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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하도 푸지게 먹고 놀아서인지 몸이 무겁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여행하며 이렇게 마음 편히 놀고먹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스무 살 멋모르고 떠났던 첫 유럽여행에선 여유보다는 의무감이 앞서곤 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곳을 들르고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땐 그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맞이한 두 번째 유럽 여행은 더욱 즐겁고 풍성하기만 했다. 특히나 포르투갈에서의 짧은 일주일은 그 절정이었다. 




비주얼은 훌륭하지만 식감은 영...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의 여행은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여행하며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 아침 메뉴는 내가 제안한 프렌치토스트였다.

 게스트하우스 냉장고에는 으레 맨 위 칸 하나 정도를 '공짜 음식'을 보관하는 데 쓴다. 쉽게 말해서 먼저 다녀간 여행자가 남은 식자재를 남겨 공유하기 위한 전용칸이다. 여행하며 직접 요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일부만 쓰고 남는 것들이 생기는데 이를 버리지 않고 필요한 사람이 나눠 쓸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문화다. 우리는 냉장고에 있는 우유와 달걀(물론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을 이용해 아침 식사를 해먹기로 했다. 열심히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생각만큼 맛있진 않았다. 그래도 여행자 입장에선 충분히 풍성한 식단이다. 이름모를 선배 여행자 덕에 공짜 식사를 즐긴 우리는 답례로 어제 규동을 만드는데 사용한 일본식 간장을 남겼다. 또 우연히 이를 발견한 후배 여행자는 어떤 신기한 요리를 선보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살포시 냉장고를 닫고 나왔다.





비에 젖어 더욱 진해진 리스본의 색채.


 어제의 화창했던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아침부터 비구름이 하늘 가득하다. 새벽녘 한차례 내린 비로 이미 거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배낭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비'는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얄궂은 존재다. 아무리 우산을 받쳐 들어도 걷다 보면 이내 운동화 속 양말까지 축축해지기 일쑤. 우비를 뒤집어쓰더라도 차가운 비를 맞으며 종일 거리를 헤매다가는 감기에 걸려 일정을 망쳐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날 아침의 가벼운 빗줄기는 오히려 도시 전체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우리 눈을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비에 흠뻑 젖어 한껏 진한 색상으로 갈아입은 도시는 차분하면서도 강렬하다.








리스본 구시가지에선 지도를 접고 터덜터덜 걸으면 그만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목적지를 두기보다는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리스본은 그 기원부터가 일곱 개의 언덕이다 보니 좁고 꼬불꼬불한 길, 계단들이 이리저리 뒤섞여있는 곳이 많았다. 분명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고 있었는데도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미아가 되어있곤 했다. 우리는 동서남북 정도의 방향만 설정하고 길 찾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때는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데 정신이 더 팔려있었던 것 같다.

 론니플래닛에는 리스본의 구시가를 여행하는 방법으로 몇 곳의 좋은 조망 포인트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며 자연스럽게 한 곳 씩 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리스본의 골목길


전망대(miradouro)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가보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은 더욱 뜸해진다.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촉촉이 내린 비 때문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대신 이따금 댕댕 종을 울리며 우리 옆을 지나치는 트램만이 이곳이 리스본임을 상기시켜준다.

 어느새 그라사 성당 전망대(Igreja e Miradouro da Graça) 안내판 앞에 도착했다. 알파마 지구의 28번 트램 종점에 있는 이곳은 저녁 노을을 감상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탁 트인 풍경. 리스본의 구시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바다 쪽으로 탁 트인 하늘을 향해 정각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그라사 성당(Igreja da Graça)은 1271년에 지어진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그 옆으로 제법 괜찮아 보이는 노천 카페도 있었지만 이른 아침이라 영업 전이었다. 화창한 날 맥주 한 병 들고 와 걸터앉아 있으면 꽤 근사하겠다 싶은 곳이었다.






이국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두 번째 전망대, 포르타스 두 솔.


 이번엔 두 번째 전망 포인트인 포르타스 두 솔(Miradouro das Portas do Sol)에 도착했다. 역시나 28번 트램이 지나가는 길목 중 한 곳인데 알고 보니 어제 트램을 내려 걷기 시작했던 바로 그곳이다. 걸어서 오다 보니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멋진 풍경을 화창한 날과 비 오는 날 두 번이나 감상할 수 있었다. 





 구시가를 내려다보는 첫 번째 전망대와는 달리, 저 멀리 대서양의 수평선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따지고 보면 포르투갈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다. 반대로 캄차카 반도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해당한다. 대륙에 정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신비롭다. 수평선 저 멀리 빼꼼히 고개를 내민 태양을 보며 날씨가 조금은 맑아질까 기대도 살짝 해본다.







길을 걷다 거울에 비친 우리 둘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 번째 전망대를 찾아가는 길. 거짓말같이 하늘이 파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도를 열심히 보고 다니긴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니 어딜 어떻게 다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보고 파안대소. 둘 다 머리는 산발 해서는 누가봐도 얼굴에 '여.행.중'이라고 써 놓은 꼴이다. 그걸 또 좋다고 각자의 카메라에 한 장씩 담았다. 




이 철조망 좀 치워 주시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마지막 전망대를 힘들게 찾아왔건만 우리 키보다 높은 철조망에 가로막혀있다. 바로 아래로 높은 낭떠러지가 있어 이렇게 막아놓은 모양이다. 아쉬운 대로 철조망 사이로 카메라를 쑤욱 밀어 넣어 사진만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찍부터 바쁘게 걸어 다닌 탓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것도 몰랐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간단히 장을 보고 점심을 해먹기로 했다.




포크 스테이크와 더운 야채.


 리스본의 여유와 낭만을 한껏 담아 즐겁게 요리했다. 당장 마트에만 가도 신선한 야채와 값싼 고기가 즐비하다. 별다른 양념 없이도 후추와 소금만 뿌려 근사한 스테이크 한 끼를 준비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이번 리스본 여행에서는 살이 찌는 기분이다.

 한 접시 푸지게 먹고 나니 자연스레 졸음이 몰려왔다. 이미 숙소에 들어온 몸, 그대로 침대에 빨려가듯 누워 낮잠을 실컷 잤다. 잘 자고 일어난 것 까지는 좋은데 어쩐지 먹은 게 얹힌 느낌이다. 여행하면서 아픈 것 만큼 서러운 게 또 없는 법인데...





하지만 이대로 잠들긴 너무 아쉽다.


 하지만 아직 리스본엔 먹어야 할 것들이 조금 남아있다. 궁금한 건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여행메이트 현재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거리는 리스본의 밤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작은 술집. 진지냐(jinjinha)라고 하는 리스본의 전통 술을 파는 작은 바다. 체리로 만든 리큐르의 한 종류인데 달콤한 맛 때문에 길을 걷다가 한 잔 가볍게 맛보기 좋은 술이다.





그 자리에서 한 잔씩 주문할 수 있다.


 속이 좋지 않았기에 혹시 소화제 역할을 할까 싶어 한잔 했다. 꽤 걸쭉한 농도에 체리 맛이 강하게 나는 제법 독한 술이다. 어린 시절 체하면 매실액을 한 숟갈씩 먹던 기억이 언뜻 스쳤지만, 딱히 이걸 먹고 나아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맛이 좋아서 한 병 사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참았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다. 






고작 에그타르트 하나 먹겠다고 기차까지 타야 하겠니...


 사실 이 늦은 시간에 밤거리로 나온 이유는 겨우 체리술 한 잔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옆 동네 벨렝지구의 '에그 타르트'를 맛보기 위해서다. 네이버 같은 데서 리스본 여행기를 검색해보면 함께 뜨는 검색어가 다름 아닌 '에그 타르트'. 유난히 맛집에 관심이 많은 한국 여행자들만의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하다 보면 도시마다 '꼭 맛보아야 할(그들 말에 의하면)' 먹거리가 있다.

 리스본의 그 유명한 에그 타르트를 먹기 위해서는 무려 기차까지 타야 한다. 서울로 치면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광명에 있는 빵집을 찾아가는 느낌이랄까.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컨디션이 거의 최악에 이르렀지만 안 먹어보고는 못 배기겠다는 현재의 성화에 울며 겨자 먹기로 벨렝지구 행 열차에 올랐다.





늦은 시간에도 줄을 서서 살 정도의 인기.


 가게에 도착하니 이미 폐점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줄을 서있는 모양새를 보니 그저 그런 곳은 아닌 모양이다. 가게 이름은 빠스테이스 데 벨렝(Pasteis de Belem)', 직역하면 '벨렝 케이크 집(과자점)' 정도 되겠다. 에그 타르트 하나에 무려 1유로가 넘는 가격이지만 들어보니 이마저도 낮엔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가게 안에는 몇몇 한국 여행자도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먹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에그 타르트 주제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


 아닌 밤중에 이 먼 곳까지 행차하게 만든 문제의 에그 타르트. 참 우리도 웃긴 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두 개 사서 하나씩 먹으면 좋으련만 딱 하나만 샀다. 일단 맛을 보고 괜찮으면 더 사자는 생각에서였다. 함께 제공되는 설탕과 계피가루를 듬뿍 뿌려 드디어 한 입씩 시식. 과연 맛은...?!


꼭 에그 타르트 때문만은 아니다, 아닐거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결국 몸져누웠다. 온종일 내린 비에 몸이 추웠는지, 아니면 점심으로 먹은게 잘못 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확실한 건 멀리 벨렝까지 가서 맛보고 온 에그 타르트는 병세가 호전되는 데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정대로면 내일 리스본을 떠나 다음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과연 하루 만에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 속도 모르고 현재는 옆에서 에그 타르트를 하나만 산 게 영 아쉽다며 툴툴대고 앉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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