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장마철이다. 아프리카에 다녀온게 지난 2월이었으니, 어느새 반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시간은 야속할정도로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야심차게 여행기를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서 자유롭게 연재했었고 17부작이라는 나름 스펙터클한(?) 스케일로 무사히 마무리를 지었다. 작년 인도 여행기가 아직도 파테푸르시크리에서 멈춰 지지부진 하고 있는걸 생각하면 이번 아프리카 여행기는 밀도있게 끝맺음을 잘 한것 같다. 여행의 기억이 서서히 흐려져 갈 즈음, M25 에디터로부터 메일에 답장이 왔다. 본래 카타르 항공권을 지원받으면서부터 여행기를 연재하기로 했었는데, 그 일정과 분량이 확정된 것이다. 세렝게티 한 편, 잔지바르 한 편 해서 총 두 편으로 연재되고 각각 2페이지 정도 ..
영하 10도의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던 한국의 2월. 두툼한 점퍼와 목도리를 풀어 헤치고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아프리카에서의 여정도 이제 마지막 몇 시간만을 남기고 있다.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지만 천천히 짐을 챙겨 케냐에서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시간을 보냈다. 갑작스럽게 바뀐 날씨에 적응을 못하고 잠 못 이루던 잔지바르에서의 첫 날 밤, 비포장 도로에서 덜컹거리며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먼지를 뒤집어 쓰던 기억, 난생 처음 맛보는 악어 고기로 배를 두둑히 채웠던 마지막 저녁식사. 처음엔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게만 느껴졌던 모든 일이 어느새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었다. 공짜 항공권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계획조차 하지 않았을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그래서 ..
'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겁고,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키스 처럼 달콤하다' - 탈레랑 그는 짧은 한 문장으로 커피를 묘사했다. 티스푼 네 개 분량의 원두와 한 잔의 물이 만들어 내는 마법, 커피. 이 악마의 음료는 어느새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탈레랑의 묘사 처럼 커피 한 잔에는 수많은 맛과 향이 담겨있다. 처음엔 혀끝이 찌릿하도록 쓰다가도 이내 새콤한 향이 입안을 맴돌다가, 목구멍을 타고 흐른 뒤에는 달콤한 뒷맛이 여운처럼 남는게 바로 커피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기쁨, 슬픔, 고통, 환희, 모든 감정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달콤한 커피향은 추억을 만드는 묘약이다. 그래서 또한 여행하며 마셨던 커피의 맛은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하늘빛이..
유난히 골목마다 이슬람 사원이 많던 아루샤의 아침. 싸구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모를 노래와 종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나를 깨운다. 조금씩 밖은 밝아오지만 왠지 몸이 침대에 찰싹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질 않는다. 어제의 여독이 아직 덜 풀린걸까. 세렝게티 사파리를 떠나면 두 밤은 텐트에서 자야만 한다. 샤워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기는 또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벽을 등지고 돌아 누웠다. 머리맡에는 지난 밤에 보던 론니 플래닛이 펼쳐진 채로 놓여져 있다. 그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만나고 싶었던 세렝게티를 만나는 날이구나. 바로 오늘이구나.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샤워를 미리 해두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이곳에..
답답한 지하철 보다는 시원스런 기차가 더 좋고, 제 갈길로만 가는 기차보다는 어디로든 달릴 수 있는 버스가 그저 좋았다. 서울에서 가장 혼잡하다는 2호선 신도림역. 매일 아침 그곳을 지나며 짜증이 나다가도 이내 터널을 빠져나와 신나게 고가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창 밖으로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다시 기운이 나곤 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달리는 이 길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또 어떤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질 지. 한 명, 또 한 명 일일히 눈을 마주쳐가며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멀게만 느껴지던 목적지도 한 달음에 닿곤 한다. 그래서 였을까. 다르에스살람에서 아루샤까지는 버스로 6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먼저 푹 내쉬는 후배녀석을 앞에 두고 괜히 혼자 또 설레..
여기가 어디일까. 답답한 마음에 누가 내 지도를 빼았어서 손가락으로 콕 하고 찍어주는 상상도 해본다. 벌써 한 시간 째, 스톤타운 외곽 어느 길가에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능궤 행 미니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중이다. 오전 보다 더욱 맑아진 하늘 아래로 내 어깨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참 얄밉다. 버스 정류장이라고는 하지만 변변한 그늘 조차 없는 덕분에 시원한 콜라로 더위를 식히는게 전부다. 하지만 그 전에 지루해서 먼저 지칠 노릇이다. 그렇게 한 시간 쯤 더 지났을까. 드디어 저 멀리서 조그만 봉고차가 한대 이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멈춰선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이미 자리가 없는 버스. 뒷 좌석 창문으로 힘겹게 내 배낭을 구겨넣고는, 이내 나 역시 배낭처럼 구겨진 채로 들이밀어 진다. 스톤타운이 인도 바..
'내일 뭐할거야? 스파이스 투어라는게 있는데 아주 싸고 재미있어. 해보지 않을래?' 잔지바르에 도착하자마자 파파시(papasi, 일종의 호객꾼)들이 벌떼처럼 달라붙기 시작한다. 아직 오늘 하루도 뭐 할지 모르겠는데 내일 일정부터 먼저 짜주려고 다들 아우성이다. 쏘리, 노땡큐를 연발해가며 힘겹게 그들을 따돌렸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는 과거 중개무역의 요지였다. 따사로운 열대의 기후와 비옥한 토질이 맞물려 많은 향신료와 과일들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기도 했고, 그곳에서 혹은 더 먼 곳에서 일을 하기 위한 노예들이 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짐짝처럼 팔려 나가기도 했다. 아픈 기억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스파이스 투어'라는 가장 인기있는 여행 상품이 되었다. '스파이스'는 향신료, '스파이스 투어'는 ..
간밤에 내내 잠을 설쳤다. 찐득찐득한 땀냄새가 진하게 베어있는 침대커버는 몸이 닿을 때 마다 찰싹 달라붙어 따라 올라오고, 침대를 통째로 감싸는 모기장은 어디가 뚫려있는건지 당최 제 기능을 못한다. 윙윙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손을 휘젓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전날의 피로가 풀릴리 만무하지만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길 생각을 안한다. 대충 고양이 세수로 눈꼽을 떼고는 조금 이른 시간 밖으로 나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깜깜하지만 15달러인 숙소와 가격이 두배긴 해도 선풍기가 돌아가는 숙소, 그래도 첫날이니 더워서 잠을 못자는 일은 없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비싼 돈을 주고 짐을 풀었건만 밤새도록 돌아가는 발전기 소리때문에 선풍기가 돌고있는지 내가 돌고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