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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증기와 강한 압력으로 추출하는 커피, 에스프레소. 사람들이 흔히 즐겨 마시는 커피 베리에이션 대부분의 베이스가 되는 에스프레소는 어쩌면 우리가 아는 커피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인공적인 힘이 아닌 자연의 힘, 중력에 의해 천천히 시간을 두고 내려지는 핸드드립 커피의 그윽하고도 깊은 향은 그래서 더 그립고 아련하다.
 세계적인 커피 원두 생산지인 케냐의 원두는 생두의 크기에 따라 AA, A, B로 구분되어진다. 스스로 커피를 즐긴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식도 별로 없고 혀끝은 무뎌져 맛의 차이를 잘 느끼지도 못하는 나. 좋아하는 핸드 드립 커피보다는 인스턴트를 마시는 일이 더 많긴 해도, 언젠가 꼭 한번 'KENYA AA' 원두 커피를 본 고장에서 핸드 드립으로 마셔보고 싶다는 낭만적인 꿈이 있었다.

지난 밤,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


 어젯밤, 사파리를 마치고 돌아온 게스트 하우스 앞뜰에서 떠들석한 술자리가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손님들과 사파리 여행사 직원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까지 모두 함께 모여 걸쭉한 농담과 함께 2박3일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오늘, 추억도 많고 즐거움도 많았던 탄자니아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케냐로 출발하는 날이다.
 사실 10일 정도의 일정으로 케냐까지 들르려 생각한건 내 개인적인 욕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행기표 사정과 짧은 휴가 때문에 일정을 더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경험을 하고픈 생각에서 여행의 마지막으로 케냐를 선택했다. 케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어떤이들은 30달러나 내고 비자를 받아가며 겨우 하루 묵어가는게 너무 아깝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결코 많은걸 보려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나이로비에서 내가 하고싶었던 건 단 두가지. 하나는 커피를 마시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신기한 동물의 고기를 먹어보는 것.


어슴푸레한 새벽녘, 터미널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케냐에서 커피 한잔을 꼭 마시고 싶은 작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아직 초승달이 밝게 빛나는 새벽 5시, 잠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일찍 나왔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아직 머리가 띵 한게 몸도 찌뿌둥하기만 하다. 하지만 12시간이나 버스안에 갖혀서 아루샤까지 왔던 악몽이 떠올라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 곳에서 다시 케냐의 나이로비까지 역시 버스로 꽤 시간이 걸린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터미널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친절한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저씨 덕분에 값싸고 좋은 버스를 골라 탈 수 있었다. 우리끼리 흥정했으면 제대로 바가지를 쓸 뻔 했다. 이 곳 생리에 눈이 어두운 관광객들을 현지인 가격으로 태워주라는 아저씨 말에 버스회사 사람들이 쌍수를 치켜들고 절대 안된다며 소리를 친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은 현지 사람들이 또 잘 아는 법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와힐리로 몇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이내 굳었던 직원들 표정이 풀어지며 얼른 버스에 오르라고 이쪽으로 손짓을 한다.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돈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렇게 흥정에 성공하면 기분이 나름 좋다. 덕분에 싼 가격으로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지갑에서 나간 돈은 흥정하기 전과 같았다. 대신 버스회사가 아닌 우리 게스트하우스 아저씨에게 팁으로 말이다. 방도 너무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던 게스트 하우스를 싸게 내어준데에 대한 고마움, 아침 일찍부터 버스를 잡아주러 멀리 터미널까지 따라와준것에 대한 미안함을 모두 담아 '아산테 사나(고맙습니다)'라고 서툰 스와힐리로 인사를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탄자니아 실링을 모두 쥐어주고 나니 지갑이 텅 비어버렸다. 이제 이곳에 다시 케냐 실링을 채우게 되겠지. 그리고 케냐에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즐거워하고, 아쉬워하고, 작별하고 그러겠지...


생각보다 너무 잘 포장된 도로에 눈이 휘둥그레 졌었다, 처음에는...


 아루샤에서 나이로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잘 닦여 있었다. 공사를 마친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새카만 아스팔트 도로가 멀리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고 그 위로 굉음을 내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다르에스살람에서 아루샤로 오던 날, 울퉁불퉁한 도로에서 버스가 튕길 때 마다 내 몸도 같이 튕기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이렇게만 계속 달린다면 점심때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신이 나서는 배낭 안에 넣어두었던 책들을 꺼내 다시 일정을 수정하고 점심을 먹을 나이로비의 식당도 찾아보고 그러기로 했다.


하지만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이내 곡예 운전이 또 시작된다


 하지만 책을 꺼낸지 채 삼십분도 되지 않아서 가방 안에 다시 넣어야만 했다. 일정을 다 짰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책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도로에 감탄하며 편안히 잠이 들려던 찰나, 그 때부터 본격적인 '진짜' 길이 시작되었다. 아직 공사가 덜 끝난 도로는 군데군데 흙더미가 쌓여진 채로 막혀 있었고, 그럴 때 마다 버스는 우회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우회로는 도로 라기 보다는 모래와 자갈이 가득한 벌판에 가까웠다. 어디까지가 길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황량한 벌판. 동물들이 쉴새없이 어슬렁 거리는 그 길을 가로질러 다시 또 도로위로 올라오곤 했다. 1km쯤 가다보면 한번씩, 이렇게 계속에서 도로와 벌판을 번갈아가며 곡예에 가까운 운전이 계속됐다.

이런 길에서 자유자재로 속도를 즐기는 이들이 진짜 베스트 드라이버가 아닐까


 급하게 핸들을 좌우로 돌려가며 우회로를 달리다보니 멀미가 날 정도로 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나마 잠깐씩 올라서는 포장 도로마저도 아루샤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그 상태가 나빠졌다. 의자에 앉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겨우 안도할 수 있는 정도였다. 흙과 자갈이 가득한 우회로를 달릴때면 이내 뽀얀 흙먼지가 버스를 뒤덮어 버린다. 비틀어져서 완전히 닫히지 않는 창문 틈으로 흙먼지가 그대로 차 안에 날아들어온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코와 입을 막고 선글라스까지 껴보지만 말을 할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아파온다.


절대 멈춰있는게 아니다, 그저 정확한 속도를 알 수가 없을 뿐


 폭격이라도 맞은 것 처럼 도로 중간중간이 움푹 패여있다. 바퀴가 구덩이에 빠질 때 마다 공중으로 몸이 튀어오르며 창문에, 천장에 머리와 온 몸이 부딛힌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살살 운전하면 좋을 법도 한데 우리의 드라이버는 대인배라서 신경쓰지 않는척 시크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엑셀레이터를 더 세게 밟는다.
 운전석 너머로 살짝 계기판을 훔쳐 보니 속도계는 이미 고장이 난지 오래다. 0에서 꿈쩍도 안하는 바늘은 버스가 크게 덜컹거릴 때 마다 리듬에 맞춰서 흔들거릴 뿐이다. 주행거리는 벌써 90만 km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고장난거지 아닌지 믿을 수가 없다. 이 험한 길을 얼마나 오래 달렸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건 나 자신뿐. 안전벨트를 메려고 의자 옆을 손으로 뒤적거려보는데. 아뿔싸! 안전벨트가 없다....

이곳이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판


 버스가 멈춰섰다. 잠시 쉬어가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두 내려버린다. 이곳이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이란다. 얼른 가서 비자를 받고 수속을 한 뒤에 다시 버스로 오라고 서툰 영어로 안내를 받았다. 케냐 비자는 30달러지만 일주일 내로 머무르는 경우에는 single이 아닌 transit 비자를 받아도 무방하다. transit 비자는 12달러로 훨씬 가격이 싸서 나같은 단기 여행자에게는 훨씬 유리하다. 재빨리 입국카드를 작성하고 비자를 받아 다시 버스에 올랐다. 15분 후에 출발한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발을 동동 굴러가며 비자 발급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시간이 한참 더 지난 후에야 버스가 출발했다.
 이제부터는 케냐에 도로를 달린다. 사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지만 국경을 넘었다는 생각에 똑같은 풍경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것만 같다.






나이로비에 가까워 질수록 풍경은 도시를 닮아간다


 케냐는 탄자니아보다 조금 더 도시화된 국가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라고 해도 되겠다. 지리적으로는 바로 인접한 두 국가지만 도심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여전히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나이로비에 가까워지면서, 창 밖의 풍경도 점점 도시를 닮아간다. 아직 소떼를 치고 있는 목동이 있는 푸른 초원을 한참 달리고 나니 터널과 도로공사가 한창인 인터체인지의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 더 가면 하나 둘 씩 높은 빌딩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도로는 승용차들로 가득 채워진다.


드디어 나이로비 도심에 들어왔다


 아프리카에 온 뒤로는 차가 막힌다는 말을 잠시 잊었던것 같은데, 나이로비 외곽부터는 도로가 꽉 막혀버렸다. 대 자연을 누비며 잠시 잊고 지냈던 서울의 복잡한 모습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높은 빌딩들과 수많은 사람들, 시커먼 매연을 연신 토해내는 버스와 차들이 뒤엉켜 복잡한 도시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기도 전에 버스에서 먼저 내렸다. 우리가 묶으려고 했던 게스트 하우스의 앞을 우연찮게 지나는 덕분에 힘 들이지 않고 한번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은 복잡하고, 조금은 또 어색한 동아프리카 최대의 도시 나이로비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뉴 케냐 롯지는 마음 편하게 묵어갈 수 있는 숙소다


 '배낭여행자의 안식처(Backpackers Haven)'라고 당당하게 써놓은 뉴 케냐 롯지의 노란 간판은 어디에서 봐도 눈에 잘 띈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을 피해 얼른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입구부터 가득 메운 여행자들의 흔적은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을지를 느끼게 해준다.
 시원스럽게 중정을 가운데 둔 롯지에는 남아있는 방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풀려 하는데, 반대편 방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세상에,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밤 배를 함께 타고 왔던 한국인 형님이다. 그날 배에서 내려 정신없이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버렸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름도 모르고 이메일 주소도 모른채로 영영 만나지 못할뻔 했던 소중한 인연을 케냐에서 다시한번 마주치게 되었다. 수단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벌써 몇일 째 머무르는 중이라는 형님은 우리의 남은 하루를 기꺼이 함께 해 주시기로 했다. 든든한 가이드이자 동지를 얻은 셈이다.

힘차게 펄럭이는 케냐의 국기들


 나이로비의 하늘에는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부대끼는 케냐 국기의 강렬한 원색은 세련된 도시의 풍경과 어우러져서 또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나이로비에서 보내게 될 단 하루. 커피도 마시러 가야하고 고기도 먹으러 가야한다. 밤에는 또 형님이랑 술 한잔도 하기로 했다.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 짐을 풀러 놓기가 무섭게 주섬주섬 물통이랑 카메라를 챙기고는 거리로 나섰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높은 건물에 둘러쌓인 도심은 마치 뉴욕 맨하탄을 연상케 한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는건지 다른 어디에 있는건지 어리둥절 할 정도로. 남아있는 달러를 모두 케냐 실링으로 환전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우리는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타조와 악어고기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어느덧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전에 돌아와야 할텐데. 답답한 마음으로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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