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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사람들에게 주말은 토요일이 아닌 금요일 부터다. 전에 집을 계약하러 처음 집주인 할머니를 만났을때도, 금요일에는 수업 넣는게 아니라며 피에스따(fiesta)는 목요일 밤부터라고 묻지도 않은 조언을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뭐, 그 말 그대로 내 시간표의 금요일에는 아무런 수업이 없다. 이따금씩 스페인어 수업 보충시간이 금요일로 잡히긴 하지만 원칙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날이다. 이런 금요일이면 보통 빨래, 청소, 밀린 집안일을 하며 여유롭게 보내곤 했다.

 지난주 금요일은 유난히 할 일이 없는 날이었다. 조깅이라도 하러 나가면 좋으련만 요새 마드리드는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전날 느즈막히 할 일을 하다가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8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늦잠을 더 자볼까 침대에서 뒤척여 봤지만 잠도 오질 않는다. 인스턴트 국을 한봉지 뜯어 푹푹 밥을 말아 아침을 먹고는 무작정 집을 나와 누에보스 미니스떼리오스(Nuevos ministerios) 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쎄르까니아스(Cercanias)역, 얼마전 빠를라(Parla)에 깔때 렌페(Renfe)를 탔던 바로 그 역이다.

요즘들어 아침마다 이렇게 거리가 촉촉하다


 밤사이 내린 비로 거리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번도 가을, 혹은 겨울 날씨에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수학여행으로 다녀온 미국과 일본은 제외). 전에 유럽을 여행했을때도 반나절이면 티셔츠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뜨거운 여름이었고, 인도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그랬었다. 아직 남아있는 간밤의 찬공기와 거리에 가득한 비냄새가 유난히 어색한 아침이었다.

 최대한 가볍게 필요한 물건만 챙긴 가방을 등에 메고 귀에는 이어폰을 푹 눌러 꽂았다. 마음만 먹으면 편안한 마음으로 유럽 여기저기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여유. 여행자가 아닌 교환학생 신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다.


엘 에스꼬리알로 데려다 줄 기차표


 오늘의 목적지는 엘 에스꼬리알(El escorial)이다. 쎄르까니아스 C-8a 라인의 종점인 이 작은 도시는, 마드리드 사람들의 여름철 휴양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봐야 마드리드에서 차로 한 시간도 채 안걸리는 가까운 곳이지만 종점이라 그런지 가격은 3.35유로. 도시를 여행하러 간다기 보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 로렌쏘 데 엘 에스꼬리알(San lorenzo de el escorial) 수도원을 보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가끔은 혼자 기차를 타는 것도 참 좋다


 누에보스 미니스떼리오스(Nuevos ministerios)역을 출발한 열차는 차마르띤(Chamartin)역을 지나 계속해서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다. 기차에 혼자타고는 마드리드 밖으로 처음 나가본다. MP3의 볼륨을 두 칸 더 올리고, 조용히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몸을 맡겼다.



저 멀리 마드리드가 한 눈에 보인다


 내가 탄 엘 에스꼬리알 행 열차는 마드리드 북동쪽으로 방향을 살짝 돌렸다. 저 멀리 마드리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마드리드의 상징(?)과도 같은 네 동의 스카이스크래퍼가 보인다.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며칠 전 한국문화원에서 빌린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다. 최근들어 외국 친구들이 한국의 술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잦아지길래 '막걸리, 넌 누구냐?'라는 책을 빌렸다. 대부분의 외국 친구들은 사케만 알지 막걸리를 모른다. 한국에도 쌀로 만드는 술이 있다고 막걸리를 소개해주면 어떻게 만드는지, 사케와의 차이는 무엇인지...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그렇게 즐겨 마시던 술인데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다. 그래서 이참에 공부좀 해볼 요량이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아 막걸리 한 잔 하고 싶다


 책을 반 쯤 읽었을까, 창 밖으로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진다. 요새 매일같이 비가 오긴 하지만 한국의 여름철 비랑은 많이 다르다. 잠깐씩 이슬비처럼 내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식이라 비가 와도 우산을 들고 나간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 옆으로 빗줄기가 점점 더 강해진다. 아차, 집에서 나올때 우산을 안들고 나왔다. 이미 열차는 마드리드에서 꽤 멀어졌을 뿐이고...

 막걸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인지 우산이 없어 비를 어떻게 피할지 걱정 보다는... 비오는 유럽의 풍경을 마주하고 막걸리에 파전 한조각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집근처 한국 식품점에서 막걸리도 판다(조금 비싸다, 작은 캔에 담긴게 거의 4유로). 하지만 지금 기차 안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한창 읽고 있던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마지막엔 거의 전세내서 타고가는 느낌!


 종점인 엘 에스꼬리알에 가까워지면서 기차 안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 내리기 직전에는 내가 있던 칸에 나 혼자 뿐이었다. 괜히 좀 멀리온 것같은 느낌이 들어 혼자 신이 났었다.




혹시 몰라 기차역의 지도를 찍어놨는데... 특별히 볼 일은 없었다


 열차를 타고 딱 한 시간을 걸려 도착했다. 아까 열차안에 있을 때보다 빗줄기는 더 굵어져 있었다. 아직 귀에는 MP3를 꽂은 상태로 역전에 나와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이건 맞을 비가 아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어차피 수도원이 어느 방향인지, 지도도 감각도 없는 상태였다) 있다가 귀에 꽃힌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음악소리가 사라진 엘 에스꼬리알의 거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고요했다. 기차역 앞이지만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엔베니도(Bienvenido)! 그 말 한마디에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마침 역으로 들어오는 할아버지 한분께 뻬르도나(Perdona, 실례합니다)하면서 말을 건넸다. 친절하게 길과 방향을 설명해 주시고는 비싼 택시를 탈 필요 없이 반대편에 버스정류장이 있다며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으신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는 비에베니도(Bienvenido, 어서와요, 환영합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종종걸음으로 플랫폼으로 들어가셨다.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시골마을에 찾아온 동양 꼬마 여행자에게 환영한다는 말을 잊지 않으시는 그 모습에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 부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거의 버스에 타자마자 내려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기차역에서 수도원까지는 1.1유로 짜리 시내버스가 20여분 간격으로 있다. 생각보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따 돌아갈때는 기차역까지 걸어가볼 생각으로 창밖의 풍경을 눈여겨 보며 구 시가지 터미널에 도착했다.

구시가지와 수도원의 위치를 안내해주는 표지판


 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구시가지 골목길을 조금더 걸어가야 수도원(Monasterio)이 나온다. 우산은 커녕 겉옷도 얇은 면 카디건 한 장 입고 나온터라 물에 빠진 생쥐마냥 홀딱 젖어버렸다.



가장 비가 많이 오던 순간... 우산 하나 챙겨왔으면 좋았을껄 하는 후회가


 드디어 저 너머로 수도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엘 에스꼬리알의 거의 유일한 관광명소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관광객들은 여전히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도원도 멋지지만 뒤로 보이는 풍경이 더 장관이다


 엘 에스꼬리알이 마드리드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건 다름아닌 높은 고도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기에 여름철 기후가 훨씬 더 시원하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고 한다. 과연 수도원을 휘감으며 뒤로 펼쳐진 풍경이 예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파란 하늘이 아쉬웠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비내린 후의 낮게 깔린 구름,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이 수도원이 모습과 어우러져 더욱 운치있게 보였다.




본격적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전


 입장료는 10유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들어가기 전 보안검색도 철저하고 공항을 통과할 때 처럼 몸검색도 받아야 했다. 생각보다 실내가 꽤 복잡한 편이지만 안내 표지가 잘 되어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조용히 수도원 이곳저곳을 따라 걸어보는 기분이 참 좋았다.




수도원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다


 수도원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일체 금지되어있다. 초반에는 금지 표시를 못보고 몇 장 찍고 있었는데 금새 경비원이 와서는 '노 쎄 뿌에데(No se puede), 금지입니다'라고 귀뜸해줬다. 혹시 실내사진 말고 창 밖으로 카메라를 대고 정원 풍경따위를 찍는건 안되냐 하고 물어봤는데 그것 조차 금지란다. 아쉽지만 나중엔 가방에 카메라를 그냥 집어넣어 버렸다.

 내부에는 수도원의 건축모형, 도면 등이 전시되어있는 건축 전시실과, 각종 미술작품들이 가득한 미술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워낙 양이 많아서 꼼꼼히 보다보면 반나절 내내 수도원에만 있게 될지도 모른다. 초반의 건축 관련 자료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특히나 수도원 전체를 지상 30cm 레벨에서 끊어 만든 기둥 평면들이나 다채로운 모형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미술 작품들은 점점 보다보니 흥미를 잃어 나중에는 그냥 휙휙 지나쳐버렸다. 그래도 유난히 눈에 띄는건 스페인의 국민화가 엘 그레꼬(El greco)의 작품들. 멀리서 살짝만 보아도 그레꼬 그림인게 확 눈에 들어온다.











너무 이쁘던 수도원 뒷편의 정원


 안에서 사진을 못찍게 하니 밖에서 한참 동안이네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수도원에서 가장 멋졌던 곳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실내 돔, 성당, 그리고 천장화로 가득했던 복도였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는 한참을 보고, 걷고, 머물다 보니 다 돌아보고 나왔을땐 비가 거의 그쳐있었다.

 수도원 건물 외벽과 노랗게, 빨갛게 단풍이 든 나무들이 참 잘 어울린다.







파노라마가 참 잘 어울리는 도시, 엘 에스꼬리알


 파노라마도 몇 장 찍었다. 내가 쓰는 후지 X100은 스윕 파노라마를 지원하는 기종인데 가끔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는 파노라마를 한 두장씩 남겨두곤 한다. 특히나 엘 에스꼬리알에서는 파노라마를 더 많이 찍었다. 멀리 보이는 산과 낮게 깔린 구름, 인적이 드문 거리의 풍경과 촉촉히 젖은 도시. 그 때의 분위기를 사진 만으로는 다 담아내기 힘든게 아쉬울 뿐이다.


수도원 근처엔 제법 식당들이 있었다


 몇 번이나 다시 뒤를 돌아보며 수도원을 나섰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분명 국 한그릇에 밥 한공기 말아 든든하게 먹고 나왔는데... 스페인에서는 보통 낮 두시 이전엔 식사 메뉴를 팔지 않는다. 이때 시간이 한 시 무렵. 두시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먹는것도 좀 그렇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아쉬워서 구 시가지 근처에서 아무 카페테리아나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맥주 한 잔과 따빠스면 꽤 근사한 점심 식사가 된다


 마침 찾아 들어간 카페테리아가 참 분위기 좋은 곳이라 생각보다 한참을 더 있었다. 원래는 커피 한잔에 보까디요(Bocadillo, 샌드위치 종류)로 요기만 하려고 했는데 바에서 계속 있다보니 맥주도 두 잔이나 더 마셨다. 스페인에서는 일반적으로 맥주를 시키면 기본 안주로 간단한 따빠스(Tapas, 핑거푸드 같은 안주류)를 준다. 제일 좋은건 이 따빠스가 매번 맥주를 시킬때마다 조금씩 바뀌어 나온다는건데, 생각보다 두어조각 집어먹고나니 배가 불러서 이날 점심은 그렇게 맥주와 따빠스로 해결했다.

기차역까지 버스를 타기엔 너무 에매한 거리...


 다시 구시가지를 걸어 아침에 내렸던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처음 마음 먹었던 것처럼 기차역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지도는 없지만 올때 주위를 눈여겨본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혼자 노래부르고, 사진찍으며 빗속을 걸었다


 아직도 부슬비가 조금씩 내리고는 있었지만 우산없이 한적한 거리를 걷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간간히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차들만 지나가고 기차역까지 걸어오는 내내 거리엔 나 혼자 뿐이었다. 한껏 분위기에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걸었다.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한 열 곡은 더 부른것 같다. 그러고보니 요새 노래방 가고싶은 생각이 참 간절하다.

 기차역에서 구시가지까지의 거리에는 제법 고급스런 주택들이 즐비하다. 나름 건축가의 손길이 엿보이는 특이한 집들도 있었고 수영장이 딸린 정원 큰 집도 여럿 보였다. 이런 집들 대부분이 도시 사람들의 별장으로 세워진 건물이라고 했다. 더운 여름날 이런 평화로운 도시에서 여유롭게 주말을 보내는 것도 참 괜찮겠다 싶었다.



안녕! 고마웠어 엘 에스꼬리알!


 하룻동안의 짧은 엘 에스꼬리알 여행을 마치고 다시 렌페(Renfe)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피곤했는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기차에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해서 놀랬었다.

 별 생각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좋았던 엘 에스꼬리알. 평소 비 맞는걸 좋아하기는 해도 여행할때 비오는건 달갑지 않았는데, 이 날 만큼은 비가내려서 더욱 좋았던 그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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