나마 특유의 마살라 향이 풍겨오는것만 같다. 또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그렸던 그림에는 아직도 그때의 모래가루가 노랗게 묻어나온다. 글은 사진보다 더 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고, 그림은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2009년 여름의 인도에서의 기억은 나의 크로키북이 내 책꽃이에 꽃혀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끝)
그동안 인도 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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