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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호까곶은 진정 '세상의 끝'이다.


 예전에 웹상에서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자욱한 안개 위로 깎아지는 듯한 높은 절벽이 날카롭게 이어지는 풍경으로 기억된다. 그 사진은 실제 영국 어느 지역에 있는 '하얀 절벽'이라는 곳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진을 더 찾아보니 맑은날의 풍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두어시간 거리에 있는 호까곶(Cabo da roca) 또한 여느 해안 절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세상의 끝'이다. 적어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의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포르투갈 서쪽 해안선에서 대서양을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다.




밝아보이는 현재, 하지만 내 몸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꽤 의미 있는 장소이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제법 국토의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광역 열차를 타고 한 시간정도 거리에 있는 까스까이스(Cascais)에서 내려 완행버스를 타고 다시 한 시간 정도를 가면 호까곶에 도착할 수 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리스본을 여행했던 사람들의 여행기에 함께 등장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다소 썰렁한 모습의 휴양도시, 까스까이스


 까스까이스는 리스본의 근교 휴양도시다. 제법 괜찮은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철이면 휴가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찾은 2월의 풍경은 한가함 그 자체였다. 거리에 차나 사람도 별로 없고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그래도 평소 같았으면 잠시 시간을 내어 해변을 둘러봤을 테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리스본을 떠나기 전날 밤부터 급작스럽게 안 좋아진 내 몸 상태 때문이다. 하룻밤 푹 자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찬바람을 쐬면 쐴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노선을 찾는 건 쉬웠지만 배차간격이 너무 길었다.


 부산 자갈치 시장을 연상시키는 이상하게 생긴 버스터미널로 들어섰다. 호까곶으로 가는 버스는 403번이다. 이곳 까스까이스에서 부터 호까곶을 거쳐 신트라라는 작은 도시까지 연결하는 완행 노선이다.




멀미날 정도로 굽이치는 고갯길...


 시가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버스는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생전 안하는 멀미가 다 날 지경이다. 오래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마 그 전날 뭔가를 잘못먹고 살짝 체한 것 같다. 다행히 한 시간이 채 못되어 우리는 호까곶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지도상에서 호까곶의 위치. 말 그대로 서쪽 끝이다.


 막상 버스에서 내리니 너무나 황량한 벌판에 작은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던 현재는 GPS를 켜서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에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마라도를 참 많이 닮은 풍경.


 '세상에 끝'에 서 있으니 '세상 밖'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다 휘어질 지경이다. 이쯤 해서 자연스러운 반응은 망망대해 너머 신대륙을 찾기 위해 떠났던 탐험가들을 떠올려 보는 것이겠지만... 이미 몸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번 여행기를 내내 못 쓰고 미적거렸던 이유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였다.



세찬 바람 때문에 더 이상 밖에 있을 수 없었다.


 날씨만 덜 추웠어도 어떻게든 참아보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남은 여정까지 망치겠다 싶어 현재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얼어버린 몸은 쉽게 회복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얼른 이곳을 떠나 따뜻한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온 403번의 다음 배차시간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꼼짝없이 덜덜 떨면서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프린트된 종이에 이름 세자 적어주는 가격 치고는 좀...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건물에서는 '인증서'라는걸 발급해주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을 밟아봤다는 증명서 같은 거였다. 물론 어떤 여행자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물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쉬운 방법으로 이곳에 도착한 우리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 같았다. 무엇보다도 기념품으로 가볍게 구입하기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머피의 법칙일까, 갑자기 해가 난다.


 세차게 바람이 불던 하늘은 신기하게도 버스가 도착할 즈음해서 맑아졌다. 아무래도 포르투갈에서는 나의 여행운이 모자란 모양이다.








신트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야 했던 도시.


 신트라(Sintra)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곳이라고 한다. 유럽의 아기자기한 중세 소도시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명소이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나의 상태는 신트라에 도착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서 핫초코 한 잔으로 체온을 올려보려도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혹 허기가 져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해보았지만 하필이면 싸구려 엉터리 식당을 들어가는 바람에 한 술도 뜨지 못하고 돈만 날렸다. 





길쭉한 것이 트라베세이루, 동그란건 케이자다.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신트라를 떠나야만 했다. 아픈 나 때문에 덩달아 기회를 놓친 현재에게는 미안했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유일하게 신트라에서 기억에 남는 건 이 지역의 명물 주전부리인 케이자다(Queijada)와 트라베세이루(Travesseiro)였다. 이곳에서만 파는 명물이라고 해서 사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이름을 잊지 않고 있을 정도다. 사실 그마저도 역 앞에서 급하게 사서 기차에 올라서야 제대로 맛을 볼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기껏 경주에 도착해서는 버스 터미널 앞에서 황남빵만 사서 서울로 돌아오는 꼴이다. 일상이든 여행이든 건강이 제일인건 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아픈 몸을 이끌고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포르투에 도착했다.


 이후 신트라에서 리스본까지 기차를 타고, 또 지하철을 갈아 타고 버스터미널을 찾아 가서야 비로소 포르투(Porto)행 고속버스에 탈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서는 정신을 잃고 내내 잠들어 있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포르투에 도착한 우리는 또 싼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따뜻한 잠자리는 아니었지만, 침대에 몸을 뉘이고서야 비로소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숙소가 있던 포르투의 한 골목.


 침대에 누워 가만 생각해보니 호까곶을 너무 쉽게, 무덤덤하게 다녀온 게 못내 아쉬웠다. 장소는 참 멋진데 그곳을 다녀가는 내가 오늘 별로 멋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여행기를 쓰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를 종단해 호까곶까지 여행했다는 어떤 글을 보고 나니 더욱 그렇다. 같은 장소라도 누가, 어떻게 여행하느냐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감동의 크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더 많은 곳을 여행하려 하기보다는, 한 곳을 가더라도 더 진하고, 멋지게 여행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끝'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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