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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를라, 파를라, Parla... 어떻게 쳐봐도 네이버에서는 결코 검색할 수 없는 도시.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흔한 블로그 리뷰조차 하나 없는 이런 도시에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가게 된걸까. 그날의 갑작스러운 여행은 우린이가 우리집에 놀러와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부터 시작됐다.


배불리 한그릇 뚝딱 해치우고 커피생각이 간절하던 그 즈음...


 이번주 화요일은 스페인의 공휴일이었다. 겨우 단 하루 쉬는거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학교 수업은 월화수 연달아 휴강. 덕분에 지난 주말부터 내리 놀아제낄 수 있는 길고긴 '가을방학'이 생겨버렸다. 우린이가 우리집에 놀러온건 월요일 점심 무렵. 사실 다른 수업은 모두 휴강이지만 오후에 스페인어 수업이 있어서 막 방청소를 마치고 학교를 가려던 찰나였다. 지난 일요일 한국 음식 파티를 하고 남은 잡채와 닭도리탕이 있어서 같이 점심으로 먹었는데... 배도 부르고 몸도 나른하고. 결국 수업을 제끼기로 했다. 그리고는 뭐할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밥을 먹었으니 후식을 먹어야지! '기차타고 커피 마시러 가자!'는 우린이의 제안에 솔깃해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냥 아무데나 찍어서 가보자...뭐 그런 식이었다


 목적지도, 준비물도 없이 카메라 하나 달랑 챙겨들고는 집 근처 Cercanias 역인 누에보스 미니스떼리오스(Nuevos ministerios) 역으로 향했다. 세르까니아스(Cercanias)는 마드리드 근교 근거리 광역 철도망을 통칭하는 단어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 파주-문산행 철도나, 경춘선 정도의 느낌으로 지하철보다는 조금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철도 시스템.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여행이 아닌 '커피 한 잔'이었기에 승차권 발매기 앞에서 눈을 감고 아무데나 찍어서 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빠를라에 가게 된 것도 그냥 우리가 탄 열차가 거기 가는 열차였기 때문


 우린이가 승차권 발매기의 목적지 화면을 계속 클릭해서 넘기고, 내가 눈감고 아무데나 손가락으로 찍기를 여러 차례. 그렇게 해서 처음 걸린 목적지는 C-1 라인의 발데라스푸엔떼스(Valdelasfuentes) 역. 하지만 열차 플랫폼에 도착했을 땐 몇 초 차이로 열차가 떠나버린 상황. 그렇게 멍하니 한참을 앉아 기다리는데 우린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반대편 승강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결국 얼떨결에 올라탄 열차는 C-4 라인의 반대편 방향으로 가는 열차. 종점은 마드리드 남쪽의 작은 도시 빠를라(Parla)였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어쨌든 기차타면 마냥 즐겁다


 쎄르까니아스(Cercanias)를 이용해본 건 전에 뜨레스깐또스(Tres cantos)에 사는 마르따네 파티에 갔을때 딱 한 번이 전부였다. 형윤이 처럼 아우또노마(Autonoma)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통학용으로 거의 매일같이 이용하지만, 학교가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우리들에겐 이용할 기회가 흔치 않았던 셈이다.

 커피 한잔 마시러 저 멀리 이름모를 도시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시작도 황당하고, 발상도 웃기지만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마냥 신나있었다.



기차타고 커피마시러 가는 자들의 여유!


 우리가 탄 열차는 마드리드 남쪽의 위성도시인 헤타페(Getafe)를 지나 종착역인 빠를라(Parla)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창밖의 풍경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심지어 헤타페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말 그대로 대 평원이 펼쳐져 있었을 정도. 이러다가 우리가 직접 밭에서 커피를 따야하는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도 했던것 같다.




빠를라. 지도조차 필요없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드디어 빠를라에 도착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왔기에 제일먼저 지도부터 찾았다. 역시 생각대로 꽤 작은 도시같았다.
 
 쎄르까니아(Cercanias)의 요금은 가는 지역의 거리에 따라 존(Zona)으로 나누어진다. 우리가 처음 끊었던 발데라스푸엔떼스는 존 B1이지만 빠를라는 그보다 조금 더 거리가 멀어서 존 B2로 분류된다. 갑작스럽게 행선지를 바꿔서 타고온 덕분에 존을 넘어가는 추가요금만 1유로 넘게 물어야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렇게 무작정 떠난 여행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일까.



트램이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게 왠 횡재!


 아무런 정보 없이 찾아온 도시 치고는 빠를라는 색다른 풍경을 가진 곳이었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있는건 다름아닌 트램! 스페인어로는 뜨랑비아(tranvía)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트램을 봤던건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딱 한번이 전부였다. 특별히 유명한 도시도 아닌데 생각치도 않았던 트램을 만나 마냥 기분이 좋았다. 타볼까 생각도 했는데 트램을 타고 돌기엔 도시가 너무 작은것 같아 그냥 레일 옆으로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도시에 트램 한대 정도 지나가는 것도 괜찮은 풍경인듯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 사이로 길게 뻗은 트램 레일은 마치 영화 세트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빠를라의 트램은 도시 중심부를 한바퀴 돌도록 되어있어서 우리도 무작정 따라 걸으면 대충 다 둘러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마드리드에 도착했을때도 느꼈지만 스페인의 도시들은 지도로 보는 것 보다 직접 걸어보면 더 작게 느껴진다. 하물며 이름없는 도시 빠를라는 어땠을까.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금새 주요 공원들과 교차로를 다 지나버렸다.



마드리드와 가까우면서 먼 도시,빠를라의 풍경


 마드리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지만, 여러모로 빠를라는 마드리드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꼭 그게 트램이 있어서 이지만은 않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건 낡고 오래된,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이다. 트램이 지나는 주변이면 분명 시내 중심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면 소재지' 정도 느낌에 가까워 보였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사는 사람들. 원래 마드리드에서도 남쪽으로 갈 수록 이민자들(남미 혹은 외국에서 온) 비율이 많아진다는걸 들었었는데 여기도 꽤 그래보였다. 부유해 보이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가는 그런 곳이랄까(어차피 이네들 눈에는 나도 이민자일테니).




카페떼리아를 찾느라 한참을 걸었을 만큼 조용한 도시다


 그렇게 대충 트램을 따라 도시를 한바퀴 쭉 둘러보고는 우리의 직접적인 목적지인 카페떼리아를 찾아 나섰다. 희한하게 마드리드에서는 그렇게 흔하던 '테라스 딸린 카페떼리아'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저기 골목길을 헤멘 끝에 드디어 좀 번화한 거리를 만나 카페떼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 질때까지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냥 뭐 여기서부터는 커피 마시고, 수다떨고, 책보고, 수다떨고, 맥주마시고, 수다떨고, 맥주마시고의 연속. 사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카페에 앉아 노닥노닥 시간떼우는 일에 영 소질이 없었던 나였는데 이날따라 기분이 좀 좋았던 모양이다. 점심먹고 잠깐 커피한잔 마시러 찾아온 빠를라였지만 다시 마드리드에 돌아왔을땐 벌써 해가 다 저문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뭔가 어설픈 하루였지만, 맨날 성당, 박물관, 미술관을 전전하는 시시한 유럽 여행보다 오히려 더 흥미진진했다. 솔직히 스페인을 여행해본 사람들 중에서 이 작은 도시 빠를라를 여행해본 사람이, 아니 이런 도시가 있다는걸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뿌듯한 생각도 들고... 커피도 맛있게 잘 마셨으니 만족만족 대만족이다.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다음에 또 커피마시러 다른데 가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말 다음엔 또 어디로 커피마시러 가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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