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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한 탕속에 누워 큰 기지개로 아침을 맞았다. 전날의 피로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평소 같으면 느즈막히 일어나 출발했을 우리지만 오늘 만큼은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기로 마음이 통했다. 내가 지난 1년간 Y와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며 전수해준 몇 가지가 있는데 온천욕도 그중 한가지다. 발을 담가봤을때 몇 초 못견딜 정도로 뜨거운 온도여야만 근육이 풀리는 효과가 있다. 확실히 수안보 이후 Y는 온천욕 맹신자가 되었다. 친구는 이렇게 닮아가는 것 같다.




 아침부터 열심히 씻었더니 배가 고프다. 숙소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는데 식당이 눈에 띄질 않는다. 분명 어젯밤만 해도 보였던것 같은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근처 시장까지 한바퀴 슥 둘러보았지만 김밥집 하나 보이질 않는다. 그냥 짐을 다 챙겨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더 멀리서 찾아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도 시내 한바퀴를 돌때까지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 일요일 지방 소도시의 아침은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힘겨운 풍경이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 백반집을 찾아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가 오늘의 첫 손님이다.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방풍나물을 열심히 다듬고 계셨다. '당연히도' 우리 둘은 방풍나물을 처음 보았다.




 며칠전 티비에서 방풍나물에 효능에 대해 열심히 홍보하는걸 본 기억이 있었다. 풍을 막는다고 해서 방풍이라는데 확실히 건강에 좋다고 했다. 아주머니께서 다듬던 나물은 아래 사진처럼 맛깔스런 반찬이 되어 식탁에 올랐다. 한 테이블 위에서 두가지 모습을 함께 보니 재미있다. 방풍나물은 맛이 약간 씁쓸하면서도 도톰한 식감이 참 좋았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서울에서 왔으니 '재첩국'을 시키라고 하셨다. 안전을 추구하는 우리는 재첩국 한 그릇과 뼈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나눠먹기로 했다. 재첩은 민물에서 나는 백합조개의 일종으로 섬진강이 특산지다. 재첩으로 국물을 내면 시원한 맛이 일품이라 해장국으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과연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재첩만 맑게 끓인 국이 나왔다. 맛은 기대 이상이었다. 어제 마주친 풍경만으로도 최고점을 받아 마땅한 섬진강이건만 재첩국으로 가산점마저 줘야할 정도다.





 구례 시내를 나와 다시 사성암 방면으로 강을 건넜다. 어제는 밤중에 들어와 몰랐는데 역시나 주변 풍경이 대단했다. 병풍을 두르듯 위용을 자랑하며 펼쳐진 지리산 자락 사이로 앙증맞게 폭 쌓여있는 형상의 구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는 곳이다. 난 서울 토박이지만 늘 고향이 있었으면 했다. 사전적 의미의 고향이 아니라 정말 어딘가 먼 곳에 존재하는 정신의 기원과도 같은 그런 곳. 만약 다시 태어나 나의 고향을 선택하라고 하면 구례가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벗삼아 달리는 즐거운 시간이 계속된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오전 나절이 가장 신난다. 조금은 쌀쌀한 아침공기와 더불어 아무도 없는 길위로 적막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정말 최고다. 촉촉하게 내려 앉은 아침이슬 덕분인지 시원한 풀내음도 가득 풍겨온다.



 남도대교를 조금 남겨두고 자전거길은 국도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다. 차도 없고 살짝 내리막이라 기분좋게 페달을 밟았다. 길 옆으로 늘어선 가로수들은 벚나무일까. 한 두어 주만 일찍 왔었으면 더욱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남도대교 인증센터에 도착해 또 양갱을 까 먹었다. 수첩 뒤로 보이는 빨강-파랑의 다리가 남도대교인데 생각보다 많이 별로였다. 이름이 멋져서 내심 기대했건만 실망이 더 크다. 이제 종주까지는 단 두개의 스탬프가 남았다. 어제 만큼이나 길이 좋아 오후 두세시면 라이딩을 마칠 것으로 예상했다.






 남도대교 인증센터 다음은 매화마을 인증센터다. 행정구역상으론 하동군에 속한다. 정말 이름처럼 매화마을 인증센터에 가까워 질수록 길 옆으로 매화나무가 즐비하다. 상큼한 초록빛 처럼 좋은 향기라도 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국도를 따라가기도 하고 중간중간 사진처럼 매화나무 과수원을 가로지르는 샛길도 섞여있다. 여러모로 지루하지 않게 잘 짜여져 있었다.




 3월 말에서 4월 첫주 사이에 왔더라면 벚꽃이 만개한 풍경을 만났을 터. 하지만 시기를 놓쳐버려 우리가 만난 꽃나무라곤 사진에 보이는 단 한그루가 전부였다. 그래도 길 주변으로 철쭉과 영산홍이 만개해 있어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나름 꽃놀이 나온 기분으로 땅에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핸들바에 곱게 장식해보았다.








 바다가 제법 가까워졌음을 느낄 즈음, 매화마을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달리며 마주치는 표지판들에서 확실히 매화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보인다. 어느새 날이 뜨거워져 이온음료와 물을 마시며 한숨 쉬어가기로 했다. 근교 도시에서 주말 라이딩을 단체로 오셨는지 느티나무 아래에는 쫄쫄이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무리다.








 '광양시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지판을 지났다. 이제는 정말 바다의 짠내음이 코끝을 스치는것만 같다. 어제 이 시각 종주를 시작할때만 해도 졸졸 흐르던 도랑은 어느새 바다와 견주어도 될 만큼 넓어져 있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며, 어느새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나의 배에도 다시 한번 놀라본다. 광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엔 시간이 너무 늦을것 같았다. 섬진강을 따라 왔으니 섬진강에서 맛보는 재첩 한번 배 터지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도변의 적당해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위에서부터 '재첩회덮밥', '재첩국', '재첩회무침'. 바로 옆에 섬진강을 두고 맛보는 섬진강의 선물 한가득이다. 재첩회라고 해서 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살짝 데쳐 나오는 숙회의 개념이다. 재첩국은 아침에도 먹었는데 몇 시간만에 또 먹게 되었다. 확실히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런지 아까보다 야생의 풀내음 같은게 더욱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 밤중에 재첩사진을 꺼내어 보는게 아니었는데... 별것 아닌 요리 같지만 한 상 참 맛있게 먹었다. 광양까지 얼마 남지 않아 여유를 부리며 앉아 있었더니 나올땐 식당에 우리 둘 밖에 없더라. 비어있는 접시를 보며 어느새 끝을 향해 가는 이 짧은 여정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섬진강 종주길의 마지막 인증센터는' 배알도 수변공원'에 있다. 제법 긴 다리를 건너 배알도로 들어가는 길, 주변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매번 남도를 여행하며 느끼는 점은 우리나라 남해는 정말 세계 어느 바다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나 섬진강 하류의 옥색 물빛은 그중 최고였다.





 마침내 마지막 도장까지 모두 다 모았다. 구례 시내부터 여기까지 대략 50km 조금 넘는 거리를 왔다. 어제에 비해 너무 짧게 타서 그런지 종주를 마쳤음에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여행이 끝났다는게 아쉽고 또 아쉬울 뿐이다.




 종주를 마친 기념으로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런 포즈의 사진은 자전거를 얼마나 똑바로 세워 들었는지가 포인트다. 특히 앞바퀴가 좌우로 흔들리면 영 좋지 못한 사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땐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오른손으로 포크를 잡아 수평으로 유지하는 것이 팁이다. 나도 몰랐는데 이날 Y에게 한 수 배웠다.



 배알도 수변공원에는 무려 '유인 인증센터'가 있었다. 국토종주길을 제외하고는 금강, 영산강, 북한강 모두 유인 인증센터가 드물다. 때문에 지난 종주들을 인증 못받고 묵혀 뒀었는데 이번에 깔끔하게 모두 해결했다. 이리하여 4대강종주와 국토종주 모두 완료!

 작년 3월에 19,990번으로 국토종주를 받았고, 2015년 현재는 대략 3만번에서 4만번 내외 숫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반면 이번에 완료한 4대강종주는 아직도 15,652번이다. 국토종주에 비해 확실히 완료한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오천만 국민중에 만오천명이면 무려 0.03%다!




 섬진강 종주길은 배알도에서 끝나지만 여기서 다시 12km정도를 더 가야 광양시내가 나온다. 가장 빠른 길은 광양제철소 앞을 지나가는 길. 인터넷 후기를 찾아보면 중장비나 대형트럭이 많이 다니는 곳이므로 주의를 요한다고 되어있다. 실제 달려본 소감도 비슷하다. 과거 국토종주때 구미 시내를 지날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위험하다. 제철소에 처음 와보는 터라 안쪽 모습도 너무 궁금했지만 허가 없이는 들어가볼 수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철소 안을 자전거로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제철소를 지나 전남 드래곤즈 전용구장 앞에서 우회전해 광양시내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지나칠려는 찰나 가만보니 막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 선수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날은 전북과 전남의 라이벌 매치가 있는 날. 잠깐 자전거를 세워 사람들 틈에 껴서 기다리니 이동국 선수가 나왔다. 오... 그냥 자전거 타다가 본 것 치고는 운이 좋았다. 다만 이동국 선수의 표정이 좋지 않아보였는데, 알고보니 이날 패배로 22연승 행진이 끊겼다고 한다.






 이동국 선수를 본김에 마지막 스퍼트를 다해서 달렸다. 광양 중마터미널에 도착해 커피도 한잔 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시간이 임박해 미리 예매한 표를 발권하려는데 이상하게 예약 내역이 없다고 뜨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내가 예매한 표는 광양'시'가 아닌 광양'읍'에서 출발하는 버스였다. 다행히 같은 버스가 광양시 중마터미널을 출발해 광양읍을 거쳐가는 덕분에 우리는 기사님께 허락을 맡고 광양읍까지 무임승차(하하...)하여 발권할 수 있었다. 혹, 광양시 중마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하려거든 '광양'이 아니라 '동광양'을 선택해야 한다.



 밤 열시께가 되어 서울에 도착했다. 알고보니 돌아오는 표는 출발지 광양만 틀린게 아니라 도착지도 잘못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동서울로 예매했는데 난 그게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그건줄 알았다. 내가 서울의 서쪽 끝에 살아서 그런지 고속터미널 정도면 나름 '동'서울이라고 생각했던게 화근이었다. 강변 터미널은 생각조차 못했다. 어쩄거나 크고작은 헤프닝 속에 우린 무사히 모든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강변역 앞에는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횡단보도 앞에 신호를 기다리고 서있는 사람들만 해도 우리가 이틀 동안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보다 많아 보였다. 갑자기 많아진 사람에 잠깐 현기증을 느낄 뻔 했으나, 우린 곧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와 적응해버렸다.

 

 올해 말에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개통된다고 한다. (글을 올리고 막 확인해보니 하루 전에 동해안 242km구간이 우선 개통되었다고 한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이르는 무려 720km의 대장정이다. 1박2일의 짧은 여정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린 고성에서 다음 여정을 다시 시작할 것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끝)



섬진강 종주 2일차 (구례→광양)

주행거리: 66.3km

주행시간: 3시간 40분

평균속력: 18.1km/h

최고속력: 47.5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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