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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계획했던대로라면 아침 일찍부터 자전거를 타고 성산 일출봉에 올랐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오름에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버린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런지 영 몸이 찌뿌둥하다.
 간밤에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새벽 네 시쯤 잠에서 깼다. 어찌나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치던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밖에 나와 비내리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오늘은 영락없이 비를 맞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하늘이 맑다. 알다가도 모르는게 제주의 날씨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덕분에 뽀송뽀송하게 바닷바람 쐬어가며 섭지코지까지 신나게 내달렸다.

멀리 바다너머 우리가 떠나온 온평리가 보인다


 온평리에서 섭지코지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마을을 출발해 해안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멀리 섭지코지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섭지코지를 향해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그렇게 어느덧 여행은 4일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제주공항을 나설때만 해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벌써 동쪽 끝자락을 달리고 있으니...


섭지코지 가는 길목에서 거대한 불청객을 만났다, 그리고는 사진기를 가방에 넣어버렸다.


 섭지코지를 가르키는 표지판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표지판마다 어김없이 써있는 '올인 촬영지'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린다. 섭지코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운 곳인데, 굳이 드라마 촬영지라는 수식어를 붙여 설명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히려 섭지코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게 아닐까, 아무리 봐도 사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주를 다니다 보면 이처럼 '어디어디 촬영지'라고 붙은 표지판이 꽤 많다. 물론 그런 드라마를 감명깊게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필할 수 있겠지만 너무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꼭 그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제주는 충분히 아름답고, 찾고싶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씨 한번 끝내준다!


 섭지코지에는 최근 대형 리조트가 들어섰다.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한 리조트였는데,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내 왼편으로 흉물스러운 거대 매스들이 해를 가려버린다. 소수 사람들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의 산물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리조트 허가를 내준걸까... 얄밉기 까지 하다. 돈이 있으면야 리조트에 머무르면서 편하게 경치를 감상하고 즐기면 되겠지만, 그 한 사람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섭지코지에서 눈살을 찌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보긴 한걸까. 흉물스러운 리조트 단지를 모두 지나올 때 까지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모두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섭지코지


 바람을 타고 한쪽으로 드러누운 풀숲 사이로, 자전거에서 내려 조용히 산책을 즐겼다. 섭지코지 대부분은 개인 소유의 토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팻말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으면 대부분 바다, 하늘, 땅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제주도는 이 세가지만 담아도 충분한 그런 곳이다. 비슷한 사진처럼 보여도, 마라도의 하늘과 섭지코지의 하늘은 확실히 달랐으니까.


안도 타다오의 글라스 하우스. 개인적으로는 유리의 푸른색을 좀 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을 따라 섭지코지 끝자락에 이르면, 뜬금없이 커다란 건물이 하나 나온다. 바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글라스 하우스'다. 맨 처음 이 건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꽤 호기심이 생겼었다. 아직 안도의 건물을 실제로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제주도 섭지코지에 지어진 안도의 건물이라니... 건축을 공부하는 나같은 학생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제주도에 다녀온 친구의 사진을 보고는 적잖이 실망해버렸다.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너무 못생긴 외모에 조금 실망했었다. 청담동에는 가야 어울릴듯한 외모의 글라스 하우스...


 나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의 작품, 혹은 유명한 건축물을 직접 보면 늘 '부럽다'는 생각을 먼저 하곤 한다.  물론 꼭 그의 건물이 아름답고 멋있어서, 혹은 그의 명성이 샘나서 부러운건 아니다. 다만, 이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사이트에 건물을 설계할 기회를 가졌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부럽다고나 할까. 글라스 하우스 역시 그런 의미에서 참 부러운 작품이었고, 그런 만큼 실망도 컸다. 

 아까 지나쳐온 리조트 단지와 마찬가지로, 글라스 하우스 역시 '어떻게 허가가 났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사이트에 자리잡은 건물이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 위로 따스한 햇빛이 쏟아지는 섭지코지. 그 끝자락에서 성산 일출봉을 향해 봉긋하게 솟은 언덕,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건물 아래로 들어서면 느낌이 또 많이 다르다


 비록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니 나름 매력적이다. 건물은 안에서 밖을 보기 위한 도구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걸까. 다소 노골적이긴 해도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 성산 일출봉, 그리고 섭지코지를 프레임을 통해서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었다. 현재 건물 2층은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는데, 이른 시간이라 아쉽게도 올라가 볼 수 없었다.


건물 앞뜰의 조경이 너무 좋아 몇번이고 저 길을 따라 걸었다.


 '글라스 하우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건물이 아니라 조경이었다. 북사면을 타고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작은 정원은 걸어가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의 풍경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게 된다. 계단으로 질러 가는 길도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정원을 따라 그렇게 건물에 도착하면 필로티 너머로 섭지코지의 들판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 시퀀스가 참 기분 좋았다.


 글라스 하우스를 돌아보고 다시 섭지코지로 나오는 길, 돌아오는 내내 계속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멋진 사이트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설계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 행복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건축가가 되었을 때, 나도 이런 사이트에서 내 생각을 담아낼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까. 그렇게 길을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자전거를 세워 두었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일상에서 탈출하고파 여행을 왔건만, 어느새 또 내 머리속에는 온통 건축 생각 뿐이다. 허탈한 웃음이 난다. 나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건축을 해야할 운명인가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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