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느덧 수능시험도 끝나고,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연말이 가까워졌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나마 예년보다 추위가 좀 덜해서 수험생들 고생이 조금은 줄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종플루라는 큰 고민거리를 안고 시험을 봤을 생각에 안스럽기도 했다.
 2005년 겨울, 지금 이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수험생이었던 그때가 문득 생각이 난다. 간밤에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아 새하얀 운동장 위에 차에서 내려 꽁꽁 얼어버린 손을 비비며 시험장으로 들어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긴 했나보다. 입시라는게 참 힘들고 괴로운 싸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생에 단 한번뿐인 소중한 경험이라 그런지 그때 일이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자네는 왜 건축을 택했나. 입시를 준비하며, 책을 읽으며, 자기전에 눈을 감으며 늘 스스로에게 던지던 물음이었지만 막상 내 앞에 앉아있는 교수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머리속이 하얘져버렸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버벅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대답을 했었다. 
 시장에 많이 가보도록 하게.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가 가슴 깊숙히 파고 들어온다. 내가 부족하다는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건지, 아니면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그때는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다.

어느덧 대학에 들어와 건축을 공부한지도 4년째. 짧다면 짧지만, 또 길다면 긴 시간동안 그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참 시장에 많이도 갔다. 자연스럽게 시장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도 두어개 진행해 보면서 그 중 재래시장에 대한 제안은 서울시청에 초청받아 오세훈 시장님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도 얻었었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시장의 표정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12:30 AM, 무작정 노량진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용기가 안나서 사진 동아리 후배들을 몇명 불렀다. 막차를 타고 노량진에 모여서 밤새 수산시장을 돌아다니고, 다시 첫차를 타고 헤어지자는 조금은 무모한 선배의 계획이었지만 얼추 다섯명정도가 모이기로 했다. 이것저것 집을 급하게 챙기고 나와 9호선 막차를 탄 시각은 밤 12시 반. 노량진까지는 20분정도 걸린다.
 새벽 공기가 꽤 차가울거라는 생각에 두꺼운 점퍼를 두겹이나 걸치고, 카메라가 들어있는 큰 가방을 둘러맨 내 모습을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비추어 본다. 영락없는 배낭여행자의 모습이다.
 시내방향으로 나가는 지하철 막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자주 가던 노량진 이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가고있자니 문득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배낭여행자가 된 묘한 기분이 든다. 밤새도록 야간기차를 타고 달려 새볔 공기를 맞으며 새로운 도시에 첫 발을 디딜때의 그 설레이는 느낌! 고작 20분 달려와 노량진역에 내리는 주제에 별 생각을 다한다고 스스로에게 살짝 핀잔을 줘본다.




2:00 AM,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장의 적막
인생을 공부하고 싶다면 새벽 수산시장에 가봐라.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꽤 자주 인용되는 말인듯 하다. 사람들이 다 모일때 까지 근처 맥주집에서 가볍에 맥주한잔으로 몸을 좀 데우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수산시장에 들어섰다. 늦은 시간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생각보다 시장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혼자 걱정했었는데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노량진 역 철길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따라 수산시장으로 들어서면 2층 높이의 발코니가 시장 전체를 따라서 길에 이어진다. 높은 자리에 서서 시장을 한눈에 내려보니 이거야말로 정말 장관이 따로없었다. 늦은 새벽시간이지만 한 곳도 예외없이 밝게 간판을 밝히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새벽 시장풍경에 다들 말없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하지만 시끌시끌한 시장의 풍경은 아직 때가 이른 듯 했다. 가게 아저씨께 물어보니 생선이 차로 공수되어오기 시작하는 새벽 3시쯤 부터 경매가 시작되고 시장이 시끌시끌해진다고 하신다. 새벽 두시, 그 시끄러운 한바탕 소동을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적막이 시장을 휘감고 있는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3:30 AM, 상인들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 시장에 안왔으면 집에서 한껏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을 시간. 하지만 상인들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빠른 아침이 밝아온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이집저집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덩달아 수산시장의 가게들도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하는데 한눈에 들어오는 이런 분주한 풍경이 보는 내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질만도 한데 졸린것도 잊고 말았다.
 시장 반대편에서는 경매를 준비하는 손길이 바빠진다. 집채만한 트럭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생선을 끌어내리고 분류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철퍽철퍽하는 물튀기는 소리에 맞춰 제 몸보다 더 큰 스티로폼 박스를 끌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잘 짜여진 공연한판을 보고있는 착각에 빠뜨린다.




3:32 AM.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 한켠에는 또 다른 작은 풍경이 숨어있다. 도시의 상업기능, 유희기능처럼 모든 기능이 한데 맞물리는 유일한 도시공간이 바로 시장이다. 추운 겨울 밤바람을 피해 골목 어귀에서 따끈한 국물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아직 경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가까운 지하상가로 내려가 회를 한접시 먹고 오기로 했다. 그래도 이렇게 수산시장까지 왔는데 회 한접시 못먹어보고 그냥가면 서운할것 같아서...





5:00 AM,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간의 한바탕 전쟁
 잠깐 회 한접시 먹고온 사이에 시장이 더욱 시끌벅적해진다. 몇시간 전만 해도 텅 비어있던 경매장에는 노란 박스에 물이 담기고 차에서 내린 생선들이 재빠르게 분류되기 시작하는데 손놀림이 정말 예술이다. 혹여나 방해가 되지 않을까 이리저리 피해다니는데 신발이 다 젖는것도 모르고 있었다.







5:30 AM, 비릿한 생선냄새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때
 경매라는걸 처음 봤다. 직접 눈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티비에서 보던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는데 경매사 분들은 그 와중에 전화로 정보도 교환해가며 재빠르게 손가락을 쥐었다 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경매 한판이 끝나버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뒷쪽에서 새로운 경매가 또 시작된 모양이다. 이번 물건은 뭘까 가까이 가보니 내 얼굴보다도 훨씬 큰 대게가 백여마리는 족히 되어보인다.



6:00 AM, 다시 찾아온 수산시장의 밤
 수산시장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는걸까. 아니면 멈추지 않고 항상 돌고있는걸까. 새벽 6시경이 되어서야 경매가 거의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너무나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마치 전쟁을 하듯이 벌어진 경매가 내 정신을 쏙 빼어놓아 버렸다. 또 한번 긴 정적에 묻힌 시장은 조용히 내일의 태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장에 가면 인생이 있다. 그 말이 전부는 아니어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내가 자는 사이에, 어쩌면 술을 먹고 헤롱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긴 밤동안 이렇게 도시 한쪽에서는 또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 어렴풋이 생각만 했던 도시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것만 해도 귀한 경험이 아닐까. 수산시장뿐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또 수많은 시장에서는 어떤 풍경으로 어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9호선 첫차를 탄다. 역시 막차를 탔을때처럼 사람들이 얼마 없는데, 짐수레 가득 야채를 싣고 가는 할머니가 계시길래 열차에 오르시는걸 도와드렸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얼굴을 보며 문득 또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수 많은 사람들,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조금은 진부할지 모르는 생각을 다시 한번...




공유하기 링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