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의 세번째 밤, 호스텔 복도의 작은 조명아래 앉아 맥주에 안껏 취한 채 펜을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본 야간열차는 생각보다 많이 편했다. 잠든 승객들을 태우고 밤새 국경을 넘는 야간열차. 피곤함도 잊은채 그 낭만에 젖어 둘째밤을 그렇게 보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편하기만 한것도 아니었다. 밤새 뒤척이며 이렇게도 누웠다가 또 저렇게도 누웠다가 하며 아마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 것 같다. 아침이 밝았다. 뮌헨까지는 아직 한시간정도 남은 시각.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들판의 햇살로, 졸린 눈을 비비고 눈을 떳다. 확실히 침대에서 잔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온몸이 쑤셨지만, 마트에서 사 두었던 우유와 미숫가루로 아침을 해결하고 본격적인 독일에서의 하루를 힘차게 시작했다. 야간열차에서 밤을..
아침 7시, 졸린눈을 비비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라본 하늘은 다시 한번 나를 실망시켜버렸다. 유럽에서의 둘째날 역시 거센 비바람과 함께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첫날만큼은 호텔에서 잘 수 있었기에 아침은 뷔페식으로 거하게 먹을 수 있었다. 간만에 배불리 먹고 밖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도대체 비싼 돈주고 사온 내 썬그라스는 언제쯤이나 필요하게 될런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아보인다. 매주 금요일은 암스테르담 옆의 조그만 도시인 알크마르(Alkmaar)에서 '치즈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비가오는 날에도 시장이 열릴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알크마르행 열차에 지친 몸을 맡겼다. 암스테르담에서 알크마르까지는 약 45분정도 걸린다. 열차밖으로 보이는 양과 소들. 유럽의 이국적인 전원은 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어느나라에서든 기차역 앞에는, 뒷골목을 따라서 홍등가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네덜란드는 성에대해 개방적인 나라', '마약이 합법인 나라'와 같은 말을 수도없이 들었고, 홍등가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나가서 본 홍등가의 느낌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작년 이맘때 용산을 무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용산역 근처의 홍등가를 본 적이 있다. 야한 속옷차림의 여자들이 새빨간 불빛아래서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은 그당시 나에게 꽤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용산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말그대로 '성'을 주제로한 하나의 축제같은 분위기였달까. 우..
7월 4일 오후 8시,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경유해 암스테르담 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꼬박 14시간.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탄 케세이 퍼시픽 비행기는 한국가요를 들을수도 있었고(심지어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까지 한국인 DJ가 들려주었다) 한국영화를 볼 수도 있었기에 지루하지 않게 네덜란드까지 올 수 있었다. (오는동안 '미녀는 괴로워'를 즐겁게 감상하면서) 졸린눈을 비비고 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공항에 내린 시각은 아침 6시 30분.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창밖으로 본 유럽의 하늘은 실망스럽게도 너무나 흐렸다. 설마 여행 첫날부터 비가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결국 상상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첫날뿐 아니라 이후 한달 내내, 맑은 하늘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심지어 스위스에서는 우..
30일간 펼쳐질 스무살의 유럽 여행을 시작하며... 2007년도 어느덧 7월이다. 2학년이 되면서 후배들도 들어오고, 전공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던 한학기였다. 영어공부도 좀 해보려 했고 1학년때 정신없이 보낸 한 해와는 조금 다르게, 요령도 생기고 나름대로 멋진 1년을 보내보려 했지만 막상 학기가 끝나고 나니 지난해보다 크게 나아진게 없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도 했었다. 특히 시간이 없다는 뻔한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 가면서 미루어 왔던 일들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이제 스무살, 스스로의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나이이다. 그런면에서 볼때 2007년은 아직까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학에 들어와서 과외를 시작하고, 돈을 모으면서부터 유럽여행에 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은 1892년 12월에 세워진, 중림동 약현성당(藥峴聖堂)이다. 지금까지도 교회당으로 계속 이용되고 있으니, 벌써 그 역사가 120년에 가까워 지고 있는 셈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 252호로 지정되었으나, 가치있는 문화재 관리에는 허술했던 모양인지, 1998년 화재로 지붕 및 내부가 소실되는 일이 있었다. 현재의 약현성당은 2000년 복원 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모습이다. 약현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으로써의 의미도 가지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물로써 건축사적 의미를 가진다. 덧붙이자면, 완벽한 고딕양식은 아니며, '준 고딕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이라 하면 대부분 머리속에는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래된 성당의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