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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하 10도의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던 한국의 2월. 두툼한 점퍼와 목도리를 풀어 헤치고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아프리카에서의 여정도 이제 마지막 몇 시간만을 남기고 있다.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지만 천천히 짐을 챙겨 케냐에서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시간을 보냈다. 갑작스럽게 바뀐 날씨에 적응을 못하고 잠 못 이루던 잔지바르에서의 첫 날 밤, 비포장 도로에서 덜컹거리며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먼지를 뒤집어 쓰던 기억, 난생 처음 맛보는 악어 고기로 배를 두둑히 채웠던 마지막 저녁식사. 처음엔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게만 느껴졌던 모든 일이 어느새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었다.

북적거리는 나이로비의 아침, 로컬 식당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공짜 항공권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계획조차 하지 않았을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정을 함께 했던 후배 녀석도, 설을 앞두고 급하게 떠나온 일정도, 모든것이 다 갑작스러웠기에 이 곳에서의 시간은 더욱 빠르게만 흘러갔다. 언제 다시 또 찾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에 마지막까지 한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고 싶고, 한 마디라도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마지막 아침 식사는 값이 싼 로컬 식당을 찾아 들어가 해결하기로 했다. 맛은 좀 덜해도, 현지인들 속에서 함께 식사하며 마지막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기에... 케밥과 사모사, 서양식 오믈렛과 함께 돼지 고기를 끓인듯한 현지식 스프를 곁들여 한 상 가득 배불리 먹었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유일한 흔적, 아직도 조금씩 아껴서 잘 마시고 있다


 여행 내내 넉넉치 않은 예산 때문에 늘 아끼고 또 아끼며 가계부를 써내려갔다. 꼭 필요한 돈만 쓰려다 보니 딱히 가지고 돌아갈 기념품 하나 수중에 없다. 원래 여행지에서 뭔가를 잘 사오는 편은 아니지만 왠지 그냥 가려니 어딘가 허전하다. 오래도록 이 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또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에 또 고민을 한 끝에, 결국 마지막 남은 케냐 실링을 탈탈 털어서 어제 들렀던 커피집에 다시 찾아가 케냐 AA 원두를 한봉지 사왔다. 조그만 봉지라 누구한테 선물 하기도 조금 애매한 물건이다. 그냥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집에가서 가족들과 나눠 마시기로 했다. 가끔씩 여행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를때면 한잔씩 내려서 마셔야지. 진한 커피 향이 온 집안에 퍼지면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를테니.


응고롱고로 분화구 지도, 왜이리도 반갑게 느껴질까!


 그렇게 주섬주섬 짐을 다 챙기고 나와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다. 원두와 함께 사온 커피 한잔을 음미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려본다. 벽 한켠에 걸려있는 조금 촌스러운 액자 하나. 탄자니아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지도다. 다녀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지도를 보니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 진다. 얼룩말, 코뿔소, 사자, 하이에나, 기린, 코끼리... 잠깐이었지만 지구위의 천국을 엿보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얼른 카메라를 다시 꺼내서 그날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본다. 밤마다 늘 꺼내봐서 이제는 순서까지 기억할 정도지만 그래도 왠지 질리지 않는다.

귀여운 번들렌즈와 묵직한 반사망원 렌즈


 여행기를 연재하며 참 많은 쪽지와 메일을 받았다.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는지, 렌즈는 또 어떻게 가져갔는지 이런 질문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행하며 사진을 찍는데 있어서는 카메라의 성능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비싼 장비가 있다면야 물론 더 높은 퀄리티의 사진을 얻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다가 놓쳐버리는 순간들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쳐 버렸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넘겨버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단 문의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드렸고, 못 다한 이야기를 조금 더 붙여볼까 한다.

 사람은 둘이었지만 카메라는 펜탁스 k-x 달랑 한 대였다. 아무리 배낭여행이 처음이라고는 하지만 구닥다리 카메라조차 하나 안가져온 과도하게 낙천적인 후배 녀석 덕분에 두 사람이 카메라 하나에 매달려서 아둥바둥 땀 깨나 흘렸다. 여행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진은 18-55mm 번들 렌즈로 찍었다. 사실 40mm 리밋 렌즈를 가져가긴 했지만 크롭 바디에서 화각 때문에 의외로 자주 사용하지는 못했다. 역시 풍경 사진은 시원스러운 광각이 제격이다. 아마 다음에 또 여행을 떠나면 12-24mm 같은 초광각 렌즈를 가져가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보다 더 매력적이었던건 500mm 반사망원렌즈. 망원렌즈 없이 사파리를 가면 많이 아쉬울거라는 말에, 출발 직전 가까스로 빌려서 함께 했던 녀석. 처음엔 익숙치가 않아 조작이 조금 서투르기도 했지만 덕분에 드넓은 초원 위에서 동물들의 털끝 하나, 표정 하나 까지 마음껏 담아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꽃단장 하고 이제는 집으로 갈 준비를 해본다


 열흘 내내 부시시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머리띠로 질끈 올려묶어버리고, 면도는 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했던것 같다. 시간이 좀 남는 김에 간만에 스킨로션도 바르고 사람 답게 좀 하고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그새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서 시커멓게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직 추운 겨울일텐데 어디서 이렇게 타고 왔는지 친구들이 궁금해 하진 않을까. 자꾸만 킥킥거리며 웃음이 나온다.



한산했던 나이로비 국제 공항의 전경


 아쉬움 가득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제 시간에 딱 맞춰서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했다. 그래도 케냐의 대표급 국제 공항이라 규모가 꽤 클 줄 알았는데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소소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앉아 있으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늘 느끼는 기분이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고 아련하기만 하다.

이제는 꿈만 같았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때.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게, 한국에서 탄자니아로 올때 길고 길었던 지루한 비행이다. 에구구... 다시 그 긴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혀온다.

이제는 사진속에만 남아있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풍경...


   멀리 보이는 케냐의 넓은 초원 위로 비행기가 날아 오른다. 위로는 새파란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로는 동글동글 귀여운 구름들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우리 둘 다 서로 말이 없다. 몸도 지치고 졸음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저기 멀리 아프리카 땅을 바라보고 있는게 좋았지만 강렬한 햇살때문에 창문을 더이상 열어둘 수가 없었다. 천천히 블라인드를 내리고, 이내 기내는 어두워졌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다시 이 눈을 뜨면 현실 속으로 돌아가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끝)



*그동안 [잠보! 아프리카]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또 어디로 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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