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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장의 목적, 도쿄 하라미술관 '자연국가: The Nature Rules' 전 전경

 이번이 일본으로의 세 번째 출장이다. 지난 2013년, 난생 처음으로 대형 쇼핑몰 설계를 맡게 되어 롯본기 힐즈나 미드타운 따위의 사례답사 차 도쿄에 왔었고 2015년에는 또한 처음으로 기념관 설계를 맡아 부산에서부터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들어와 기타큐슈, 야마구치, 히로시마를 돌며 여러 기념관 들을 돌아봤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도쿄 남부의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하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참가작품을 설치하는 일이다. 모형과 영상, 벽면 패널이 설계한 대로 잘 설치되는지 감독하고 오프닝과 큐레이터토크 까지 보고 오면 나의 임무는 완수다.

대학로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오후 비행기라 아침에 캐리어를 끌고 출근했다가 회사차를 얻어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차피 동행없이 가는 길이라 공항버스를 타고 가도 그만이지만 미술관까지 가져가야하는 모형이 꽤 무거워 신세를 좀 지기로 했다.

 지난 두 번의 일본 출장에서는 직장 상사를 모시는 자리였고 다른 동행도 있었다. 혼자 가는 출장길은 당연히 몸은 더 가벼워져도 마음만큼은 무거워진다.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해도 못해도 모두 내 책임이요 혹시나 모를 사고나 위험에도 스스로 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 시점에서의 최대 임무는 두 손에 들린 나무모형을 무사히 기내로 운반하고 하네다 공항에 내려 미리 예약해둔 호텔까지 ‘모시고’ 가는 일이다. 미리 포장을 꼼꼼하게 해둔 덕분에 파손의 위험은 없었지만 혹시나 기내 반입이 금지되는 불상사가 있을까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내내 불안했다.

외로운 출장길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법

 김포공항에는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무사히 탑승 수속을 마치고 일치감치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전자책을 꺼냈다. 지난 6년 간 회사를 다니며 왕복 두 세시간 씩 걸리는 통근시간의 무료함을 책으로 달래는데 익숙해졌다. 덕분에 대학생 시절에 부족했던 독서량을 늦게나마 채우고 있다. 전자책은 신현재의 권유로 올해 초 큰맘먹고 중고로 구입했는데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자책 덕분에 독서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인류학자 정헌목 교수의 '가치있는 아파트 만들기'라는 책을 탐독했다. 건축하는 동료 최한솔의 추천을 받아 구입했다. 책을 읽는 내내 모형은 가지런히 내 옆에 놓여 있었다. 탑승 수속시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혹시 게이트에서 거부당할 수도 있으니 꼭 확인하라는 더 무서운 말을 들었다. 과연 모형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드디어 탑승 게이트가 열렸다, 과연 모형의 운명은?

... 기내 선반 위에 무사 안착! 한시름 놓았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게이트가 열렸다. 결과는 위 사진과 같이 무사탑승. 이륙 직전, 혹시나 물건이 흔들리거나 떨어지진 않을지 승무원들이 신경쓰는 모습은 보였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번 모형 처럼 위아래가 뒤집어지면 안되는 수하물들은 손으로 들고가야만 안전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행히 제작 전부터 기내 반입 사이즈를 고려한 덕분에 기내 선반에 1cm 오차도 없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제 기분좋게 짧은 비행을 즐길 차례다.

짧은 비행의 아쉬움을 기내식으로 달랬다

현해탄 위에선 이토록 맑았던 하늘이...

...하네다에 내리니 이렇게 변해있었다

 한 시간 반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는 무사히 하네다 공항에 착륙했다. 인천-나리타 보다는 각자의 도심에서 가까운 김포-하네다 노선이 출장을 목적으로 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겐 훨씬 효율적인 이동방법이 된다. 특히나 내가 묵을 숙소는 하네다 공항 바로 옆에 위치한 시나가와에 위치해 있어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 노선을 택했다.

 생각보다 흐린 날씨에 옆에는 말 붙일 사람 하나 없고... 쓸쓸하다 쓸쓸해.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

 이미 저녁시간이 훌쩍 넘긴 무렵이라 지체않고 택시를 잡아 탔다. 이렇게 혼자 가는 출장길이면 호텔 예약도 스스로 하고 지출결의로 처리하곤 한다. 그렇게 하면 호텔을 검색하면서 주변 지리에도 밝아지고 미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도착해서 헤매는 일이 적어진다. 이번 출장에서 4박5일간 묵을 숙소는 시나가와 구 신반바에 위치한 '슈퍼호텔(Super Hotel)'이다. 호텔 이름도 짧고 발음도 쉬운데 왜인지 택시 기사에게 설명하는데 진땀을 뺐다. '슈-빠 호테루'라고 나름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여러번 해봐도 갸우뚱 하시는데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호텔 주소를 보여드렸다.

슈퍼호텔의 입구,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깔끔하다

 하네다 공항에서 시나가와의 호텔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며 손에 쥔 영수증에는 4,800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돈으로 5만원 가까운 금액이니 집에서 대학로를 왕복하고도 남을 돈이다. 그러고보면 나에게는 학생 시절부터 버릇이 되어버린 헝그리 여행자 정신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공항에서 내리면 당연히 제일 싼 지하철이나 공항철도부터 찾아야 맞을 것 같은데 너무 쉽게 택시를 타고, 너무 쉽게 숙소에 도착해버리니 뭔가 쓸데없는 죄책감도 드는 것 같고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지금은 출장으로 온 것이니 개의치 않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되겠지.

체크인 하기 전 담아본 호텔의 전경

채 2,400이 안되어 보이는 낮은 층고의 복도를 지나면...

...전형적인 일본 사이즈의 작은 방이 나온다. 책상에 올려진 MDF 박스가 모형이다.

그래도 비지니스 호텔치곤 있을건 다 있었던 편리한 곳으로 기억된다

아침 식사를 하는 공간, 저 테이블 폭도 채 400이 안되었던것 같다. 과연 일본의 스케일감이란!

나름 기본을 갖춘 아침식사, 하루를 시작하기에 모자람 없는 식단이다

 피곤하면 하루쯤 숙소 밖으로 안나가도 되는 배낭여행과는 달리, 출장에서 숙소는 전체 일정의 컨디션과 업무 효율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조건이다. 그래서 숙소를 고르는 일은 현지에서 일을 하는 그 자체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번 호텔 선택은 탁월했다. 공항에서 가까운건 물론이고 전시를 설치해야 하는 하라미술관과도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였다. 게다가 고급주택가와 비지니스 빌딩들만 가득한 시나가와 구의 특성상 호텔 앞은 적당한 편의시설 빼고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실제로 이 슈퍼호텔은 외국이나 지방에서 출장을 오는 양복입은 회사원들이 업무 목적으로 짧게 묵어가는 전형적인 비지니스 호텔이다. 체크인이 늦은 탓에 흡연실을 받아 4일 내내 옷에서 담배냄새를 풍겼던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최적의 숙소였다.

대욕장이 있다?!

게다가 외기가 들어오는 노천탕이라니, 초럭키다!

 게다가 이 호텔에는 무려 온천이 있다! 사실 근처 동급의 다른 호텔들을 제치고 이 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온천이었다. 탕은 성인 서너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은 규모지만 바깥 바람마저 들어오는 '진짜 온천'이었다. 머무는 5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온천을 즐겼다. 하루종일 답사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 돌아와도 온천욕 한 번이면 말 그대로 씻은 듯 좋아졌다. 출장족의 니즈를 정확하게 간파해낸 호텔의 센스에 박수를 보낸다.

황량할 정도로 한산했던 호텔 앞 거리

편의점 하나 없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라멘집

밥 때를 훨씬 넘긴 시간에도 저리 만석인걸 보니 믿음이 간다

 그렇게 도착한 첫날 밤이 저물어 갔다. 당장 다음날 아침 일찍 부터 가져온 모형을 미술관으로 옮기고 설치 감독을 할 예정이니 오늘 밤이 마지막 여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늦은 저녁 겸 간단하게 한잔 하고 싶어서 무작정 호텔 앞 거리로 나왔는데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쓸쓸한 풍경이다. 빗방울에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배는 고파오는데...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무렵 라멘집을 하나 찾았다. 양복입은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먹는 풍경을 보니 다들 늦은 퇴근하고 허기를 달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들어가 돈코츠 라멘과 나마비루(생맥주)를 시켰다.

이번 출장의 첫 끼니는 살얼음 얹어 나오는 시원한 생맥주!

돈코츠와 소유의 모호한 경계즈음 걸쳐있는 라멘이었다

맛의 유무와는 별개로, 모름지기 음식을 남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대단한 맛집은 아니었어도 외로운 출장객의 한 끼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한 한 그릇이었다. 배는 불렀지만 취기가 살짝 올라오니 뭘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마트에 들러 이런저런 주전부리를 샀다. 출장기간 내내 조금씩 나누어 먹을 요량이라 한 봉지 가득 담았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 수고한 모형을 책상위에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짧은 출장이지만 전시 건 외에도 담당하는 다른 프로젝트 관련하여 답사가 일정에 잡혀있어 마음이 계속 바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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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네 번에 더 걸쳐서 지난달 일본에서의 출장기를 적어보려 한다. 사실 건축가의 출장이라는게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탐닉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보니 여행이 곧 일이고, 일이 곧 여행이다. 모호해진 일과 여행의 경계 덕분에 출장의 기록 또한 나에게는 소중한 글감이 되곤 한다. 그간 게으름을 핑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난달 도쿄로 혼자 다녀온 출장이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 그 시작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아래의 순서대로 짧은 글들을 연재해 보려한다.

<젋은건축가의 도쿄출장기 연재목록>
1편: 출장의 기술, 공항과 호텔 사이
2편: 출장의 목적, 하라미술관 '자연국가: The Nature Rules'전 참가기
3편: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 시부야에서 신주쿠까지
4편: 싫지만 봐야만 했던 것들, 스카이트리와 도쿄의 야경
5편: 정말 보고 싶었던 것들, 요코하마로의 짧은 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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