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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은 1892년 12월에 세워진, 중림동 약현성당(藥峴聖堂)이다.
 지금까지도 교회당으로 계속 이용되고 있으니, 벌써 그 역사가 120년에 가까워 지고 있는 셈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 252호로 지정되었으나, 가치있는 문화재 관리에는 허술했던 모양인지, 1998년 화재로 지붕 및 내부가 소실되는 일이 있었다. 현재의 약현성당은 2000년 복원 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모습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작지만 힘있는 약현성당의 입면


 약현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으로써의 의미도 가지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물로써 건축사적 의미를 가진다.
 덧붙이자면, 완벽한 고딕양식은 아니며, '준 고딕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이라 하면 대부분 머리속에는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래된 성당의 모습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째 약현성당은 그런 성당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00년 보수공사로 인해서 벽돌과 같은 마감재들이 새것으로 바뀌면서 중후한 느낌을 잃은것도 그 이유겠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건축기술로는 서양의 고딕양식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없었기에 '준 고딕양식'이 탄생하게되었다. 하지만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양식 벽돌조를 수용했다는 데에서 또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신부


 설계는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Eugne-Jean George Coste,1842-1869)가 맡았다.
 약현성당 보다는 훨씬더 대중적이고 많이 알고있는 '명동성당(1892-1898)'역시 그가 설계했다. 명동성당은 약현성당 이후에 설계된것으로, 좀더 큰 규모와 고딕에 가까운 양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1892년)의 사진


 잠깐 샛길로 빠져서,
 약현성당은 건축사적인 의미 외에도 사실 종교적인 의미를 함께 가진다.

 성당이 자리하고있는 언덕은 '약전현(藥田峴)'이라 하여, 약 10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가 순교한 국내 최대의 순교지이다. 그런 약전현 위에 위치한 약현성당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념비 처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서론은 여기까지로 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약현성당이 가지는 건축사적 의미를 파헤쳐 보자.
고딕 양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있다면,

 '구조가 곧 건물이 된다'라는 말만 잘 기억하시고 아래 글을 쭉 읽어주시길~
 즉, 건물의 외형(창문의 모양이든, 뾰족한 첨탑이든)이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로 덧붙여진게 아니라 건물이 제대로 서있기 위한 구조적인 힘을 바치는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형태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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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내부 천장에서 리브볼트가 확연히 드러난다

약현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딕의 요소 1, 리브볼트
 내부에 들어서면 뾰족하게 위로 솟아있는 '포인티드 아치'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천장은 평활한 한 면으로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뼈대같이 '리브'가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성당 단면도; 힘이 어떻게 리브볼트를 통해서 전달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리브볼트를 통해서, 하중이 효율적으로 분산 전달된다.
 따라서 원래 하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던 벽은 그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더 큰 창문을 뚫을 수 있게 된다.
 고딕양식의 성당에서 스테인드 글라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때문~
 워낙 큰 창이 뚤리게 되니 빛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써 그 창문을 장식하는것이다.
 약현성당 역시 거의 모든 창문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있다. 하지만 교회당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창문은 그 크기가 작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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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딕의 요소 2, 플라잉 버트레스
 플라잉 버트레스 역시 고딕양식에서 벽체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또하나의 트릭이다.
 그게 뭐냐고~? 우선 사진부터 보시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플라잉 버트레스_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사진속에서 보이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거미다리 처럼 보이는 그것,
바로 플라잉 버트레스다.
 생긴것만 봐도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는듯한 형태다.(아까 위에서 말했던 구조가 곧 건물이 된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플라잉 버트레스같은 요소들은 그저 아름답기 위한 tool이 아니라, 실제로 건물이 서있는데에 도움을 주고있다는 뜻이다)

 자 그럼 약현성당의 플라잉 버트레스는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플라잉 버트레스는 변형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다

 위에서 본 유럽의 성당과는 많이 다른 모습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벽을 보면 창문과 창문사이에 얇게 튀어나와있는 또하나의 벽이 바로 플라잉 버트레스의 흔적이다.
(사실상 벽체와 떨어져있지 않기때문에, '플라잉'이란 말은 빼고 그냥 '버트레스'라고 하는게 맞겠다)

 우선 약현성당은 규모가 작아서 플라잉 버트레스를 써야 할 만큼 하중이 벽에 많이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보다 한단계 소극적인 형태인 일반 버트레스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의 건설 기술로는 정교한 플라잉 버트레스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성당 벽체 단면도; 버트레스가 힘을 받는 원리


 아쉽게도 멋진 플라잉 버트레스를 약현성당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버트레스만으로도 충분히 벽체를 견뎌낼 수 있으며, 많은 창문을 통해 실내로 빛을 들이는데에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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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딕의 요소 3, 피어
 피어(pier)란 일반적인 기둥보다 조금더 지름이 큰 기둥을 일컫는 말이다.
 약현성당의 실내는 연속적인 벽으로 꽉 막혀있지 않고, 드문드문 피어와 아치를 통해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그에 따라 실내공간은 크게 한 공간으로 읽혀지며 훨씬더 밝아질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작은 건물이지만 실내는 하나의 큰 공간으로 읽혀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중을 받는 피어와 아치의 모습


 지금의 피어의 모습은 상단부만 조적벽돌로 되어있고 하단부는 큰 돌을 깎아서 만든 모습이지만,
 이러한 모습은 2000년 화재 보수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는 피어 전체가 조적식으로 되어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내부 부분 입면도; 피어와 아치는 효과적으로 힘을 전달하면서도 빛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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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조금 머리가 아플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약현성당이 왜 가치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1892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고딕양식. 열악한 건설기술에도 불구하고 고딕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코스트 신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 고딕의 흔적들은 대부분 '정통 고딕양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약현성당을 '준 고딕양식'으로 분류하는 만큼, 정통파와는 조금 다른 트릭들이 몇가지 더 숨어있다.
 건축의 불모지인 당시 한국에서 고딕양식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의 산실이랄까.


고딕을 만들어 내기 위한 현실적인 트릭 1, 목구조 경량 천장
 약현성당에서는 플라잉 버트레스와 같이 벽체의 하중을 줄이는 고딕의 요소들이 소극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천장의 하중이 왠지 걱정되었나 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본식 경량 목구조를 이용해서 하중을 줄였다


 얇은 판재로 된 가로재와 세로재를 엮어서 가볍고도 튼튼한 일본식 경량골조체계를 적용했다.
 이로써 하중을 분산 지지하는 고딕을 완벽히 재현 못한 문제점을, 오히려 하중을 줄여버림으로써 해결했다.
 고딕을 만들어내면서 일본의 지붕골조를 간접적으로 수용한점이 재미있다. 짬뽕을 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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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을 만들어 내기 위한 현실적인 트릭 2, 중국식 조적기술과 이형벽돌
 일본에 이어 이번엔 중국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의 벽돌 쌓는 기술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다. 고딕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벽돌들을 완벽하게 쌓아내는 기술이 필요했다.
 약현성당의 공사에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동원되어서 아치나 볼트와 같은 어려운 형태들을 무사히(?) 만들어 내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약현성당에 쓰인 여섯가지 형태의 벽돌들

  실제로 약현성당에는 위에 보이는 여섯가지 형태의 벽돌만 쓰였다. 정통 고딕양식에서는 셀 수 없을만큼 많은 벽돌 종류가 필요하다. 거의 한개 한개를 커스텀으로 제작하여야 할 정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 했기에 단 여섯개의 벽돌만을 사용하고, 이 벽돌들을 조합하여 중국인 기술자들이 쌓아내어 결국 지금의 약현성당이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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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성당 앞뜰의 성모상 스케치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에도 '약현성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꽤 많을지도 모른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문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었던 약현성당. 그렇기 때문에 화재와 같은 수모를 겪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건축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고딕양식의 교회당을 지어내는데에 성공한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
 결국, 지금의 약현성당은 프랑스의 감각, 일본의 구조, 중국의 기술, 그리고 한국의 염원이 모두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멋진 작품이 아닐까.


 

참고문헌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약현성당 정밀실측 및 수리보고서, 2004, 동아원색
 약현성당 100주년사 편찬위원회, 약현성당 100주년사 기념자료집, 1992, 천주교 중림동 교회
 최석우, 약현 본당사, 1976, 약현천주교회
 Heino Engel, Structure Systems, 1997,  Ostfildern-Ruit:Gerd Hat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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