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하루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쌀쌀했던 4월의 도쿄 날씨는 자꾸만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출장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자유시간이다. 일정과 일정 사이에 생기는 자투리들을 잘 모으면 나름의 짧은 답사를 다녀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본연의 업무에는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이다. 다만 그런 시간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뭔가를 미리 계획 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마음속에 미리 후보지를 두어 군데 점 찍어 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날은 오전 4시에 미술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 참석을 제외하고는 오전 내내 일정이 비었다. 전시와 관련해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여유삼아 남겨놓은 시간이었는데 다행히도 일이 잘 끝나 남는 ..
외로운 출장지에서의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저녁 약속이 생겼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까지 내리 동창인 친구와 신주쿠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그녀는 꽤 오래 다녔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지금은 도쿄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는 중이다. 한국에서부터 출발 전부터 약속해놓은 일정이었지만 미술관에서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확답을 못하던 차였다. 다행히 실력 좋은 설치 엔지니어들을 만난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치고 예정대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도리어 약속시간 까지 여유가 조금 생겨버린 상황.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시부야부터 신주쿠까지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하라미술관에서 제일 가까운 역인 기타시나가와에서 시나가와까지 한 정거장, 다시 JR 야마노테선으로 갈아타 다섯 정거장만 더 가면 시부야 ..
다행히도 간밤에 모형에는 별 일 없었다. 나 역시 그 옆에서 곤히 단잠을 잤다. 오늘의 첫 일정은 미술관으로 모형을 운반하는 것인데 개관 시간이 열시인 관계로 아침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졸린 눈을 비비고 내려와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앙증맞은 모양은 물론 색깔마저 아기자기한 일본식 조식을 한 접시 가득 담았다. 미소장국과 밥을 기본으로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츠케모노(절인 채소)까지 곁들인 전형적인 일본 가정식이다. 아무래도 일본 회사원들이 출장으로 많이 오는 비지니스 호텔이다 보니 아메리칸 식 보다는 일본식을 택해 타지에서도 '집밥' 느낌으로 편안하게 해주려는 배려 같았다. 물론 나 같은 외국인 손님게에 있어서 만큼은 일본으로 온 출장의 기분을 한껏 더 살려주는 좋은 한 끼 였지만 말이다. 가볍게 ..
이번이 일본으로의 세 번째 출장이다. 지난 2013년, 난생 처음으로 대형 쇼핑몰 설계를 맡게 되어 롯본기 힐즈나 미드타운 따위의 사례답사 차 도쿄에 왔었고 2015년에는 또한 처음으로 기념관 설계를 맡아 부산에서부터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들어와 기타큐슈, 야마구치, 히로시마를 돌며 여러 기념관 들을 돌아봤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도쿄 남부의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하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참가작품을 설치하는 일이다. 모형과 영상, 벽면 패널이 설계한 대로 잘 설치되는지 감독하고 오프닝과 큐레이터토크 까지 보고 오면 나의 임무는 완수다. 오후 비행기라 아침에 캐리어를 끌고 출근했다가 회사차를 얻어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차피 동행없이 가는 길이라 공항버스를 타고 가도 그만이지만 미술관까지 가져가야하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