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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 크게 한 번 출렁이는 차축의 진동이 창문에 기댄 내 머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시 스무 살 나이에 유럽을 배낭여행 중이던 나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를 출발해 '생폴 드 방스'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순간 안내방송에서 들리는 '방스'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가방을 챙겨 버스를 내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가이드북에 나온 마을 사진과 영 딴판인 게 아닌가. 분명 '방스'라고는 했는데 여기가 정말 '생폴 드 방스'가 맞는지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친구들과 상의 끝에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생폴!'이라고 소리 지르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운 좋게도 푸조 한 대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버스를 내린 곳은 '방스(Vence)'라는 마을이었고 '생폴 드 방스(Saint-paul-de-Vence)'는 남쪽으로 무려 6km나 떨어진 전혀 다른 마을이었다. 마음씨 좋은 운전자 아저씨가 아니었더라면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닐 뻔했었던 젊은 날의 추억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생폴 드 방스(2007년 필름 촬영본)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한번 '방스'와 '생폴 드 방스'의 갈림길에 섰다. 마을의 풍경이나 울창한 나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아름다움에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해야만 했던 그때와는 달리 운전을 할 수 있으며, 똑똑한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을 가졌고, 옆 자리엔 예쁜 아내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번엔 '방스(Vence)'에 가보기로 했다. 안내방송을 잘못 들어서 실수로 도착한 게 아닌 순전히 내 의지에 의해서 말이다. 오래전 매듭짓지 못했던 '방스'와의 인연의 끈이 나를 새로운 마을로 이끄는 것만 같았다.

휴가철 막히는 고속도로는 프랑스에서도 똑같다. (정차 중에 촬영)

 생폴 없는 '방스'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숙박비였다. 7월은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여름휴가철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비해 훨씬 길고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이들은 매년 여름이면 지중해를 향해 남으로, 남으로 대대적인 여행길에 오른다. 그 때문인지 니스, 깐느와 같은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생폴 드 방스'의 호텔 또한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만실이었다. 

 발품을 조금 판 끝에 '방스'에는 괜찮은 호텔이 몇몇 남아있는 걸 알게 되었다. 가격도 적절했고 위치도 내일 아침 귀국 편을 탈 니스 국제공항에서도 차로 30분 남짓 거리에 불과하니 휴가에 마지막 밤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위치이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생폴 드 방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다.

한 10분쯤 더 산속으로 들어가면 같은 이름, 다른 모습의 '방스'가 나온다.

 창 밖으로 생폴 드 방스가 스쳐 지나간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계속해서 북쪽으로 차를 몰자 이내 엔진에서 굉음이 날 정도로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사실 '방스'는 '생폴 드 방스'의 면적 다섯 배가 넘는 꽤 규모 있는 마을이다. 지중해를 접하고도 고도가 325m로 꽤 높고, 주변으로 높은 산이 둘러 있어 비교적 기온이 낮은 이곳은 외국인보다는 프랑스 사람들의 휴양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브 몽땅, 샤갈, 마티스 등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관광객들에게도 제법 인기가 좋다. 이상한 건 '생폴 드 방스'보다 인지도가 덜 하다는 점이다. 그런 선입견만 아니었더라면 그때 히치하이킹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절경

호텔방 창문을 열면 더욱 멋진 풍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방스는 후회 없을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 미라마르(Hotel Miramar)'는 구도심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프랑스어는 잘 모르지만 스페인어 'Mirador(전망대)'와 닮은 이름에서 어쩐지 대단한 전망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주저 없이 예약했다.

 예감은 정확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4층까지 짐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올라가는 수고스러움이 있었지만 방에 도착해 창문을 열자 힘든 것도 잊어버렸다. 게다가 이 멋진 호텔에는 무려 수영장까지 있다. 바라만 봐도 기분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호사를 누렸다. 장시간 운전하며 지친 몸과 마음 또한 물장구 한 번에 싹 가셔 버렸다.

생각보다 거리에 사람들이 없다?

아... 다들 이미 식사하러 간 거였구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시내로 나왔다. 이곳 또한 생폴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중세 성곽마을이다. 시내라고 해봐야 걸어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좁은 구역이 전부여서 천천히 돌아보면서 괜찮은 식당을 하나 골라서 들어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누가 프랑스 아니랄까 봐,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사람들은 벌써부터 식당을 가득 채우고 저녁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우리도 고민을 멈추고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 만찬의 메뉴는 크림 리조또와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 여섯 조각의 에스카르고!

 짧지만 강렬했던 이번 휴가의 마지막을 무슨 요리로 기념하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를 시켰다. 예전에 아내와 파리를 여행하면서 먹었던 추억의 요리이기도 했고, 그리 과하지 않으면서도 프랑스에 왔다는 걸 기념할만한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앙증맞은 전용 접시에 나온 여섯 조각의 요리는 마치 우리가 이번 휴가에서 보낸 여섯 번의 밤을 상징하는 것도 같았다.

구도심으로 들어가는 성벽의 입구

밤이 되자 도시는 더욱 활력이 넘친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산책을 하다가 옛 생각이 나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막 찍은 사진 몇 장을 골라 12년 전 이곳에서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던 친구들에게 보냈다. 고등학교 같은 반으로 함께 기숙사에서 살았던 막역한 친구들이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한 친구는 박사님이 되셨고, 또 한 친구는 나랏일 하는 사무관님이 되셨다.

 사진 밑에 옛 히치하이킹의 추억을 회상하는 글귀도 적어 보냈다. 사내자식들끼리 하기엔 좀 낯간지럽긴 해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렇게 하고만 싶었다. 휴가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였을까, 아니면 야하게 푸르르던 하늘색에 취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날따라 참 예쁘던 밤하늘

으레 중세 도시가 그렇듯, 마을 중심엔 광장이 있고...

... 그 광장에는 사람들, 음악, 이야기가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재즈 선율을 따라 걷다 보니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한편에 자리한 레스토랑 손님들만을 위한 공연이었지만 이미 음악 소리는 광장을 가득 채우고 남아 성벽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내와 나도 광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손을 꼭 잡고 감상에 젖었다. 

 멋진 연주가 끝났다. 곡조가 어찌나 구슬프던지 마치 오늘 밤이 우리 휴가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갈채와 환호를 아낌없이 보냈다. 우리의 휴가도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막을 내렸다. (끝)

*지금까지 젊은건축가의 프랑스 휴가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9.07.23 - 201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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